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찬우 Aug 03. 2021

내 감정은 죄가 없다 #5

네가 감히!


친구가 약속에 늦게 나올 때 우리는 어떤 감정들을 느끼게 될까?


심심하거나 지루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늦는 만큼 혼자서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여럿이 약속을 잡은 경우, 그중 한 명이 늦는 일은 그리 큰일이 아니게 넘어가기도 한다. 하지만 일정이 빡빡하다면 이후 계획했던 일이 틀어질까 봐 두려워서 조바심을 느끼게 된다. 


사람에 따라서는 예약을 지키지 못해 예약한 곳에 피해를 줄까 봐 신경 쓰이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취소를 했을 때 위약금을 지불해야 해서 짜증이 날 수도 있다.


그래서 만약 처음부터 ‘만나서 맛있는 저녁을 먹기’와 같은 약속이고, 식당 예약도 하지 않은 상태라면, 친구나 연인이 약속 시간에 늦었다고 해도 딱히 조바심이나 신경 쓰임 혹은 화가 날 상황까지는 아니게 된다. 그저 기다리는 동안 심심하거나 지루함 정도만 느끼고 만다. 


요즘은 그런 시간들도 스마트폰이 있기 때문에 쉽게 해결되는 편이다. 그럼에도 어떨 때는 꽤나 화가 심하게 날 때가 있다. 어떨 때 그럴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상대방이 나와의 약속을, 아니 나 자체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느낌이 들 때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상대가 나를 무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이다.


우리는 비싸고 귀한 물건은 조심스럽고 신경을 써서 다룬다. 하지만 반대로 싸고 언제든 버려도 되는 물건은 무신경하게 대충 다룬다. 이런 태도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3년간 짝사랑해왔던 사람과 첫 데이트를 하는데 약속에 늦는 사람은 없다. 그 사람은 약속시간 하루 전부터 심장이 벌렁거리는 탓에 잠을 설쳐서 오히려 그것 때문에 늦기도 한다. 하지만 그 사람과 사귀게 되어 3년이 지나면 상황에 따라서 약속에 늦을 수도 있다.


3년 전과 ‘우선순위’가 바뀐 것이다. 3년 전에는 최고의 우선순위였던 상대는 이제 회사에 밀렸다. 3년 전에는 갑자기 야근할 일이 생기면 회사를 그만두는 한이 있어도 그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지만, 이제는 회사에서 바쁜 일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약속에 늦는다.


상대방에게 그런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는 어떤 기분을 느끼게 될까? 당연히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불안함은 화로 증폭된다. 


딱히 이후 일정도 없고, 그리 많이 늦은 것도 아니고, 혼자 있는 동안 스마트폰으로 할 것도 많은데 몹시 화가 많이 나게 된다. 거기엔 ‘너는 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라는 의심이 숨겨져 있다.



별로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나를 전혀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직장 상사에게 심하게 깨진 날이나,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렸는데 버스 운전기사가 그냥 정류장을 통과하는 날이나, 누군가 내 차 앞으로 거칠게 끼어든 날에는 이미 많이 화가 나 있어서 평소보다 훨씬 심하게 반응하게 된다.


누군가로부터 ‘무시를 받는 것’은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것들 중 하나이다.


자신이 약속 시간에 늦어서 이후 일정이 틀어지게 되면 -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 그것을 매우 미안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보통은 상대가 많이 화를 내도 그냥 가만히 있는다. 하지만 그리 급박하지 않은데 상대가 너무 심하게 화를 내면 점점 억울해진다. 늦은 것이 분명히 잘못이지만 이렇게 까지 말해야 하나?


하지만 두 사람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화를 낸 사람은 상대가 약속 시간에 늦어서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무시한 것 같아서’ 화가 난 것이란 점이다.


하지만 이미 화에 사로잡힌 당사자는 그것을 인식할 수 없고, 늦어서 욕을 먹고 있는 상대도 그것을 전혀 짐작할 수 없다. 처음부터 ‘너는 항상 그런 식이야.’라는 인신공격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약속에 늦은 문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무시를 당했다고 믿는 사람과 그로 인해 역으로 무시를 당한 사람의 분노만이 남는다.


우리는 도대체 왜 상대방을 무시하는 것일까?


원래 상대가 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지 않으면 슬퍼야 하는 것이 맞다.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여자 친구가, 남자 친구가 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나, 친구가 내가 친구를 생각하는 만큼 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느낌이 들 때 당연히 슬퍼야 한다.


그래서 ‘나는 네가 날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 같아서 몹시 슬퍼’라고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도 공감할 수 있다. 자신이 의도치는 않았지만 결국 상처를 입혔기 때문에 진심으로 사과를 할 마음이 생긴다. 그런데 상대는 슬퍼하는 대신 나를 무시하는 말을 하면서 화를 낸다. 그러니 미안한 마음은 금세 사라지고 만다.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할까?


그런 상황에서 슬픔을 표현하는 것은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짓이고,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는 짓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에게 아쉬움을 느낀다는 것이고, 그것은 둘 사이의 관계가 이미 기울어진 추와 같다는 의미이다. 어려서부터 이미 수 차례 실제로 그런 경험들을 해왔기 때문에 거기에 매우 민감하다.


그래서 누군가 나를 무시한다는 느낌이 들면서 그때 입은 자존심의 상처만큼 심하게 화가 난다. 우리는 보통 그때 어떻게 할까? 당연히 보복을 한다. 내가 상처 입은 만큼 상대방의 자존심도 깎아내려야 한다. 그래서 약속을 늦은 것 자체가 아닌, 사람 그 자체를 무시하는 말을 한다.


“너는 도대체 제대로 하는 것이 뭐냐?”, “너는 약속 하나도 못 지키냐?”, “약속도 못 지키는 인간이 뭘 할 수 있겠어?”라고 말한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사실은 네 마음이 변한 것 같아서 슬프다고 말을 하고 싶지만, 입에서는 그렇게 툭 튀어나가고 만다. 그러면 상대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까?


일단 말은 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 역시 이미 상처를 입었다. 그런 경험들이 일어날 때마다 서로 계속 상처가 쌓여간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터지고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지게 된다.


그런데 정말로 궁금하다. 누군가 약속 시간에 늦는 것이 정말로 나를 무시해서 그런 것일까?


나를 무시하는 직장 상사는 그 역시도 누군가로부터 무시를 당해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나를 보지 못하고 지나간 버스기사는 그냥 실수를 한 것이다. 내 차 앞에 거칠게 끼어든 사람은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이다. 그 사람은 나를 전혀 모른다. 짙은 선팅에 그 빠른 속도에서 나를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사람은 '나'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무시한다. 그도 평생 동안 누군가로부터 무시를 당해왔기 때문이다. 


오직 무시를 당한 사람만이 남을 무시한다.


친구가 약속에 늦은 것은 나를 무시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내가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친구를 무시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그런 짓을 해서 나를 더욱더 불행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일까?

작가의 이전글 내 감정은 죄가 없다 #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