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시대엔 가족과 같은 관계 이외에 친밀함과 충만함을 추구하는 것은 그다지 환영받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불편하게 얽매는 것이고, 가볍게 행복만 추구해야 할 관계가 불행까지 같이 감당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됨을 의미한다.
잘살고 있는 친구를 만나는 일은 즐겁고 행복하지만, 뭔가 나쁜 일이 생겨서 힘든 친구를 만나는 것은 불편하고 불행한 일이 된다. 물론 처음엔 어느 정도 참고 어울린다. 언젠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하지만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하면 결국 그 관계는 끝이 나고 만다.
내가 그것을 원해도 상대가 견디질 못한다. 상대는 자격지심, 열등감, 질투심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더 이상 행복한 나를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또한 그들 역시 내가 불행하면 금세 떠날 것이다. 가족이 아닌 친구는 어차피 그 한계가 명확하다. 가족은 책임감과 사회적 시선 때문에라도 나를 떠나지는 않겠지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친구들은 언제든 떠날 것이고, 떠남의 순간엔 잠시 '의리' 때문에 망설이겠지만 금세 잊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다. 옳은 말이다.
여기엔 그저 단 한 가지 문제가 있을 뿐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 그렇게 살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적절히 관계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더라도 우리의 본능은 그것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충분히 괜찮게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불 꺼진 방에 혼자 들어갈 때, 누군가 충만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글을 읽을 때 뭔가 설명하기 힘든 감정들이 남게 된다. 미묘하고 작지만 없지는 않다. 가끔 운 나쁘게 하루 종일 힘든 날이라도 오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갑자기 눈물이 터지고 만다.
‘외로움’이란 감정이다.
외로움은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해석되는 감정이다. 어떨 때는 심심함으로 해석이 되고, 어떨 때는 내 편이 없다는 것으로 해석이 되고, 어떨 때는 이 세상에 나를 신경 써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
젊은 시절의 외로움은 보통 심심한 것이라서 친구를 만나거나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보면 해결이 된다. 중년의 외로움은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느낌으로 인해 생겨나기 때문에 비슷한 주제로 대화를 나눌 사람을 만나거나, 말이 통한다는 이유로 불륜을 저지르기도 한다. 노년의 외로움은 독거노인의 그것이며, 생존 그 자체이다. 운 좋은 이들은 자식들의 전화로 버텨내지만 운 없는 이들은 말라서 사그라지고 만다.
같은 외로움이란 감정이지만 젊고 강한 상태일수록 쉽게 해결이 되고, 약해질수록 커져서 우리는 그 감정에 눌리고 만다. 그것이 너무 심해지면 더 이상 살아갈 의지를 잃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내용들을 이미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충분히 괜찮은 상황에서도 그런 미묘한 감정들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어느 날 운이 많이 나쁜 날이라도 오면 내가 왜 이렇게 힘든 세상을 계속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들기도 한다.
너만,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마음엔 안 들지만, 우리 인간은 처음부터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살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그렇다. 오직 나만을 위해서 하는 것은 어떤 것도 그 행위 자체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나를 위해서 음식을 하고, 나를 위해서 상을 차리고, 나를 위해 설거지를 하는 것은 당장 행복할 수는 있지만 결국 생존 행위에 불과하다. 하지만 너를 위해서 음식을 하고, 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는 것은 당장은 힘들 수는 있지만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된다. 내가 너에게 뭔가를 쌓인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은행과 같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통장을 만들어 두고 기회가 되거나 여유가 되면 거기에 뭔가를 쌓아 둔다. ‘너를 위해서’ 뭔가를 하거나 내 도움을 주는 것이다.
언제가 내가 힘든 날이 오면 꺼내 쓰기 위함이다. 남들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역시 나에게 쌓아 둔다. 내가 누군가에게 잘해준다는 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쌓는 것이고, 누군가 나에게 잘해준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에게 쌓은 것이다.
상대방에게 쌓인 양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안정적이라고 느낀다. 서로 많이 쌓인 사이일수록 그것을 잃을 때 타격이 크기 때문에 삶이 얽혀 들어간다. 그 사람의 불행이 나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내가 그동안 쌓인 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 사람의 불행을 함께 감당해준다. 그 사람 역시도 '나한테 쌓은 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 내 불행을 함께 감당해주려고 한다. 가장 이기적이지만, 가장 이타적이다.
이것이 가장 잘 작동하는 관계가 바로 가족이며, 가족을 포함한 모든 관계의 본질이 된다.
그런데 만약 평소에 쌓는 것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나중에 내가 힘들 때 나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불안해진다. 아무리 완벽히 잘 준비를 해놨더라도 혼자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어서 그렇다.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질 때는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단순히 감기로 아파서 약을 사러 나갈 때조차 그렇다. 아프면 평소엔 있는 줄도 몰랐던 내 안의 외로움이 급격히 퍼져나간다. 세상에 나 혼자 밖에 없다는 느낌이 든다. 서러움이 온몸으로 느껴지면서 눈물이 흐른다.
그 눈물은 오직 누군가의 토닥거림으로 멈춰질 수 있지만, 지금 내 곁엔 아무도 없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감정들은 다시 건강해지고 나면 곧 사라진다. 하지만 그런 기억들은 우리들의 무의식에 차곡차곡 쌓여서 또 언젠가 운 없는 날이 오면 스멀스멀 올라온다.
우리는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친구들과 잘 지내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다들 중고등학교 시절엔 가족보다도 오히려 친구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다들 서로 안에 있는 은행에 열심히 쌓았다. 하지만 우리들 대다수가 되돌려 받은 것은 결국 ‘배신’이었다. 많은 친구들이 내가 열심히 쌓은 것을 되돌려 주지 않은 채 떠나갔다. 나는 결국 많은 상처를 받았다.
그런데 그때 왜 그 친구들은 나에게 되돌려주지 않았을까? 시간이 한참 흘렀지만 여전히 잘 이해가 안 된다. 하지만 친구들은 다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그 친구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쌓아 둔 것이 아니라서 그렇다. 우리는 각자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다르다. 나는 예쁜 옷을 중요하게 여기는 친구에게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예쁜 돌을 쌓았다. 나는 많은 것을 줬지만 그 친구는 버려야 할 짐만 늘었다.
뭔가를 쌓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상대가 원하는 것을 줘야만 이뤄진다.
또 다른 이유는, 슬프게도 모든 관계가 불균형 상태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아쉬운 쪽은 훨씬 더 많이 쌓아야 한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상대가 원하는 것을 쌓아도 상대가 실제로 받았다고 느끼는 것은 쥐꼬리만큼이다. 그래서 돌려줘야 할 때는 딱 그만큼만 주고 만다. 우리는 그때 ‘이거 먹고 떨어져라’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 시절에 우리는 이것을 잘 몰랐다. 무조건 내가 주는 것이 쌓이고, 줬으면 그만큼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가 하지도 않은 배신을 당했고, 주지도 않은 상처를 받았다.
이것을 제대로 안다면 이제 조금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과거 상처로 인해서 또 다른 시작이 많이 두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가야 한다. 젊은 나는 많은 재미있는 것들로 외로움을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좀 더 나이를 먹게 되면 변변한 '대화'조차 나눌 상대조차 없음을 느끼게 되고, 좀 더 나이를 먹게 되면 감당하기 힘든 고립감 속에서 스스로 삶의 연속성에 대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