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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Jul 30. 2021

내 감정은 죄가 없다 #1

나는 당연히 행복해야 할까?

아들: 아빠, 저 사람은 왜 감방에 가는 거야?

아빠: 사람을 죽였거든. 그래서 살인죄로 잡혀서 감방에서 평생 있게 될 거야.

아들: 아.. 그렇구나.


(며칠 후)


아들: 아빠, 저 사람은 왜 훈장을 받는 거야?

아빠: 저분은 지난번 전투에서 수천 명의 적을 사살한 영웅이야!

아들: 그렇구나. 그럼 아빠, 지난번 감옥에 간 사람이 영웅이 되려면 몇 명이나 더 죽여야 해?




“우리 삶의 본질은 행복일까요? 아니면 불행일까요?” 갑자기 누군가 이 질문을 뜬금없이 물으면 우리는 어떻게 답을 해줘야 할까?


‘알파 센터우리’, 우리가 속해 있는 태양계와 가장 가까운 별들 중 하나이다. 우리 지구로부터 대략 4광년 정도 거리에 있다.


태양의 지름은 130km이며, 그 빛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는 범위는 대략 화성 정도까지이며, 목성 이후로는 거의 매우 밝은 별 수준이다. 그래도 그 범위를 최대한 넓게 잡아서 태양계의 끝 행성인 해왕성까지라고 하면 대략 49억 Km 정도이다.


알파 센터우리와의 거리인 4광년을 Km로 환산하면 대략 36조Km이다. 49억Km와 36조Km, 아주 단순히 계산하면 태양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치는 공간과 그렇지 못해서 차갑고 어두우며 텅 빈 공간의 비율은 만 배가 넘는다.


우리 은하와 이웃인 안드로메다 은하와의 거리는 대략 200백만 광년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사이 역시도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다.


그렇다면 이 우주는 따뜻하고 꽉 차 있는 밝음이 본질일까? 아니면 차갑고 텅 빈 어둠이 본질일까?


우리 인간은 각자 운이 좋다면 100년 정도를 산다. 그리고 100년이 나에게만큼은 이 우주가 존재하는 시간 전부가 된다.


하지만 조금만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 지구엔 이미 45억 년의 시간이 흘렀고, 아마도 내가 죽은 후에도 상상하기도 힘든 시간이 무한히 흘러갈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내가 있었던 100년의 시간과 내가 없을 때 존재할 무한의 시간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바닷가에 가면 멋진 파도가 끊임없이 친다. 넓게 펼쳐진 백사장이나 멋지고 커다란 바위와 충돌해 하얀 포말을 만들어 내고 있는 파도를 보고 있다 보면 시간이 가는 것도 잊을 지경이다.



파도는 바람으로 인해 바닷물의 일부가 잠시 동안 어떤 형체를 이뤄 솟아 있는 상태이다. 이후 곧 사라진 후 다시 바닷물로 되돌아가 간다. 그러니까 파도와 바다의 관계에서 보면, 비록 파도가 아주 멋져서 우리의 눈을 사로잡긴 하지만 실제로는 파도는 그저 바다가 잠시 변형되어 있는 상태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파도와 바다 중에서는 파도의 화려함이 아무리 우리의 눈을 사로잡더라도 결국 파도가 아닌 바다가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태양이나 알파 센터우리 같은 별들은 그 밝음과 화려함으로 인해 우리의 눈을 사로잡지만, 우주적 시간으로 보면 겨우 100억 년 정도 존재하다가 사라질 운명들이다. 별과 우주 사이의 관계는 단순히 그 단위만 커졌을 뿐 파도와 바다와의 관계와 같다.


우리들 각자의 삶 역시도 화려하기 그지없어 그것이 마치 본질처럼 보이지만, 객관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찰나적으로 존재하다가 영원히 잊힐 운명이다. 우리의 삶 역시도 결국 잠시 솟은 파도일 뿐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매일 밤과 낮이 교차되고 있다. 대충 밤이 12시간, 낮이 12시간이다. 그래서 낮과 밤 중에서 무엇이 더 본질일지를 물으면 답을 하기가 곤란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태양이 가진 객관적 의미를 안다. 우리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 태양은 이 우주적 관점에서는 파도에 불과하고,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우리 인간은 운 좋게도 그 태양이 존재하는 시간 동안 그 옆에 바짝 붙어서 그 빛을 받을 수 있는 이 지구에서 살고 있다. 그 특별함으로 인해 우리는 밤과 낮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본질이냐는 질문에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하지만 답은 뻔하다. 당연히 태양이 없는 밤이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우리의 삶에서 행복과 불행 중에서 과연 무엇이 본질일까?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과연 행복할까, 불행할까? 아마도 아주 잠깐은 행복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 상태가 얼마나 갈까? 한 시간? 하루? 한 달? 일 년? 10년?


사실 한 시간만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아도 대단한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0분도 채 되지 않아서 심심해질 것이고, 곧 졸리거나 지루해질 것이다. 졸리면 잠을 자면 되긴 한다. 하지만 하루를 잘 수 있을까? 하루를 자고 싶어도 배가 고파서 깰 것이다.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하고’ 한 달을 보내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죄수들이 독방을 그리 두려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당연하게 이르게 된 상태’, 이것은 별이 사라진 어두운 우주나, 바람이 불지 않아 파도가 생겨나지 않는 바다나, 내가 존재하지 않았거나 않을, 셀 수 없는 시간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심심하다가 지루해지고 결국 우울증에 걸리거나 미쳐버리게 되어서 도착할 곳이다.


결국 우리의 삶은 불행이 본질일 수밖에 없다.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 맛있게 먹는 행복을 경험할 수 없다. 춥지 않으면 따뜻한 방바닥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가 없다. 여름 삼복더위에 뜨거운 방바닥은 오히려 지옥이 된다.


일반적으로 부족함은 불행의 상징이다. 반대로 채움은 행복의 상징이다. 결국 우리는 부족해서 불행해지지 않으면 채워서 행복해질 수 없는 존재들이란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태양과 밝은 전깃불로 인해 어둠이 아닌 밝음이 더 본질이라고 믿듯, 부족함의 불행보다는 채움의 행복을 훨씬 더 자주 경험한 탓에 이제는 오히려 행복이 더 본질에 가깝다고 믿게 되고 말았다. 그래서 행복은 당연함으로, 불행은 억울함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행복하지 않은 삶’은 ‘불행한 삶’이란 말과 동급이 되고 말았다.


심지어 삶은 불행이 본질이라고 말하는 사람조차도 그것을 믿어서 그렇게 말하기보다는 ‘행복하지 못한 나’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냉소적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우린 과연 삶에 대해서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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