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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Aug 04. 2021

내 감정은 죄가 없다 #6

잃어버린 아이

몇 해 전 다섯 살 난 아이를 키우는 지인 부부와 만난 적이 있다.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즐거운 오후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헤어질 시간이 되어 주차장 방향으로 같이 걸어 나왔다. 차를 몰고 온 그 부부와 달리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왔기에 중간에 길이 갈렸다.


대충 어느 지점쯤에서 잘 들어가라는 인사를 하고는 지하철 타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런데 몇 걸음 걸어간 순간 뒤에서 갑자기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소리로 인해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아이가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대충 알겠지만, 어른이 된 나로서는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그냥 그 순간엔 살짝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그래도 아이가 울었던 이유는 알 수 있었다. 헤어짐을 미리 알고 있었던 어른들과 달리 아이는 우리와의 이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아이에게는 우리가 갑자기 찢어져버린 것이다.


우리는 좀 당황을 했고, 아이 엄마는 우는 아이를 안아주며 또 곧 보게 될 것이라고 달랬다. 잠시 아이가 울음을 그치는 것을 기다린 후, 곧 또 만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는 웃으며 다시 헤어졌다.



생각해보면 나도 그런 때가 있었던 것 같다. 너무 오래되어서 희미하지만, 나도 일이 있어 밖에 나가는 엄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같이 있어달라고 했었던 적이 있었다. 아마도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그런 기억들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도 가끔 그 장면이 떠오르곤 한다. 아이의 순수한 모습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 아이는 언제까지 저런 상황에서 울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그 아이도 언젠가는 어른이 돼야 한다.




우린 이미 어른이 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린 이제 아이와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아니다. 그저 그 크기의 차이만 있을 뿐, 모임에서 친한 누군가 먼저 나간다고 하면 여전히 아쉬움을 느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이처럼 울지는 않는다. 사실 먼저 일어나는 사람을 붙잡는 것은 오히려 예의가 없는 것이다. 그 사람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데, 자꾸 그러면 가야 할 사람의 마음만 불편하게 만들고 만다.


거기까지는 괜찮다. 문제는 어른이 된 우리에게는 새로운 감정이 느낀다는 점이다. 내가 아쉬움을 느낀 크기만큼이나 아쉬움 따위는 느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내 자존심이 만들어 낸 감정이다. 


그 사람이 나와의 이별을 그리 아쉬워하지 않는데, 나만 그 사람의 떠남을 아쉬워하는 것은 내가 그 사람보다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내가 종속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며, 자칫하다가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에 휘둘릴 수 있는 위험한 일이다.


결국 어른이 된다는 것은 바짓가랑이를 붙잡던 아이에서, 모임 속 누군가 먼저 나간다고 했을 때 상대에 대한 배려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최대한 ‘쿨하게’ 보내주는 존재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다들 제대로 어른이 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아이처럼 울지 않는다. 아니, 하고 싶어도 못한다. 올 때는 늦지 않게 오면 되고, 갈 때는 그냥 가면 된다. 감정의 움직임이 없을수록 성숙한 어른이 되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정말로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아니다. 처음부터 앞뒤가 맞지 않는다. 사실 누군가 오고 감에 있어서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도대체 왜 그 사람을 만나겠는가? 그것은 길가의 돌멩이와 만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아무런 감정도 못 느끼는 돌멩이를 만나려고 쉬는 날 힘들게 씻고, 버스를 타고, 커피를 마시며 돈 쓰고, 시간 쓰고, 에너지 낭비를 하고 있을 리가 없다.


우리는 감정이 움직일 때 행복하며,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감정을 움직여서 행복하고 싶기에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즐겁고 재미있는 감정들은 그대로 표현한다. 하지만 사람들을 만나면서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슬픔이나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 감정들은 최대한 숨기려고 애쓴다.


상대가 약속에 늦었거나, 친한 친구가 모임 중간에 먼저 빠져나갈 때 우리는 여전히 불안감, 실망, 아쉬움, 슬픔 등의 감정들을 느끼지만 이제 그런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아이가 아니다. 우리는  더 이상 ‘네가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아서 두렵다고 하거나’, ‘너와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슬프다고’ 말하며 울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안에서 생겨나는 감정들은 사실 아이의 그것과 별로 차이가 없다. 똑같이 두렵고 똑같이 슬프다. 그렇지만 그런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그야말로 ‘아이 같은 행동’이다. 이미 어른이 된 우리는 그런 감정들을 최대한 숨겨야 한다. 그것은 내 약점을 드러내는 짓이다.


하지만 숨겨진 감정이 그냥 사라질 리가 없다. 그러니 그 감정을 다른 방식으로 처리해야 한다. 그래서 어른스럽게 말한다. “약속 하나도 제대로 못 지키니?”, “모임에 나오려면 그다음 일정 정도는 비우고 와야 하는 것 아냐?”, “너는 그 정도 정신도 없니?”라고 한다.


마음에서 올라오는 아이의 목소리는 묻히고 머리에서 내려오는 어른의 목소리가 나간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들 대부분은 평소엔 딱히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따라 나쁜 일들이 겹쳐 기분이 별로인 날이면 자신도 모르게 가시가 돋는 말이 튀어나오게 된다. 상대방을 비난해서 상처를 주려고 한다. 내가 상처를 입은 만큼 상대를 상처 입혀야 해서 그렇다. 사실 그 이상을 되돌려줘야 속이 시원한다. 내 안에 어떤 감정들이 흐르고 있는지 모르는 채.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어른인 척하고 살아왔기에 이제는 그런 아이의 감정이 일어나는 것조차 까맣게 잊었다. 설령 그것이 치밀어 오르더라도 어른이기 때문에 무시하고 없는 척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누군가 약속에 늦거나 먼저 가야 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아쉽고 슬픈 것이 아니라 나를 무시하는 것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두려움이나 슬픔과 같은 것들은 아이들인 느끼는 것이며, 나는 그것이 증폭되어 나타나는 분노, 짜증, 억울함만을 느낀다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 떠나는 것이 슬프면 그냥 울면 될 것을, 화를 내고, 짜증을 내며, 그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온갖 것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제는 그 모습이 진짜 나라고 믿고 살아가고 있다.


네가 나를 덜 소중히 여기는 것 같아 두렵고 슬픈 마음은, 네가 나를 무시해서 화가 나고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으로 변했다. 네가 먼저 가서 아쉽고 슬픈 마음은 너는 가든 말든 상관없어야 하는 쿨한 마음과 타인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는 무관심으로 변했다.


내 안에 있는 그 아이는 이제 사라져서 예전에 한 때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아주 가끔 몰리다 못해 터지는 날이 오면 그리 서럽게 울면서 그 아이가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렇게 약한 모습이 되어서 울어 본 날이 언제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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