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찬우 Aug 26. 2021

너는 내 운명의 껌딱지 #7

네가 저지른 잘못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 보자. 여자들은 왜 대화를 하길 원할까?


여자들이 대화를 원하는 이유는, 대화 자체가 재미가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신을 제대로 이해받고 싶어서 그렇다. 자신이 느낀 수많은 감정들에 대해서 상대방의 동의를 얻고 싶은 것이다. 바로 공감이다. 그런데 여자들은 왜 그렇게 공감을 받고 싶은 것일까? 거기엔 깊고 어두운 사연이 숨겨져 있다.


슬픈 일이지만 여자는 태어남 자체가 불평등함이다. 왜냐하면 태어나 보니 ‘육체적 강함’ 수준에서 자신을 앞선 ‘남자’들이 이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강한 몸을 타고나거나, 특별한 수준의 노력을 하지 않는 한, 여자는 남자에 비해서 육체적 약자이다.


지금 시대는 법과 질서가 어느 정도 유지되기 때문에 그나마 여자들이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덜 느끼지만, 과거 그렇지 못한 시절에 여자들에게 있어서 남자들이 득실거리는 이 세상은 두려움 그 자체일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 여자들이 남자에게 종속적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다.


‘육체적’ 두려움은 매우 본능적이다. 그러니 똑똑하거나 많이 안다고 해서 무시할 수가 없다. 분명히 존재하는 두려움이며, 그로 인해서 늦은 밤 골목길을 걸어갈 때, 인적이 뜸한 지하 주차장을 걸어갈 때, 외진 산길에서 낯선 남자를 만났을 때, 그야말로 움찔하면서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물론 남자도 육체적 두려움을 느낀다. 여자들과는 달리 최소한 중간쯤에서 시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위에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자보다는 훨씬 더 나은 형편이다. 남자들은 적어도 여자들이 느끼는 극한의 두려움, 즉 ‘성폭력’에 대한 두려움은 느끼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느끼는 성폭력이 두려운 이유는 그 일이 내가 어떤 실수를 했거나, 성격 더러운 인간과 어떤 식으로든 엮여서 일어나는 육체적 폭력과 달리 내가 어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음에도 오직 남자의 성적 충동에 의해서 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평소엔 멀쩡한 남자들도 성적 충동 앞에서는 짐승이 되고 만다.


결국 ‘여자라서 당했다’, 라는 표현이 나오게 된다. 그렇게 여자들의 분노가 시작된다. 성폭력의 원인이 단순히 여자였기 때문이다.


‘원인 없는 폭력’, 이것이 바로 일반 폭력과는 다른, 성폭력만이 만들어 내는 가장 커다란 두려움이다. 남자라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공감할 수 있다. 길을 걸어가는데 누군가 ‘너라는’ 이유로 나를 마구 때릴 수 있는 세상에 살아야 한다면 어떨까?


더군다나 성폭력이 일어나게 되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바로 ‘임신’의 공포이다. 육체적으로 큰 상처를 입는 것도 힘든데 임신의 걱정까지 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당한 폭력에 대해서 외부적으로 밝히는 것조차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여자들의 사회의 절반이 남자인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공포심은, 남자들이 교도소에 가서 자신의 엉덩이를 노리는 세상 속에서 사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면 남자들 역시도 여자가 느낄 공포심을 깊게 공감해줄 수 있다.


그런데 좀 이해가 안 간다. 매일 평소에 그렇다면 도대체 여자들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더군다나 평소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훨씬 덜 걱정이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일단, 그런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흔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그래서 그나마 평소에 조심하면 살아갈 만한다. 그리고 숨겨진 진짜 이유는, 여자들은 태어남과 동시에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남자’로부터 끝없이 보호를 받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결혼 적령기가 될 때까지 여자들은 ‘아빠’라는 존재로부터 보호를 받게 된다. 그리고 결혼을 하게 되면 ‘남편’에게 보호를 받는다. 남편이 늙어 힘이 없어질 때쯤이 되면 그때는 일반적으로 ‘아들’에게 보호를 받는다. 그래서 이상한 일이지만, 여자들이 대를 이어야 한다는 책임감에 사로잡힌 남자들보다 더 아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아주 이상한 상황이 아니라면 보통의 아빠들은 딸을 보호하는 데 있어서 정말로 최선을 다한다. 혹시나 잘 안되더라도 엄마라는 대안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여자들은 잘 보호를 받으며 별다른 걱정 없이 자란다.


