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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Jul 19. 2021

먹기 위해 산다 #4

내가 두렵다고?

“당신은 사실 당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꽤나 도발적인 표현이다. 처음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 같기도 하다. 내 감정을 내가 모르면 도대체 누가 안다는 말인가?


이 표현을 들으면 사람들마다 꽤나 다양한 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 너무 단정적인 표현 같아서 반감이 느껴지는 사람, 왜 저런 헛소리를 할까 싶어서 짜증이 나는 사람,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덤덤한 사람, 음? 그런가? 하는 마음이 들면서 약간의 궁금증이 생긴 사람, 오! 감정에 대해서 내가 모르던 어떤 것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 등등이 있을 수 있다.


이런 반응들을  뭉텅이로 나누고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의심이나 짜증과 같은 부정적인 반응이고 다른 하나는 궁금증이나 호기심과 같은 긍정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자,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여기에서부터 생각해보자. 우리가 어떤 식으로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그것을 뜯어보다가 보면 생각보다 내가 내 감정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선 부정적 반응, 아니 부정적 감정을 느끼게 되는 과정에 대해서 좀 더 깊게 생각해보자. 우리는 왜 의심이나 짜증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경험하게 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과거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완전 헛소리였던가, 딱 봐도 사람들의 관심이나 끌려는 얄팍한 상술이라는 생각이 들던가, 내가 내 감정을 느끼는 것은 언제나 확실한데 왜 저런 소리를 하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을 때 그럴 수 있다.


나름대로 다양하긴 하지만, 이런 부정적 감정적 반응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어떤 식으로든 ‘자극’이 되었다는 점이다. 만약에 그 표현에 아무런 자극이 되지 않았다면 마치 “나는 어제 밥을 먹었습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아무런 감정이 생겨나지 않았어야 한다. 그러니 결국 비록 부정적이긴 해도 자극이 된 것만큼은 확실하다.


도대체 왜 그런 자극을 받게 된 것일까?


이미 비슷한 말을 들었는데 더 들어 보니 헛소리였다면 시간만 낭비한 것이다. 얄팍한 상술에 속아서 그런 제목을 가진 책을 샀다면 돈을 낭비한 것이다. 정말로 내가 내 감정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것이 진짜 사실이면 나는 나에 대해서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나,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들 수 있다.


시간이나 돈을 낭비한 것은 손해를 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손해는 그 순간에 머물지 않는다. 오늘 내가 어리석은 판단을 해서 손해를 봤다면, 과거에도 비슷하게 손해를 본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미래에도 비슷한 손해를 볼 수 있다는 불안감이 생겨나게 된다. 결국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불안해진 것이다.


불안감, 결국 그것이 이런 부정적 반응들의 공통적인 감정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불안해지는 것일까?


답은 아주 쉽다. 불안함이 생기는 이유는 바로 또 그런 일들이 일어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두려울까? 그 답 역시도 쉽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자꾸 그런 손해를 입다가 보면 결국 자신의 죽음까지도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에' 그렇다. 결국 살고 싶기에 두려움이 생겨나고, 두려움이 생기니 불안해지고, 불안해지니 수많은 다양한 부정적 감정들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한 가지 의구심이 든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감정은 분명히 의구심이나 짜증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과 두려움은 별다른 관련이 없어 보인다. 내가 두려워서 짜증이 난 것이라고? 정말로 이상한 말이다.


회사에서 퇴근할 무렵 직장 상사가 갑자기 오늘까지 다 해야 한다면서 일을 주면 그 순간 엄청 짜증이 난다. 누구나 짜증이 나는 상황이다. 그런데 왜 짜증이 날까?


만약에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다면 퇴근 시간이 되었으니 퇴근하겠다고 말하고 가거나, 그냥 시키는 대로 늦게까지 일을 하면 된다. 하지만 왜 그렇게 하지 못할까? 퇴근 시간에 퇴근을 하는 것은 직장인의 권리이며, 회사가 시킨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직장인의 의무인데 말이다.


퇴근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평판 때문에 그렇다. 설령 그 업무지시가 부당하다고 해도, 자신이 거절하고 퇴근을 하게 되면 직장 상사의 자신에 대한 평판은 분명히 변화가 있게 된다. 보통 나쁜 쪽으로 변한다. 이런 변화는 당장 내일부터 직장 상사와의 관계에 영향을 끼칠 것이며, 내년 인사고과에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그냥 일을 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 아니다. 만약 오늘 그런 식으로 시킨 일을 하면 내일도, 모레도 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오늘이야 저녁 약속이 없어서 상관없을 수 있지만, 만약 정말로 중요한 약속이 있는데 또 이런 식으로 일을 시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결국 자신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 생겨나는 평판 하락의 두려움과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일이 반복될 수 있음에 대한 두려움이 싸우는 것이다. 하지만 딱히 한쪽으로 확실히 기울어지지도 않은 상태이다. 두려움과 두려움의 애매한 평형상태, 이것이 바로 짜증의 정체이다.


그래서 오히려 한쪽으로 명백하게 기울면 짜증이란 감정을 느끼지 않게 된다.


똑같은 상황에서 뒤통수에 총을 대고 그 일뿐만이 아니라 10일 치 일을 해야 한다고 해도 여전히 짜증이 날까? 아니다. 오히려 일을 하는 동안만큼은 내가 쓸모가 있으니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안도감을 느낄 수도 있다. 총으로 인해 두려움이 확실히 한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수많은 부정적 감정들은 양팔 저울에 올라간 두 종류의 두려움에서 과연 얼마나 한쪽으로 기울었는지의 여부에 따라서 다양하게 표현되게 된다.


그 기울기가 아주 크면 공포, 불안함 등이 느껴지고, 좀 나아지면 억울함, 분노 등이 느껴진다. 그리고 많이 비슷해지면 짜증, 신경질 등을 느끼게 되고, 거의 비슷해지면 귀찮아지고 만다.


차를 타고 가다가 누군가 거칠게 끼어들면 깜짝 놀라 분노에 사로잡혀 상대 차를 강제로 멈추게 한다. 그런데 그 차에서 온 몸에 문신을 한 조폭 네 명이 내려도 여전히 분노에 사로잡혀 있을까? 아니다. 새로운 두려움이 생겨나면서 그 기울기는 한쪽으로 확 기운다. 우리는 아마도 최대한 웃으며 놀라지 않으셨냐고 물을 것이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 더 두려운 누군가는 거기에서도 화를 낼 것이다.


두려움은 각각의 상황에 따라 순식간에 수 없이 많은 부정적 감정들로 변화되어 간다. 하지만 너무도 빠른 변환 탓에 우리들은 최초의 감정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변화의 끝 지점, 그러니까 불안함, 짜증, 분노, 신경질과 같은 부정적 감정만을 느낀다고 믿게 된다. 그것들이 자신이 느낀 감정의 전부라고 여긴다. 처음부터 두렵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짜증이 온전히 상대방 때문에 생겨났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퇴근 후에 딱히 갈 곳도 없고, 밥 챙겨 먹는 것도 귀찮고, 집에 에어컨이 없어서 너무 덥다면, 누군가 일을 부탁하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질 수도 있다. 밥도 시켜 먹을 수 있고, 시원하기도 하고, 자신의 평판도 좋아지는데 도대체 짜증이 날 이유가 없다.


감정은 외부의 원인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나라는 원인으로 인해 만들어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늘 남을 향한다. 내 안의 두려움이 그 모든 것을 만들어 내고 있음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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