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던 넌 지금 어디 있니?

by 전찬우

이제 우리는 용기를 내어 인간관계를 다시 시작할 출발점 앞에 섰다. 당연히 걱정이 된다. 과거가 또다시 반복될까 봐, 또다시 상처를 받을까 봐, 결국 헛된 노력만 하다가 말게 될까 봐 두렵다. 걱정이 심해지면 도대체 왜 이런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 그래서 왜 다시 하라고 하는지에 대해서 따지고 싶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말 밖에 해줄 말이 없다. 우리는 원래 그렇게 타고났다 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그저 납득하는 데 있어서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는 이야기 하나를 해줄 수 있다.


잠시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꽤나 오래전 과거로 말이다.




과거로 간 당신은 지금 우리의 아주 먼 조상인 원시인이다. 커다란 동굴에서 수십 명의 다른 원시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불을 사용할 줄은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뭔가 딱히 문명의 이기라고 부를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당신은 능력 있는 사냥꾼이다. 그래서 동료들과 맘모스를 잡기 위해서 동굴을 떠나 꽤나 멀리 나와 있다. 벌써 삼일 내내 걸었지만 내일쯤이면 아마도 놈들 무리 근처에 도착할 듯하다.


하루 종일 걸었더니 몹시 피곤하다. 해가 지자 노숙을 하기로 한다. 이때 꼭 불을 피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늑대나 호랑이와 같은 야행성 포식자들이 언제 습격을 해올지 모른다. 더해서 모두가 함께 잠들어서도 안 된다. 반드시 무리 중 한 명은 깨어서 주변을 경계해야 하고 불을 꺼뜨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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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스럽게도 여럿이 함께 하기 때문에 불침번의 역할은 돌아가면서 하면 된다. 푹 자고 나면 내일은 맘모스를 잡아 맘모스 바비큐를 해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소금도, 후추도, 마늘도, 상추도 없지만 그래도 맘모스 삼겹살과 맘모스 족발구이는 아주 맛이 있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맘모스는 만만치 않은 사냥감이고, 매우 사나운 녀석이라서 사냥 중 다칠 수도 있다. 더해서 잡고 나서도 그 커다란 고기를 다 옮기는 것은 아주 큰 일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걱정은 안 된다. 동료들과 함께라면 그 커다란 녀석을 잡을 수 있으며, 혹시나 다치더라도 동료들이 도울 것이다. 고기를 옮기는 일도 함께 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혹시나 사냥 중 크게 다쳐서 다음 사냥에 나오지 못하더라도 동료들은 당신이 나을 때까지 굶어 죽지 않도록 고기를 나눠줄 것이다. 그들은 당신만큼이나 당신의 빠른 회복을 바랄 것이며, 그것은 당신도 동료가 다쳤을 때 같은 마음일 것이다.


운이 나쁘게 크게 다쳐서 이후 아예 사냥에 참가할 수 없게 되더라도 당신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창을 만든다든지, 잡아 온 고기를 썩지 않도록 훈제 처리를 한다든지, 가죽으로 옷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살면 된다.


그 시대를 살고 있는 당신에게 동굴에서 함께 사는 동료들은 단순히 ‘관계’가 아니다.


너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며, 너의 삶이 내 삶이 된다. 그로 인해 ‘관계’는 ‘생존’과 동의어이다. 그래서 혹시나 문제를 일으켜 무리에서 쫓겨나는 일이 오면 그것은 사형선고와 다름이 없다.


아마도 당신은 “그건 동굴에 살 때나 통하는 얘기잖아요. 지금 하고는 완전히 다르죠”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에게 인간관계가 ‘생존’과 직결되던 시기가 그리 오래전 과거가 아니다. 백 년 전만 해도 동굴에 살던 원시인만큼은 아니더라도 관계는 여전히 중요했다.


동굴보다는 훨씬 더 큰 단위로 성장한 공동체는 이제 ‘마을’이나 ‘촌락’등으로 불린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과거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서로의 삶을 조금씩 나누어 책임지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온 안전, 협동, 도움, 역할 분담은 여전히 유효하다.


근처 호랑이가 출몰하면 함께 몰아냈고, 모내기나 김장을 할 때 서로 도움을 주는 품앗이나 두레가 있었고, 경조사를 함께 했다. 각자의 역할은 훨씬 더 다양해져서 ‘직업’이라고 부르며 과거보다 훨씬 세세하게 나누어졌다.


마을 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태어남과 동시에 부모가 속해 있는 공동체 전체로부터 보호와 배려를 받았고 아이 역시도 평생 그 안에서 살아가고, 그 아이의 자식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로 인해서 마을에서 쫓겨나는 일은 여전히 치명적이었다.


물론 과거와 차이는 있다. 마을을 떠난다고 해서 바로 늑대나 호랑이한테 잡아 먹힐 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새롭게 터전에 정착하는 일은 매우 힘들다. 마을에서 쫓겨난 사람에게는 ‘마을을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보이지 않는 주홍글씨가 새겨져 있다.


기존의 마을 사람들은 낯선 자를 잘 받아주지도 않았고, 받아주더라도 그 안에서 과거와 같은 마을의 일원이 되는 것은 매우 지난한 과정이었다. 예전 마을에서는 태어나자마자 손쉽게 얻었던 것들이 이제 많은 힘든 노력을 통해 얻어야 할 대상이 되었다.


‘낯선 자’ 나 ‘이방인’이란 단어는 여전히 부정적 의미를 품고 있다.


시간 여행을 끝내고 현재로 다시 되돌아오자. 이제 그런 공동체는 없어졌다. 나의 안전은 동료나 마을 사람들이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경찰이 지켜준다. 나에게 닥친 불행은 보험회사가 처리해준다. 이제는 과거 그런 시대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로 인해 운명공동체로 엮여서 받아야 했던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참견, 오지랖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네 생존이 내 생존이라는’ 믿음을 근거로 당연하게 여겨졌던 과도한 참견질과 훈수질은 기분 나쁜 질척거림이며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이제는 거기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살 수 있으며,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


이제 하나만 처리하면 된다. 이미 시대가 바뀌어 우리는 얼마든지 혼자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들 각자 안에 존재하는 오래되고 한없이 어리석은 '본능'이다. 그 녀석은 아직도 자기가 동굴에 사는 줄 알고 있다. 문제는, 답답하기 그지없지만 고집불통의 그 녀석을 설득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그 녀석 때문에 우리는 이미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가끔 뜬금없이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이렇게나 발전한 세상에서 동굴에서 살던 시절을 기억하며 혼자 있으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호들갑을 떠는 본능이 보내는 경고, 그것이 바로 외로움의 본질이다.


그나마 평소엔 흘려 넘길 수가 있다. 하지만 유난히 운이 나빠서 하루 종일 힘들어 삶의 무게가 너무 버겁다는 생각이 들면 그 힘듦과 내 안의 외로움이 서로 공명을 일으켜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나고 만다.


그런 순간이 오면 아주 오래전, 내가 자는 동안 불을 지키며 나의 생존이 자신이 생존이라고 믿는 동료의 든든하고 따뜻한 손길이, 내가 힘든 일을 당하면 자신의 일처럼 나서서 돕던 마을 사람들의 오지랖 넘치는 정이 문득 몹시 그리워지는 것이다.


물론 다시 나아지면 그것들은 금세 질척거림이며 귀찮은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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