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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Aug 06. 2021

내 감정은 죄가 없다 #8

나는 어른이다


아이였을 때, 우리는 누구나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무엇보다도 선택의 자유를 얻고 싶다. 어린 시절 우리는 부모님이나 주변 어른들로부터 계속하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다. 어른들은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하고, 갖고 싶은 것을 못 갖게 한다. 도대체 이해가 안 간다. 그래서 빨리 어른이 되어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고 싶다. 정작 어른이 되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몰라서 그렇다.


또 하나의 이유는 어른이 되어야만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어서 그렇다. 성인이 되면 19금 영화를 보는 것부터, 데이트를 하고, 담배도 피우고, 술도 먹을 수 있다. 쓴 커피도 마시고, 혼자서 여행도 떠날 수 있다. 오직 나이로 인해 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다.


마지막 이유는, 보통은 잘 생각하지 못하지만, 빨리 강해지고 싶어서 그렇다. 이미 어른이 된 우리는 그것을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이 시절에 어른은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자신보다 훨씬 강한 육체와 모든 것을 능숙하게 해내는 어른들의 능력이 자신을 향해 우호적 시선을 보여줄 때는 선망과 존경심의 대상이지만, 반대로 자신을 향해 적대적 태도를 취했을 때는 엄청난 두려움의 대상이 됨을 경험했다. 단지 부모들이 그것을 최대한 막아줬을 뿐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최대한 빨리 자신이 선망하는 모습이 되거나 혹은 두려움을 느끼는 대상을 없앨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원한다고 해서 바로 어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어른 흉내’이다.


학창 시절 어린 나이부터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는 아이들이 있다. 그야말로 어른의 흉내를 내는 것인데, 이런 아이들은 어쩐지 강해 보인다. 그래서 일명 ‘일진’이라고 불리는 아이들이 하는 짓이 바로 그런 행동들이다. 어른 흉내를 내면서 자신이 가장 강한 존재임을 과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이들 사이에서는 그것이 통한다.


어린 시절부터 술과 담배를 접해 몸을 미리 망친 일진 아이들은 좀 억울할 수도 있지만, 어른 흉내를 얼마나 잘 내고 있느냐에 상관없이 사회는 오직 시간을 기준으로 ‘성인’을 정한다. 그때 우리들 개개인이 얼마나 어른이 될 준비가 되어 있느냐 여부는 별 상관이 없다. 그냥 강제적으로 어른이 되어 버리고 만다.


아이들은 어른이 된다는 것이 가진 의미를 거의 모른 채 어느 날 일괄적으로 어른이 된다. 그래도 별 상관은 없다. 상갓집에 가서 몇 번 절을 해야 하는지조차 잘 모르더라도 데이트를 하고, 술을 마시고, 19금 영화를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것들만 능숙하게 잘 해낸다고 해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어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못하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일단 할 수 있는 것은 지금껏 해왔듯이 계속 어른 흉내를 내는 방법을 쓴다. 이때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내가 가장 어른스럽게 보일까?’, 이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된다. 목적 자체가 처음부터 흉내를 내는 것이니 내가 얼마나 어른이 되었냐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나를 얼마나 어른답다고 생각하지는 여부가 훨씬 더 중요하다.


어른이 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오, 어른 같다”,라고 말하는 것들을 하고 싶어 한다. 내 욕망이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로부터 만들어진다.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던 세상에서 벗어나 주변 사람들을 보고 있는 방향을 바라보는 세상으로 이동한다.


이제 인형이나 로봇은 한쪽 구석에 처박히게 되고, 그 빈자리엔 어른들이 하는 것으로 채워진다.


하지만 아무리 어른 흉내를 내도 우리 안엔 여전히 아이가 있다. 그래서 어른 흉내를 낼 때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여전히 똑같이 생겨나는 감정을 처리하는 방법이다. 


인형을 버리고, 쓴 커피는 마시지만, 감정만큼은 조절이 안 된다. 아무리 느끼고 싶지 않다고 해도 여전히 느껴진다. 안 느낄 수는 없으니 우리는 그것을 더 이상 새 나가지 않도록 한다. 혹시라도 새면 그것은 내가 여전히 미숙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꼴이 되며, 그런 날이라도 오면 그런 감정을 느낀 것 자체보다 오히려 그것을 표현한 것 자체가 훨씬 더 신경 쓰인다. 내가 한심하다고 느껴진다.



그래서 두려움이나 슬픔과 같은 감정들이 느껴지면 곧바로 분노와 억울함과 같은 감정으로 변형시켜 버린다. 무엇인가를 무서워하는 것은 아이들의 모습이며, 슬픔은 약한 존재들이나 느끼는 것이다. 이미 어른이 되어 강해진 나는 그런 아이와 같은 감정들을 느껴서는 안 된다.


두려움의 대상보다 두려움을 느끼는 것 자체가 훨씬 더 큰 두려움이 된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가 어린 시절에 크게 착각한 것이 하나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가진 진짜 의미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 시절 무엇인가가 싫으면 그냥 “그거 싫어!”라고 한다. 싫으니까 싫다고 한 것은 맞지만, 그로 인해 누군가 상처를 입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른이 되었다면 좀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제대로 어른이 되지 못하고 어른 흉내를 내기만 하는 우리들은 오직 내가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만 한다.


어른이라면, 많은 지식을 빈틈없는 논리로써 싫다는 이유를 설명해서 상대를 찍소리 못하게 만들어야 하고, 어른이라면 싫은 것을 시키는 상대를 공격해서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해야 한다. 내가 그것은 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어른이니까 그렇게 해야 한다는 문제이다.


그래서 무엇인가가 싫다면, “그것은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떤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니 안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내가 어른의 지식과 논리가 있음을 강조하거나, 혹은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해? 너 무슨 문제 있냐?”라고 식으로 상대를 공격해서 내가 누구와도 싸울 수 있는 강한 존재임을 강조하려고 한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진짜 어른인 것일까? 아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우리는 지금껏 완전히 착각하고 살았다. 진짜로 어른이 된다는 것은, 같은 감정이라고 해도 그것을 상대를 헤아리고 배려할 수 있는 태도로 대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믿어왔던 것과는 달리 어른이 된다는 것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 한계를 알고 인정할 수 있는 성숙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가 싫다면, “괜찮은데, 저랑은 잘 맞지 않는 것 같네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 표현해도 결국 그 시작은 싫은 것이다. 그것을 논리와 팩트로 그럴듯하게 설명하려고 하거나, 상대방을 공격함으로써 자신이 느낀 불쾌한 감정을 복수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정말로 내가 싫다는 것을 상대에게 알리고 싶다면, 그저 감정을 전하면 된다. 논리와 팩트 그리고 공격은 결코 상대방의 공감을 얻어낼 수가 없다. 오직 감정이 그대로 전달될 때 공감이 일어난다. 그러니 그저 그 감정만 부드럽게만 전달하면 된다. 그것이 바로 아이는 갖지 못하는 어른만의 배려심이다.


자꾸 뭔가 설명을 하려고 하거나,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은 거꾸로 우리 안에 여전히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연약하고 미숙한, 그래서 안타깝고 겁 많은 아이가 있음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당신뿐만이 아니라, 나도, 그들도,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다.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는 이미 너무 오랫동안 어른 흉내를 내와서 이젠 충분히 어른이 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어른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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