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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Aug 25. 2021

너는 내 운명의 껌딱지 #6

백마 타고 오지 마

아무리 남자들이 ‘이기는 행복’을 좋아해도, 경쟁 그 자체가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정말로 많은 노력을 해야 하기에 그렇다. 


여자들이 친구들과 만나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달콤한 치즈 케이크를 앞에 두고 담소를 나누면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은 행복을 위해서는 남자들은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서 매일 수백 판을 반복하거나, 내기 골프를 이기기 위해서 매일 수없이 많이 골프채를 휘두르거나, 남들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공부를 하며 지식을 쌓아야 한다. 꽤나 힘들다.


그런 노력의 과정은 ‘승리’라는 궁극적 목적을 달성할 때 분명히 ‘행복’을 가져다주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정을 즐기는 일은 쉽지는 않다. 또한 노력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기는 것도 아니고, 지게 되면 행복은커녕 우울해지고 만다.


그런 남자들의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 여자들 입에서는 결국 공통적으로 ‘도대체 왜?’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시원한 커피나 마시며 수다를 떨면 얻을 수 있는 행복을, 그것도 게임이나, 골프나, 지식을 쌓는 일이 당장 돈을 벌어다 주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나 이기려고 승부에 집착하는 모습이 잘 이해가 가질 않는 것이다.


하지만 여자들이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남자들의 그런 승부욕에는 유전자에 새겨진 후손을 남길 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하게 된다는 두려움이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계속 지더라도 물러 설 수 없는 것이다. 더욱더 열심히 노력해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설령 한 분야에서 이기지 못하게 되면 새로운 분야를 만들어서라도 이겨야 한다. 돈을 잘 벌지 못하면 지식이 많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지식을 많이 쌓지 못하면 전국에 있는 희귀한 돌이라도 모아야 한다. 무엇이든 자신만의 승부처가 필요하고, 그 분야에서 승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남자들은 자신도 똑같은 마음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승자'라고 인정해준다.


패자가 되는 두려움에 대한 남자들의 깊은 공감이다.


인간의 남자들만 경쟁하는 것도 아니다. 귀여운 눈망울을 가져서 보기만 해도 예쁜 사슴이나, 깡충깡충 뛰는 토끼, 밤을 까먹는 귀여운 다람쥐들도 번식기가 되면 싸운다. 심지어 곤충들도 싸운다. 수컷에게 있어서 패배는 유전자의 단절을 의미한다.


물론 여자들도 분명히 경쟁을 한다. 특히 최고의 남자를 선택하기 위해서 자신의 매력을 최대한 높인다. 그럼에도 여자들은 남자들처럼 대놓고 경쟁하지는 않는다. 기다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순서가 오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만 보면, 승자인 남자가 수많은 여자들을 임신시킬 수 있지만, 한 여자가 수많은 남자의 아이를 임신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남자들은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책임지지 않으려고 도망치고 만다. 물론 자신의 도망치는 모습이 부끄럽기 때문에 그런 여자들을 ‘헤프다’고 비난하면서 양심 세탁을 한다.


기다릴 수 없기 때문에 절실한 남자와 달리 여자들은 자연스럽게 순서가 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유롭다. 단지 여자들 역시도 앞에서부터 괜찮은 남자들이 선택되어서 빠져나가기 때문에 더 오래 기다릴수록 점점 별로인 남자들만 남는다는 점이 문제일 뿐이다.


결국 여자와 남자의 경쟁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벌어지게 된다. 남자들은 자신이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선택을 받기 위해서 경쟁한다면, 여자들은 자신이 꼭 선택하고 싶은 ‘최고의 남자’를 두고 경쟁을 하게 된다. 거기에 한정되어서 만큼은 여자들의 경쟁이 남자들보다 훨씬 더 치열하고 잔인하다.


