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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Aug 02. 2021

내 감정은 죄가 없다 #4

내 손 안의 밤송이

‘정의’, ‘옳음’ 같은 가치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의 기반이 된 철학일까? 얼마나 보편타당한 것인지에 대한 평가일까? 이미 정해 놓은 법의 테두리 안에 있는지 여부일까?


물론 그것들은 매우 중요한 것들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진짜로 중요한 것은 사실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해주느냐 여부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정의나 옳음은 사실상 아무것도 아니며 어떤 경우엔 범죄로 취급되기도 한다.


북한에 가서 공산당 일당 독재가 가진 문제점을 아무리 이론적으로 탁월하게 설명을 해도 결국 듣고 있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터무니없는 괴변이며 또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반사회적인 범죄행위에 불과하다. 결국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 고발을 당해 아오지 탄광 같은 곳으로 끌려가게 된다. 비록 본인은 평생 독재는 옳지 않다는 신념을 지킬 수는 있다고 해도 결론은 그저 춥고 굶주린 곳에서의 외로운 죽음뿐이다.


우리가 원하는 감정 정당성 역시 마찬가지로 타인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래서 처음엔 그 감정을 만들어 낸 상대에게 내 감정의 정당성을 설득시키려고 애쓴다. 하지만 의도와 달리 잘 안 되는 경우가 꽤나 많으며 더해서 상대가 직장 상사 같은 사람이면 처음부터 대꾸할 시도조차 못하는 경우도 흔히 일어난다.


가끔 운 좋게 성공을 했더라도 그 결과가 늘 좋은 것도 아니다. 비록 상대가 내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마치 내 눈앞에서는 내 말에 동의하는 듯 보였지만, 그 사람이 보여 준 마지막 표정이 잘 잊히지가 않는다.


상대는 네가 잘못한 것도 있지만 그것을 말하면 괜히 싸움만 커질까 봐 참는다. 하지만 나는 네가 말하는 정당성을 네가 말한 만큼은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자신 안에도 억울함과 분노가 있지만, 그것을 터트려봐야 그 끝이 어디로 가게 되는지를 잘 알기 때문에 꾹 참고 넘기는 표정이다.


오히려 대차게 싸우고 나면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그런 표정을 마지막으로 헤어지게 되면 계속 마음속에 남아 떠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상대도 마찬가지다. 할 말은 많았지만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에 계속 마음에 남아 억울함으로 자리를 잡고 만다.


그래서 어떤 상담사들은 참기보다 오히려 감정을 꺼내서 싸우는 편이 더 낫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을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면 처음부터 우리가 왜 그렇게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이 그리 힘들까? 그런 조언들은 그냥 허공에 떠돌다 사라질 무의미한 말일뿐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일까? 아니다. 아직 희망은 있다. 


비록 당사자를 설득하는 것은 실패했더라도 제삼자에게 일어난 일을 말함으로써 그들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다면 감정 정당성의 확보는 어느 정도 이뤄진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말하고, 더 많은 동의를 얻어낼 수 있을수록 점점 좋아진다. 처음부터 정당성은 ‘너의 인정’이 아니라 ‘타인의 인정’으로 얻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어딘가에서 만나 그간 있었던 속상했던 얘기, 화났던 얘기, 짜증 났던 얘기, 억울했던 얘기를 주고받는다.


우리는 그것을 ‘공감’ 받는다고 표현한다.




“공감”, 어떤 일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을 당해서 마음이 심란할 때, 그 힘듦을 누군가로부터 이해와 위로를 받는 일이다. 강하지만 연약하고, 혼자서도 잘 살아가지만 가끔은 그냥 누군가의 등에 기대고 싶은 우리를 위한 값진 선물이다.


아이 문제로 힘들어하는 친구, 시댁과의 갈등으로 인해 마음고생이 많은 친구, 회사에서 상사와의 갈등으로 인해 이직을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친구, 누군가의 배신으로 인해 크게 상처를 받은 친구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공감을 통해 우리는 조금씩 그 일로부터 벗어나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갈 힘을 얻는다. 이때 내 편에 서서 나를 공감해주는 누군가의 마음 씀은 정말로 소중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공감도 오직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꽤나 뚜렷한 단점이 있다. 그 단점은 어떤 상황에서는 매우 치명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공감의 첫 번째 문제는 화자가 바로 나란 점이다. 내가 겪은 기분 나쁜 일을 남에게 설명할 때, 그것이 온전히 내 입장에서만 그것도 나에게 어느 정도 유리하게 왜곡된 채 이뤄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듣는 사람은 당연히 내 편을 들게 되어 있다. 그래서 모든 얘기는 두 사람 모두에게 들어봐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편파성이다. 우리가 제삼자에게 공감을 받고자 할 때 흔히 그 대상이 되는 존재는 바로 나와 친한 친구들이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내 친구이지 내 직장 상사의 친구가 아니다. 그러니 그 친구는 무조건 내 편을 들게 되어 있다.


사실 그대로도 아니고 최대한 내 잘못이 없게 들리도록 설명을 했는데 듣고 나서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친구를 과연 내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과거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친구는 이미 연락처가 지워졌거나 혹시나 연락 올지도 몰라 전화를 받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연락처를 남겨 뒀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남은 사람들은 내 말을 듣고 나에게 ‘딴지’를 걸지 않는 사람들뿐이다.


사실 남자들이 여자들과의 대화에서 가장 많이 실수를 많이 하는 대목이다. 내 편을 들어달라고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재판관이 되어서 잘잘못을 따지고 있다. 이것은 치명적일 정도로 어리석은 실수이다. 누군가 자신의 억울함을 말했을 때 설령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냥 조용히 있으면 된다. 왜 거기에서 판사가 빙의되어 망치를 두드리며 ‘당신이 유죄’라고 선언하고 있을까?


세 번째 문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을수록 내 문제는 숨겨지고 상대 잘못만 부풀려진 채 점점 그 자체가 진실로 자리를 잡는다는 점이다.


공감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야 정당성 확보라는 목적이 달성되기 쉽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속상한 일을 단 한 명에게 말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야말로 누군가를 만나기만 하면 말하고, 처음부터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약속을 잡고, 같은 만나서도 같은 말을 반복하기도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식으로 반복하다 보면 자기 자신도 정말로 그렇다고 믿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내가 잘못한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상대가 잘못한 것들은 최대한 부풀려진 채 나만 억울한 진실로 자리를 잡고 만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되면 과연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아니다. 오히려 억울함이 확대되어 심각한 수준의 피해의식으로 번져나갈 수도 있다. 그런 식으로 시간이 흘러가면 과거에 자신에게 억울함을 느끼게 해 준 상대가 아주 작은 실수만 해도 미친 듯이 화를 내는 사람이 되고 만다.


뭐, 사람은 원래 불완전한 존재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정말로 진지하게 묻고 싶다. 자신이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한가?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계속 만나고 싶을까?


내가 얼마나 정당한지 여부를 떠나서 가슴속에 수많은 속상한 일들, 수많은 화난 일들, 수많은 억울한 일들을 품고 사는 삶이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왜 못 놓느냐고 물어보면 도저히 억울해서 놓지 못하겠다고 대답한다. 


밤송이를 손에 쥐고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면서 피를 흘리고 있어서 그냥 손을 펴라고 하니까 억울해서 놓지 못하겠다고 하고 있다.


처음부터 왜 정당성을 얻으려고 했을까? 결국 행복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그 결과는 거꾸로 가고 있을까? 왜 점점 더 불행해지고 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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