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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Jun 30. 2021

단지 예쁘다는 이유로 사도 된다 #7

사슴과 비둘기

미국에 있는 옐로우스톤이라는 이름을 가진 국립공원이 있다. 땅덩어리가 큰 미국인지라 공원이란 개념 자체가 우리와 다른데, 그 크기만 우리나라 전체와 비슷할 정도로, 매우 큰 면적으로 가지고 있는 하나의 생태계이다. 그런데 1995년에 무렵 이 공원에 아주 특별한 사건 하나가 일어난다. 그것은 바로 예전에 그 공원 지역에 살았다가 멸종된, 회색늑대 무리를 복원한 일이다. 과거 멸종되기 전에 늑대들은 공원의 생태계에서 최상위 포식자였었다.


그 후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저 늑대라는 새로운 개체가 생겨난 것으로 끝났을까? 아니다. 이후 이 공원 생태계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늑대를 풀어놓은 후 최초의 변화는 바로 그곳에 살고 있는 사슴 개체수가 줄어든 현상이다. 당연하다. 사슴을 잡아먹고사는 새로운 포식자가 생겼으니 당연히 사슴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현상은 이후 연쇄적으로 변하게 될 변화의 작은 시작에 불과했다.


초식동물인 사슴이 줄어들자 나무와 풀들이 더욱 무성하게 자랄 수 있게 되었다. 나무와 풀이 자라니 비버가 나무로 댐을 만들고 그렇게 둑이 생기니 오리와 물고기도 늘어났다. 늑대가 먹고 남긴 사슴 시체는 다른 동물들에게 훌륭한 먹이 거리가 되어 주었는데, 덕분에 공원에 살고 있던 다른 수 동물들 개체수도 눈의 띄게 늘어났다. 그러니까 늑대의 출현은 단순히 포식자 하나가 추가된 것이 아니라 공원의 생태계 전체를 활성화시키는 놀라운 역할을 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숫자가 줄어든 사슴에게는 또 다른 형태의 변화가 일어났는데, 사실 이 변화는 그 어떤 변화보다도 놀라웠다.


이들은 원래 자신들을 위협하는 포식자가 없던 환경에서 매일 한가롭게 풀만 뜯다 보니 한없이 게을러졌던 사슴들이었다. 그런데 늑대라는 포식자로 인해 늘 긴장감을 가지고 살게 되면서 무척 건강해졌다. 털에 윤기가 흐르고 재빨라졌으며 반응 속도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아예 다른 종이 된 것처럼, 과거 사슴 무리에는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생명력’이라는 힘이 깃들었다.



요즘 도심에서 비둘기를 보면 이 ‘생명력’을 잃은 동물이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한 때 평화의 상징이었던 이 새는 인간이 주는 먹이에 기대어 살면서 생명력을 잃은 채 어느새 도심 속에서 더러움과 흉물스러움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사람이 바로 옆으로 걸어가도 날기는커녕 살짝 두 발로 걷기만 하고 만다. 그래서 이제 그 명칭이 날지 않는 새, 닭둘기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사슴과 비둘기의 이야기에서 위기의식이 만들어 내고 있는 생명력이라는 강력한 힘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과연 우리는 어떨까? 우리는 늑대가 나타나기 전의 게으른 사슴이나 지금 도심 속 흉물인 비둘기와 뭔가가 다를까?


우리 인간은 이 지구라는 생태계에서는 이미 최상위 포식자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평소에 좀처럼 위기를 느낄 상황에 놓이지 않는다. 그러니 냉정히 말해서 우리는 사실상 사슴이나 비둘기와 그리 다른 처지가 아니다.


우리는 분명히 매일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삶에는 위기의식을 통해 만들어진 사슴의 윤기가 흐르는 털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놀이공원이나 익스트림 스포츠 등을 통해 그런 위기를 가짜로 만들려고 노력하긴 하지만,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위기는 그저 흥미로움이나 잠시 지루함을 해결하기 위한 재미있는 요소일 뿐으로만 작용하고 만다.


우리가 사슴이 새롭게 가지게 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아예 없는 것일까? 우리는 그냥 모두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우리는 사슴처럼 어리석은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사슴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훨씬 더 많은 것을 해 낼 수 있다. 그러니 외부적 위험요소가 없다면 스스로 그것을 만들어 내면 된다. 그래야 하는 다른 이유는 따로 없다. 우리 모두는 그저 삶을 ‘반짝거리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동적으로 끌려가서는 안 된다.


모든 상황이 똑같다면 끌려가기보다는 스스로 끌고 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생명력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끌려가지 않고 끌고 갈 수 있을까? 어려우면서도 당연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스스로 위기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너무도 안전해진 환경으로 인해 외부에서는 위기가 다가오질 않으니 내면에서 스스로 그것을 만들어 내면 된다.


그것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행복은 늑대가 나타나기 전에 사슴들이 누렸던 행복임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변화가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런 행복은 분명히 안정적이고 편안하지만, 결국 게으름과 지루함을 발생시키는 행복이다. 그런 행복도 당연히 좋지만, 우리는 누구나 좀 더 제대로 된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사슴도 하는 것을 우리가 못할 리가 없다.


우리는 아이처럼 두 눈이 반짝이는 그런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나와 그리 먼 얘기도 아니다. 우리 모두는 어린 시절엔 다들 그런 행복을 누렸었다. 그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풀만 뜯다 보니 잊은 것이다. 남들보다 더 많은 풀밭을 갖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보니 어느새 늑대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만 것이다.


누가 나보다 더 넓은 풀밭을 가지고 있는지를 비교하면서 우월감을 느끼고, 열등감을 느끼며, 질투심을 느끼고, 자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그 자체가 가진 놀라운 생명력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우월감을 느끼고 자랑스러움을 느끼는 그 풀밭은 사실 우리에게 그리 꼭 필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오히려 그 거대한 풀밭은 우리를 게으른 사슴이나 흉물스러운 비둘기로 만들고 만다.


어떤 사슴의 뿔은 내 뿔보다 훨씬 멋질 수 있다. 어떤 사슴의 머리는 나보다 훨씬 좋을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은 모두 태어날 때 결정되는 것이라서 내가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살고 싶다는 의지는 생명체라면 그 누구나 똑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뿔이 작다는 이유로, 머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너무도 갖고 싶어서 자신을 비난하고 세상을 원망하느라 내가 원래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잊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들을 자신은 왜 갖지 못하는지,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는지 고민하느라 처음에 내가 왜 그것들을 가지고 싶어 하는 이유조차 아득하게 잊고 말았다. 갖지 못해 생겨난 불만과 갖지 못한 자신을 향한 자책감에 가려 내가 원래는 반짝거리며 빛나는 생명체라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원래 살고 싶어서 그것들을 갖고 싶어 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들을 갖지 못하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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