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1: 나는 이제 뭐든 혼자 하는 것이 좋아. 밥도 그렇고 영화 보는 것, 쇼핑하는 것, 이제는 여행도 혼자 갈 거야.
친구 2: 오우, 대단하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어?
친구 1: 처음엔 나도 좀 걱정했는데 몇 번 하다가 보니 익숙해져서 할만하더라고.
친구 2: 나도 그러고 싶은데... 공항 같은 곳에서 비행기 기다리면서 혼자 있으면 기분이 별로 일 것 같아.
친구 1: 뭐야,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데. 그럴 땐 스마트폰을 보면 되지. 유튜브를 보거나 인스타그램에 찍은 사진 올리고 친구들 사진 구경하고 채팅하다 보면 시간이 모자랄 지경인데.
친구 2: 그렇구나. 음... 그런데 그러면 그게 정말로 혼자 하고 있는 거야?
우리는 각자마다 고유한 가치를 추구한다. 너는 그리고 나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 목숨과 바꿀 수 있을 만큼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회사에서 인정을 받아 최대한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 남다른 부자가 되는 것, 권력을 갖는 것, 불우한 처지의 사람들을 돕는 것, 자연을 지키는 것, 동물을 아끼고 보호하는 것,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것 등등 자신이 가장 의미 있고 소중하다고 믿는 것들을 추구한다.
참 가짓수도 많고 그 종류도 다양하다. 그럼에도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공통적 조건이 있다. 무엇일까?
그것을 해 낼 수 있는 능력이나 기회일까?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폭넓은 지지일까? 인류 보편적인 정서에 부합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를 인간답게 해주는 '인간다움'에 대한 확신일까?
그런 것들은 일종의 답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답이 될 수는 없다. 정답은 오직 하나, '타인의 존재' 뿐이다. 행복한 가정, 사랑하는 사람, 회사에서 인정, 부자가 되는 것, 권력을 갖는 것, 봉사를 하는 일, 자연 지킴이, 환자 돌보기 등등, 어느 것 하나도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자연을 지키는 일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안다. 처음부터 왜 자연을 보호하려는 것일까? 주장하는 말처럼 자연 그 자체가 소중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우리가 자연을 소중히 여기고 지키려는 것은, 그렇게 해야 우리 인간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홀로 소중하지 않다. 인간이 소중하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자연이 소중할 뿐이다.
너와 나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의 존재의 필요성은 우리의 생각이나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고, 다음 세대가 있기에 오늘 우리가 하는 행동에 가치가 생겨난다. 아무도 없다면 도대체 왜 자연을 보호하고 지구를 지키려고 할 것인가?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언뜻 듣기엔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진짜로 내일 지구가 멸망하면 사과나무를 심을 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한다. 삶의 마지막 날을 같이 보낼 사람이 없는 사람들만이 멍하게 하루를 보내거나 아니면 스피노자의 말처럼 사과나 무 중 하나를 선택해 심을 것이다.
몇 해 전에 개봉한 영화 패신저스(Passengers, 모튼 틸덤, 2016)에서 주인공은 동면 후 130년이 걸리는 우주여행 중 겨우 30년 남짓한 시간이 지난 후 우주선 고장으로 홀로 깨어난다. 그는 앞으로 90년이 남은 시간 동안 우주선에서 혼자서 보내야 할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앞으로 100년이 넘게 남은 우주여행으로 인해 그는 목적지에 도착도 못하고 늙어 죽게 될 것이다.
홀로 일 년을 보낸 남자는 처절한 외로움과 답 없는 미래로 인해 절망하며 자살을 결심한다. 하지만 그는 사실 마지막 희망이 있었다. 동면 중인 한 여자를 깨우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행위는 그 여자에게도 역시 자신과 같은 운명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치명적인 폭력이다. 심하게 표현하면 살인이다.
결국 남자는 여자를 깨우고,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중간이 이런저런 우여곡절은 있지만, 결국 둘은 행복한 삶을 살았고, 우주선이 목적지에 도착해 사람들이 깨어났을 땐, 우주선 안에 두 사람이 살다 간 흔적으로 가득했다.
단 한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삶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뀌는 것에 필요한 사람의 숫자는. 어쩌면 단 한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폐쇄된 공간에서 두 사람만 존재하는 상황, 이 두 사람이 얼마나 서로를 소중히 여겼을지, 얼마나 서로에게 집중했을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사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수많은 문제를 겪는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단 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욕망은 끝없이 더 많은 사람을 향하고 있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달걀을 나누어 담아야 안전해지듯, 인간관계 역시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분산시켜놔야 안전해진다는 점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얻은 것은 많다. 더 안전해졌고, 더 이득을 봤다. 하지만 잃은 것도 있다. 집중의 부재와 그로 인한 상처를 받게 되었다. 기술의 비약적인 발달 덕분에 우리는 온라인을 통해 사람들과 끊임없이 연락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만큼 함께 있는 사람에게 집중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내 앞에 있는 상대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쏠릴 때마다 미세하게 상처를 받는다. 동생의 일 때문에 내 일을 신경 써주지 못하는 엄마를 볼 때, 친구가 다른 친구와의 약속으로 인해 내 눈치를 슬슬 보면서 약속을 깰 때, 술집에서 친구와 둘이 술을 마시고 있는데 친구가 우연히 지인을 만났다면서 그 자리로 가서 한참을 떠들며 돌아오지 않을 때, 우리는 공허한 상상 속에서 스스로 상처를 받는다.
상처는 받지만 따질 수는 없다. 아니, 상처를 받는 것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럴 때가 오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다른 곳에 관심을 갖는다. 상처를 막으려는 본능이다.
엄마가 나를 신경 써주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친구랑 놀면 된다. 친구가 나와의 약속을 깨면 나도 다른 친구와 약속을 잡으면 된다. 같이 있던 친구가 다른 자리에 가서 한참을 오지 않으면 나도 스마트폰을 꺼내 지인들의 SNS를 바라보거나 단체 채팅방에 쌓여 있는 많은 메시지를 읽고 반응하면서 거기에 집중하면 된다.
상처를 받는 것은 내가 약자라는 뜻이고, 내가 너를 아쉬워하는 사람이란 뜻이 된다. 나는 약하거나 아쉬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쿨한’ 사람이다. 누군가 나에게서 한걸음 멀어지면 나도 그 즉시 한걸음 뒤로 물러난다. 아니, 두 걸음 물러선다. 가만히 있는 것은 내가 아쉬워하는 사람이란 증거이다.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크게 물러서야 한다.
덕분에 지금 시대에 우리들 대부분이 선택한 전략은 ‘혼자서도 잘 사는 삶’이 되었다. 어떤 것까지 혼자 할 수 있는지 여부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과거엔 절대로 혼자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겨졌던 금단의 벽들이 무너지고 있다.
이젠 더 이상 혼자 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저 돈이 부족할 뿐이다.
그런데 살짝 이상하다.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 안은 깜깜하게 불이 꺼져 있고, 불을 켜자 나갈 때 준비하느라 바빠서 벗어 놓은 옷들이 아무 대나 널브러져 있을 때 뭔가 살짝 희미한 감정 하나가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너무도 희미하기에 TV만 켜도 금세 사라지고 만다. 그것은 마치 눈에 잠깐 보였던 먼지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