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찬우 Jul 17. 2021

먹기 위해 산다 #2

불행의 자부심

사회 보편적인 상식과는 남다른 신념을 가지고 있어서 끝없이 다수와 싸우며 살아가야 하거나, 사람들에게 잊힌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일을 하거나, 무능력하고 평생 가난했던 부모가 자신에게 빨대를 꼽고 살아가는 것을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거나, 정말로 다니기 싫은 직장을 먹고살기 위해서 억지로 다니고 있다 보면 행복이란 단어는 나하고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오직 관념 속에서나 생겨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행복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나,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듯 보이고, 허공에 붕붕 떠서 존재하지 않는 허상을 쫓는 사람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내 행복보다 훨씬 중요하게 지켜야 할 것들이 있는데, 나는 주어진 운명의 올가미에 걸려서 옴짝달싹 못하고 그 끝이 보이지 않은 불행 속에서 평생 동안 허우적대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TV 속 연예인은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사는지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런 가식적인 모습을 보다 보면 행복에 대해 없던 반감까지도 생길 지경이다.


이해는 간다. 자신과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행복’이라는 허망한 목표를 좇고 있는 삶에 대한 혐오감과 무의식적 거부감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지금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더라도 그것은 결국 스스로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것을 하기 위해 선택한 일이라는 점을 말이다. 심지어 그것이 평생 동안 무능력한 가족에게 빨대를 꽂혀 쪽쪽 빨리는 일이라고 해도.


나는 더 불행할 수 있는 일, ‘가족에 대한 의무를 버린 존재의 양심적 가책’을 느끼는 것이 더 불행해서 지금 그렇게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지금 그 어떤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는 그저 최선을 다해서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만들려고 하는 중이다. 단지 운이 나빠서 그 결과가 좋지 않은 것이다.


지금 나는 빨대를 꽂고 있는 가족 때문에 불행한가? 이것을 바꾸는 일은 아주 쉽다. 가족에 대한 불필요한 의무감을 버리고 내 행복을 위한 삶을 떠나면 된다. 


그럼 남은 무능력한 가족들은 어떻게 하냐고? 내가 알 바 없다. 그건 그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원래부터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아니었다. 그들이 그렇게 사는 이유 중 하나가 내가 있어서 그렇다. 아마도 내가 떠나면 처음엔 나를 욕하겠지만, 결국 살기 위해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런 망가진 삶을 살았던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나의 잘못된 책임감이었던 것이다.


아주 단순하고 쉬운 해결책이다. 하지만 결국 바꾸지 못할 것이다. 주변에서 가족을 떠나라는 말은 이미 귀가 닳도록 많이 들었을 것이고, 더욱 무서운 사실은 그 자체가 나에게는 하나의 정체성이 되었을 테니까.

 

불행한 자신에 대한 끝없는 연민과, 내 한마디에 눈치를 살살 보는 가족들을 바라보는 혐오스러움에 대한 쾌감, 나를 질책하는 금수저 직장 상사 앞에서 속으로 ‘가족 잘 만나 아무 걱정 없이 편하게 살아온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알아’라는 생각을 하면서 느껴지는 은근한 상대적 우월감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 설령 상사의 지적이 옳더라도, 그 우월감으로 가볍게 뭉개버릴 수 있는 능력을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불행이 정체성이 되었고, 그런 불행의 힘으로 누군가와 갈등이 생겨나면 내 잘못은 한없이 작게 만들고, 타인의 잘못은 무한대로 커지게 만드는 능력을 얻었다.


처음엔 불행이 싫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불행이 나의 모든 잘못을 합리화시켜주는 고마운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 상태에 이르게 되면 더 이상 행복은 실제로 존재해서는 안되며, 어리석은 존재들이나 추구하는 허상이어야만 한다.



무서운 함정이다. 한번 빠지면 스스로는 빠져나올 수가 없다. 그럼에도 실낱같은 희망이 있긴 하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면 분명히 빠져나올 길이 있긴 있으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행복에 대한 오해를 버려야 한다. 지금의 불행도 더 큰 불행에 비하면 행복이다. 지금 불행을 선택했다고 해서 결코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아니란 점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또한 불행과 행복의 경계는 사람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내가 지금 불행하다고 해서 모두가 똑같이 불행으로 느끼지는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누가 봐도 불행해 보이는, 평생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결혼도 못하고 혼자 사는 사람이라도 행복할 수 있다. 누가 봐도 행복할 것처럼 보이는, 돈 잘 벌고 자상한 남편과 공부 잘하는 자식들과 함께 살고 있는 여자라고 해도 사실은 불행할 수 있다.


똑같은 환경이라고 해도 그것이 행복할지 불행할지는 오직 우리들 각자의 몫이다. 거기엔 그 어떤 절대적 기준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순간에도 여전히 행복에 대한 반감을 느끼고 있다면, 자신이 얼마나 불행을 정체성화 시켜서 남들을 깔아 보는데 쓰고 있는지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아마도 지금껏 누리던 모든 불행 자부심을 버리고, 남들이 이미 멀리 앞서 있는 행복에 대한 경쟁에 뛰어들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하긴 할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이 다시 출발하기에 가장 빠른 시간이다. 오늘은 언제나 나에겐 가장 젊은 날이니까.


아무런 준비 없이 출발하라는 것은 아니다. 지금부터 충분한 준비물을 마련해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먹기 위해 산다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