대부분의 문제는 부모의 보호로부터 벗어나 남편에게 그 역할을 맡겼을 때부터 일어난다. 부모는 의무로써 책임감으로써 자신의 딸을 보호하지만, 남편은 같은 나이 대이며, 딱히 자신이 아내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백한 책임감을 가질 위치에 있지 못하다. 또한 언제든 자식을 위해 희생을 할 가 각오가 되어 있는 부모와는 달리, 그 자신도 본인의 행복을 추구하고 싶어 하는 존재이다.


남편이 아내에 대한 책임감을 명시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게 아내 역시도 자신이 남편에게 ‘보호’의 책임을 원한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자각하지 못한다.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아내는 매일 끝없는 '대화'를 통해 그것에 대해 불명확하게 말하고, 그 말은 오직 감정으로 들어야 공감이 가는데 이성과 논리로써만 듣는 남자는 전혀 그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다.


여자가 밤길을 걸을 때 무서웠다는 말을 해도 남자는 여자가 왜 그 말을 하는지 제대로 공감할 수 없다. 그나마 교도소를 다녀와서 자신의 엉덩이를 노리는 세상 속에 있어 본 남자들만이 제대로 공감할 수 있다.


여자에게 있어서 남자가 자신에게 집중해주길 바라는 것은 단순히 ‘사랑’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자에게 있어서 ‘생존’이다.



남자에게 제대로 보호를 받는 여자들은 그 사실을 잊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여자들은 매일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많은 여자들이 매일같이 남자에게 ‘나를 사랑하는지를’ 묻는다. 오늘도 너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남자들 머릿속에서는 ‘사람 마음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도 아닌데, 그제도 물었고 어제도 물어놓고 오늘 또 물어본다. 왜 저렇게 비논리적인 질문을 할까?’라고 생각이 든다.


여자가 남자에게 사랑을 확인하는 이유는 지금 당장 남자에게 어떤 일을 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언제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정말로 두려운 일’ 일어났을 때 그 모든 일을 제치고 달려와 달라는 것이다. 평생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그럴 수 있는 너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살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남자들은 엉뚱한 짓을 한다. 경쟁에서 이기고 싶어서 엉뚱한 것에 한눈을 팔고, 취미 생활에 빠져서 여자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 듯 굴고, 사회적 인정을 받고 싶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매일 늦게 집에 오고, 이제는 결혼한 나를 보호해야 하는데 여전히 자신의 엄마를 보호하고 있다.


언제는 돈을 벌어오라고 해 놓고 정작 돈을 벌기 위해서 매일 야근하면 왜 잔소리를 하냐고 화를 낸다. 나도 취미 생활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항변을 한다. 부모님은 나를 키워주신 분인데 어떻게 모른 척하냐고 짜증을 낸다.


그래, 돈도 열심히 벌어야 하고, 너의 행복을 위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해도 좋다. 부모님은 너를 태어나게 해 주신 분이니 자식의 본분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어떤 순간에도 너의 눈은 언제나 나를 향하고 있어야 한다. 너의 삶에서 나는 그 어떤 순간에도 ‘최우선’ 순위여야 하며, 내가 위기에 처했다면 너는 어떤 상황에서든 뛰어 올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너는 가끔 어떤 것에 빠져서 나를 까맣게 잊은 듯 보이고, 나보다 다른 누군가를 더 우선하는 듯 보인다. 그것이 가끔 나를 몹시 두렵게 만든다.


그것이 네가 저지른 진짜 잘못이다.

작가의 이전글 너는 내 운명의 껌딱지 #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