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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Jul 23. 2021

먹기 위해 산다 #6

지워진 시간

우리는 왜 딱히 해야 할 일이 없을 때 그냥 집에 가만히 있지 못할까? 힘들게 씻고, 화장을 하고, 밖에 나가고, 이동하고, 누군가를 만나고, 뭔가를 보거나 사고기 위해 돈도 쓰고, 에너지도 다 써서 텅 빈 지갑과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것일까?


그렇다고 해서 밖에 안 나가면 뭔가 달라질까? 전혀 그렇지 않다. 


가만히 있어도 배는 고프니 당연히 밥 먹을 준비는 해야겠지만, 그것 말고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가만히 누워서 숨만 쉬고 있는 것이 최고여야 한다. 하지만 왜 가만히 있질 못하고 TV를 보고, 친구들과 SNS로 채팅을 하고, 게임을 하고, 웹툰을 보게 되는 것일까? 그런 행동들은 분명히 밖으로 나가는 것보다는 싸게 먹히지만, 결국 어떤 식으로든 돈과 에너지를 쓰는 행위이다. 


물론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바로 ‘행복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냥 가만히 있는 상태로는 행복하기 힘들까? 단순한 수식으로 따져보면, 나는 가만히 있을수록 어떤 식으로든 이득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그렇게 살기에 너무 ‘똑똑해서’ 그렇다.


개나 고양이 혹은 침팬지나 돌고래와 같이 꽤나 머리가 좋은 동물들은 그들이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뭐, 우리가 그들의 말을 할 줄 모르니 확인할 방법은 없다. 대략 유추를 하면, 아마도 확실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어렴풋이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을 듯하다. 아무튼 그들은 아무리 머리가 똑똑해도 우리 인간만큼 명확히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혹시나 그들이 인간처럼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그들 역시도 우리들처럼 지루함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


지루함이 생겨나는 이유가 바로 ‘언젠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스스로의 죽음을 알고 있을 만큼 똑똑해서 평생 동안 지루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이것은 꽤나 좋은 일이기도 하고 꽤나 괴로운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지루함이 생겨날까?


이 질문의 답은 쉽고 명확하다. 우리는 누구나 죽고 싶지 않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시간의 여유가 생긴다면 그 시간을 그냥 보내지 않고 언젠가 다가올 죽음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니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그것이 무엇이든 미래에 도움이 될만한 뭔가를 해야 한다.


하지만 이 설명을 들으면 좀 이상하다. 게임을 하거나, 쇼핑을 하거나, 여행을 떠나는 것과 죽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지만 이런 의문은 ‘미래’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생겨난 것이다.


미래의 사전적 의미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시간을 의미한다. 하지만 미래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불 명확성’이다. 어찌 될지 모른다는 뜻이다. 지금 현재 여분으로 주어진 시간이 있다고 했을 때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대비해야 하지만, 그 대비의 결과는 어찌 될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미래가 가진 해결 불가능한 패러독스이다. 


물론 우리는 최대한 노력은 한다. 다들 각자의 나이만큼 쌓인 경험과 지식을 최대한 활용해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내고자 하지만 늘 바라던 미래가 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의 결과가 나올 때도 있다.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다가 크게 다칠 수도 있고, 더 많은 경험을 쌓기 위해서 해외여행을 떠났다가 죽을 수도 있다.


어떤 것들이 나에게 더 도움이 판단하는 것은 오직 개인의 영역이다. 각자 타고난 성격, 능력, 사는 동안 쌓인 경험과 지식에 따라 결정된다. 똑같이 미래를 대비하지만, 누군가는 공부를 해서 자격증을 따고, 누군가는 게임이나 쇼핑을 하고, 누군가는 여행을 떠나거나 책을 읽고, 누군가는 친구들을 만나서 술 한잔을 하거나 취미활동을 한다.


이렇게 서로가 너무 다른 계산식을 가진 탓에 남의 계산식을 바라보고는 ‘도대체 아까운 시간에 왜 저런 짓을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 ‘지금은 이것을 해야 할 텐데…', ‘저건 오히려 미래를 망치는 길인데…’라는 식의 생각을 하게 된다. 


단지 누군가는 이것을 굳이 말해서 꼰대가 되고, 누군가는 영리하게 생각만 하고 만다.


지루함은 기본적으로 현재 눈앞에 있는 해결해야 할 두려움이 다 사라지거나 딱히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시간이 남을 때 생겨난다. 


처음엔 심심함 정도로만 느껴지다가 시간이 지나수록 점점 지루함에 가까워지고 나중엔 결국 우울해지는 것으로 악화되고 만다. 하지만 중간에 어떤 식으로든 해결하게 되면 그 보상으로 커다란 행복감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미래라는 불확실성으로 인해 지금 힘들게 노력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만한 보상이 따라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타고난 능력이 부족해서 노력 대비 보상의 기대치가 낮은 사람들일 경우 더욱더 큰 문제가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지루함을 해결하는 것을 포기한다.


어떻게 포기를 할까?


바로 주어진 시간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그야말로 시간을 때우는 것이다. 이것은 꽤나 영리한 해결책처럼 보인다. 처음부터 시간이 남아서 생겨난 지루함이니까 그 시간 자체를 없애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이것은 마치 사람들이 자꾸 옥상에 올라가 자살을 하니 올라가는 옥상 문을 잠그는 방법과 비슷하다. 근본적 원인은 그냥 두고 떨어진다는 행동 자체를 막는다고 해서 해결이 될까?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흔히 TV를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SNS에 들락거리는 행동들이 시간을 때우는 대표적인 것들로 알려져 있다.


사실 젊은 사람들이 TV보다는 게임에 빠지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게임은 현실과 달리 투자한 시간만큼 확실한 보상이 있기에 그렇다. 노력 대비 성과가 천차만별인 데다가 잘못되면 오히려 손해를 보는 현실과 달리, 게임은 대부분의 경우 시간을 투자한 만큼 보상을 받는다. 그러니 비록 게임 속 보상이 사실상 무의미한 디지털 정보라고 해도, 그것을 통해 지루함을 꽤나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시간을 때우게 되면 결국 문제가 생긴다. 지루함은 분명히 남는 시간에 ‘너의 미래를 위해서’ 노력하는 무의식의 지시인데, 실제로 그리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하지 않으며 단순히 남는 시간을 없애버리거나, 심지어는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상으로 주어지는 행복감에 집착해서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하는 경우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엇인가에 ‘중독’이 생겨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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