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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Aug 05. 2021

내 감정은 죄가 없다 #7

나는찌질하지않다!


우리가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날 때 가장 많이 변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단 외모이다. 당연하다. 외모만큼이나 극단적으로 변하는 것은 없다. 특히 2차 성징이 잘 발달된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른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해서 지식과 경험이 쌓여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졌고 세상을 대하는 법도 제법 능숙해졌다. 


이것들 이외에 더 변한 것은 없을까?


있다. 단지 변화 자체는 신체보다 더 크지만 그 변화를 스스로 감지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그 변화는 바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대하는 태도이기에 그렇다. 이미 변한 후에는 생겨나는 감정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에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과거의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게 된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매 순간 생겨나는 감정을 딱히 숨기기 않는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해도 자신이 느끼는 대로 표현하고 말한다.


힘들다, 짜증 난다, 심심하다, 먹고 싶지 않다. 놀고 싶다, 엄마 밉다, 아빠가 좋다, 할머니 보고 싶다, 저 아저씨 싫어, 등등 우리는 옆에 있는 엄마가 순간 당황할 수도 있는, 딱히 말할 필요가 없는 것까지 모두 표현했다. 그래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래도 어리다는 이유로 넘어갔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 더 커서 삶의 경험이 쌓이게 되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지금 현재 자신이 느끼는 감정들을 그대로 표출하게 될 때 그것이 결국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의 감정은 수시로 변하는데, 만약 나쁜 감정이 들 때마다 그것을 거르지 않고 표현했다가는 친구들 다 떨어져 나갈 수 있음을 알게 된다. 특히 부정적 감정을 숨기는 일은 너무 중요한데, 그런 감정들은 숨길수록 인간관계를 맺을 때 유리하다는 것을, 아니 적어도 불필요한 손해는 안 보게 된다는 것을 이해한다. 과거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했다가 나에게서 완전히 떨어져 나간 누군가로부터 제대로 배우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낄 때마다 또 다른 감정 하나를 더 느끼게 된다. 내 감정을 남들 앞에서 그대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이다. 혹시나 어쩔 수 없이 드러냈다면 그것을 상대방에게 납득시키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뼈 속 깊이 새기고 있다.


본격적으로 어른이 되면 이제 친구와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감정을 숨겨야 한다.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 상태, 일명 포커페이스가 될수록 사회생활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아이 때 느끼는 감정들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비슷한 감정들을 느낀다. 단지 그런 감정을 느낄 만한 상황이 훨씬 줄었고, 혹시라도 느끼게 되었다고 해도 그것을 표현하는 것에 큰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강제로 틀어막고, 만약 터져 나오더라도 적당히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것에 매우 능숙해져 있을 뿐이다.


실수로라도 감정을 참지 못하고 터트리고 나면 나중에 그것이 그렇게 후회가 된다. 감정을 느낀 일도, 느낀 감정을 참지 못하고 터트린 일도 모두 후회스럽다. 그것은 내가 아직도 제대로 성숙하지 못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남들이 나를 미숙한 존재로 보게 되는 일이고,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남들에게 약한 존재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럴수록 더욱더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터져 나온 감정을 그럴듯하게 설명하려고 애쓴다. 그렇게 반복적으로 살다가 보면 어느새 아이들이나 느낄법한 감정은 자연스럽게 숨겨지고, 어쩔 수 없이 표출되었다면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것이 익숙해져서 전혀 괴리감도 없다.


어떤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아서 먹기 싫으면 “먹기 싫어요”라고 말을 하면 되는데, 그 음식이 건강에 나쁜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한다. 공부를 하기 싫으면 그냥 “못해서 하기 싫어요.”라고 말하면 되는데, 우리나라의 성적 지상주의, 학벌주의, 불공정함에 대해서 열불을 토한다. 모임에서 친한 친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면 그냥 “네가 먼저 가서 아쉽다”라고 말하면 되는데 일 년에 한 번 하는 모임인데 오늘 하루 일정 조정도 제대로 못하냐고 화를 낸다.



너무도 오랫동안 그런 식으로 살아와서 이제는 자신이 어떤 감정들을 느끼는지조차 잊고 말았다. 그로 인해서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린아이 시절과 똑같이 느끼는 감정들은 이제 즉시 차단되고, 그로 인해 생겨난 변형된 감정들이 대신 표현된 후 그럴듯한 명분으로 재해석되고 만다. 


매 순간 두려움, 슬픔, 안타까움과 같은 아이의 순수한 감정들이 분노와 짜증 그리고 억울함과 복수심과 같은 성숙된 어른의 감정으로 변형되고 있다. 여기에서 더 큰 문제는 이제는 우리가 변형된 감정들이 진짜 내가 느끼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어른이 아이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약하고 찌질한 것으로 정의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본질은 여전히  약하고 찌질하다.


아무리 존경받고 나이 지긋한 대학교수라고 해도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은 다 밥을 챙겨주고 혼자만 밥을 주지 않으면 속으로 삐친다. 하지만 그 교수는 자신의 감정을 느끼는 그대로 표현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대신 그는 이 땅에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땅에 떨어졌다고 ‘격노’한다.


삐침은 열 받은 것으로 표현되고, 열 받은 것은 분노에 사로 잡힌 것으로 표현되며, 분노에 사로잡힌 것은 격노했다고 표현한다. 그런 식으로 표현될수록 삐침이 뭔가 더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보면 뭐가 다를까? 밥 안 줘서 기분이 상한 것은 동일하다. 그저 표현의 차이일 뿐이다.


결국 우리가 얼마나 어른스러워졌나는 것은, 자신의 변형된 감정을 얼마나 대의와 명분에 맞게 표현하느냐 여부에 달렸다. 밥을 안 챙겨줘서 혹시나 밥을 못 먹을까 봐 두려워서 삐친 대학교수가 ‘스승에 대한 존경심’ 운운했을 때 그는 완벽한 어르신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 교수와 유치원에서 실수로 밥을 챙겨주지 못한 아이가 배가 고파서 서럽게 우는 것이 근본적으로 무엇이 다를까? 물론 교수는 전혀 다르다고 여길 것이다.


이미 대의명분에 사로잡힌 우리도 그 교수와 다를 바 없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은 그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고, 그럴만한 근거가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래서 약속에 늦은 친구에게 짜증이 났을 때 그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약속이 지켜져야 하는 필요성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근거를 가져다가 공격한다.


하지만 숨겨진 진짜 진실은, 상황에 따라서 약속은 지켜야 할 때도 있고 지키지 않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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