‘백마 탄 왕자님’ 이야기가 과거에도 통했고 요즘 시대에도 여전히 통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훗날 한 왕국의 ‘리더’가 될 남자, 여자들에게 있어서는 늙은 왕이 아닌 젊은 왕자는 최고의 결혼 상대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여전히 많은 여자들이 꿈꾸는 판타지 속의 주인공이 된다.


하지만 이런 고전적 개념들은 문명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꾸준히 변화해 왔다.


최초의 변화는 일부일처제이다. 한 명의 남자에게 한 명의 여자라는 사회적 계약은 남자들이 과거처럼 그렇게 피 터지게 경쟁할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결혼에 따른 일부일처제는 확실하게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고 싶은 남자들의 욕구와 확실하게 보호를 받길 원하는 여자들의 욕구가 잘 맞아진 결과물이다.


현대에 들어서는 여자들 쪽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여자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졌기 때문에 ‘먹을 것을 구하는 일’을 남자에게 전적으로 맡길 필요가 없어져서 그렇다. 이제는 여자들 스스로 얼마든지 먹고사는 일을 책임질 수 있어졌기 때문에 과거처럼 ‘먹을 것을 잘 구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남자를 선택할 필요성이 줄어들었다. 


그로 인해서 과거엔 ‘강한 남자’라는 조건은 남자가 가진 모든 잠재적 문제들을 상쇄시켜 버렸기 때문에 왕자가 백마만 타고 오면 그 인간성이 어떻든 간에 인기가 폭발했지만, 이제는 두 발로 걸어오더라도 따뜻하고 자상하고 대화가 통하는 남자들이 훨씬 더 인기가 많게 되었다.


물론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뀐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강한 남자인 ‘돈을 잘 버는 남자’의 인기를 여전하다. 하지만 과거로부터 많은 강한 남자들이 자신의 강함을 권력으로 휘둘러 온 것에 대한 강한 반발이 일어나고 있다.


많은 남자들은 과거로부터 자신이 강하다는 이유로 집에서 갑질을 해왔다. 돈이나 권력 좀 있다 싶은 남자들이 바람을 피우는 일이나 심한 경우 첩을 두는 일이 흔히 일어났고, 집 안에서도 자신이 말이 곧 법이라는 식의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그로 인해서 과거처럼 그런 행태를 보이는 남자들은 점점 더 퇴출이 되는 분위기이다. 여자들의 사회적 지위가 올라감에 따라서 남자가 갖춰야 조건들 중에서 ‘돈을 잘 버는 능력’은 점점 다른 조건들에게 따라 잡히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남자들은 이런 여자들의 빠른 인식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그로 인해서 사회 곳곳에서 끝없는 갈등이 표출되고 있다.


특히 ‘대화 방식’이 문제가 된다. 과거로부터 대화를 여전히 ‘의사소통’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남자들은 여전히 대화를 사실에 근거한 이성과 논리로만 하려고 한다. 하지만 대화가 이미 ‘행복’으로 완전히 자리 잡은 여자들은 내 편을 들어주고 내 말을 들어주고 공감해주길 바라고 있다.


남자는 ‘경쟁’을 통해서, 여자는 ‘대화’를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여자들은 남자들이 왜 그렇게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경쟁에 사로 잡혀 힘들게 사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남자들은 여자들이 왜 그렇게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말을 끝없이 하길 원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서로에 대한 이해 부족은 그나마 유지되던 대화마저 단절되게 만들고 말았다. 말해봐야 싸움만 나니 그냥 대화 자체를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남은 일은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자신의 ‘동성’ 친구를 만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들과 내가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많은 친구들을 만나서 속상한 얘기를 털어놓아봐야 깊어지는 것은 상대에 대한 이해가 아닌 오해일 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전혀 없는 것일까? 


있긴 있다. 하지만 그전에 내가 나와 같이 살고 있는 사람에게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기억해 내야 한다. 정말로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상대에 대한 분노로 인해 까맣게 잊고 말았던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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