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시간여행을 해 중세시대 가서 노예를 채찍질하는 귀족에서, “비인간적이잖아요. 왜 그런 행동을 하세요!”라며 따졌을 때 그 귀족이 “아, 그렇구나. 사람을 그렇게 취급해서 미안하다.”라며 사과를 할까?
아니다. 상대는 당신을 미친놈 취급할 것이다. 귀족은 노예는 처음부터 사람이 아니라 그저 사유재산이며, 그렇기에 내 마음대로 때리거나 심지어 죽여도 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주변 다른 모든 귀족들과 심지어 노예 본인조차도 그 생각에 동의할 것이다. 아마 당신도 '정신이 이상하다는' 이유로 잡혀서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
오래전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30년 전만 해도 누군가 개를 집 안에서 키운다고 하면 더러운 개를, 그것도 개는 원래 먹으려고 키우는데, 그런 존재를 집에서 같은 이불을 덮고 자냐며 비난했을 것이다. 하지만 겨우 30년 사이에 사회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고, 지금은 개를 먹을 것 취급하는 말을 했다가는 야만인 소리를 듣게 된다.
우리는 지금 어떤 것들이 반드시 지켜져야 할 가치 있고 정의로운 것들이라고 믿지만, 사실 사회가 가진 '가치'와 '정의'는 끝없이 변해왔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가치’들은 도대체 언제까지 유효할까?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우리 인간은 도대체 왜 우월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주 많을 것이다. 그래도 아마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은 인간은 ‘머리가 좋다’ 일 것이다. 맞는 말이다. 인간은 분명히 머리가 좋다. 신체에서 두뇌 용량이 차지하는 비율이 모든 생명체 중에서 최고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두뇌 용량 자체는 사실 지난 30만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30년이 아니라 30만 년이다. 그러니까 사실상 동물에 가까운 삶을 살았던 우리 조상들과 현재의 우리는 두뇌 용량으로만 보면 거의 같다. 그런데 과거 그들의 삶과 우리의 삶은 왜 그렇게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일까?
그 차이는 ‘무리 짓기’ 능력이 이뤄낸 놀라운 변화였다. 각자만의 이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협동이 가진 힘을 통해 얻는 훨씬 더 커다란 공동의 이득을 추구하게 되면서 상대방의 이기심을 '견뎌내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내 이기심도 눈치를 보며 어느 정도 선에서 멈출 수 있게 되었다.
무리를 지어 함께 살 수 있게 된 사람들은 이후 그 힘을 더욱더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언어’라는 의사소통 수단을 만들어 냈고 결국 문자도 만들었다. 이후 종이를 발명되자 문자를 기록할 수 있게 됨으로써 전대의 지식이 후대로 전승되기 시작했다. 세대를 거듭한 지식의 축적, 이것이 바로 문명 발달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된 것이다.
인간이 원래 이기적이다, 라는 설명을 하다가 갑자기 왜 이런 설명을 하는지 궁금할지도 모르겠다.
한번 생각해보자.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결국 도시가 생겨나면 어떤 문제들이 생겨날까? 당연히 범죄이다. 사람들은 머리가 좋기 때문에 돈을 꼭 정직하게 벌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도둑질, 사기, 강도, 살인과 같은 수많은 범죄들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식의 사회 혼란은 당연히 사회 구성원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니 그대로 두면 사회가 자멸하고 만다.
이것을 막는 것은 결국 사회 전체적인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지배층에게는 매우 중요한 현안이었다.
그래서 인류는 두 가지 방법을 선택했다. 하나는 강력한 법집행을 통해 강압적으로 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방법이었다. 중국의 중요 사상을 보면, 한비자의 법가 사상이 법집행을 지지하는 입장이었고, 공자의 유가 사상이 교화를 시키는 방법을 지지했다.
사실 법집행은 쉽다. 경찰들이 많아지고, 그 경찰들이 범죄자를 잡으면 된다. 하지만 이 방식의 한계는 명확하다. 범죄를 막는 것이 아니라, 범죄가 일어난 후 수습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경찰은 유지하는데 돈도 많이 든다. 그래서 두 번째 방법이 필요하다. 바로 교화이다.
이 방법은 상대적으로 매우 어렵다. 사람의 머릿속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는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일 때부터 교육하기 시작했다. 정직, 정의, 용기, 도움, 배려, 사랑, 평등, 공정, 봉사, 번영 등과 같은 가치들을 주입했다. 그것들은 반드시 지켜야 하며, 과거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을 '위인'이나 '영웅'이라고 떠받든다.
그것이 바로 ‘도덕 교육’이다. 사실 이런 교육은 집이나 학교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만화에서, 영화에서, 소설에서, 신문기사의 미담에서 등등 우리가 접하는 수많은 것들로부터 이뤄진다. 신데렐라, 백설공주, 콩쥐팥쥐, 흥부와 놀부, 수많은 위인전 등등을 통해 정의와 정직의 가치, 공정과 평등의 가치, 사랑과 용기의 가치들이 끝없이 주입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어른이 된 우리는 이제 다들 ‘양심’이라는 것을 갖게 되었고, 그 양심은 우리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많은 가치들을 배신하지 못하게끔 막는 가장 강력한 방어막이 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시절부터 배변 훈련을 받아서 이젠 화장실이 아니면 불안해서 볼 일을 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양심’은 우리를 착하게 살게끔 만든다. 사회가 중요하다고 가르쳐준 가치들을 지키도록 만든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그것은 사회가 우리를 세뇌한 것이다. 그럼에도 과도하게 세뇌된 사람들은 이제는 자신을 불행하게 하면서까지 그런 가치들을 지키려고 하게 된다.
그런 가치들을 절대화해서 아예 '선과 악'의 관점에서 보며,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타인에 대한 비난과 원망을 하고, 그런 가치를 지키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과도한 괴롭힘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끝없이 자신이 절대적 선에 해당되는, '착한 존재', '이타적 존재'가 되는 것에 매달린다.
사회는 개인의 행복보다는 인류의 영구적 번영이 목표이다. 그것을 위해 우리를 끝없이 반복적으로 교육한다. 하지만 이 사실은 거꾸로 우리가 원래 그런 존재들이 아님을 말해준다. 우리가 원래부터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런 교육들이 필요하겠는가?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야 행복하다. 그저 남들과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도덕적으로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사회가 가르쳐 준 대로 이타적으로 사는 것은 좋지만,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불행해져서는 안 된다. 물론 남에게 큰 피해를 주거나 범죄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만 지키면 된다.
우리는 지금껏 사회가 시키는 대로 살아왔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 아니라서 많이 힘들었다. 이제 다른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자. 얼마든지 나를 위해서 이기적으로 살아야 된다.
하나의 케이크를 잘라 두 아이에게 나눠줄 때 가장 불만이 없게 만드는 방법은 엄마가 최대한 공정하게 잘라주는 것이 아니다. 한 아이에게는 자르게 하고, 다른 아이에게는 먼저 선택할 권리를 주면 된다. 그렇게 되면 둘 모두 만족한다. 이기심과 이기심이 맞붙을 때 오히려 가장 공정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기적으로 살더라도 내가 충분히 행복해지면 오히려 남에게 잘해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도둑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경찰을 늘리는 것도, 양심 교육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모든 사람을 다 잘 살게 해 주면 자연스럽게 도둑은 사라진다.
남에게 잘해주는 것은 내 이득을 위해서 정말로 필요하다. 우리는 누구나 따뜻한 이기주의자의 삶을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