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의 인정을 원한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생각보다 우리가 자주 까먹는 사실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여자와 남자를 구분하는 기준점은 유일하게 ‘성’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단순 명료한 사실을 왜 평소엔 잘 인지하지 못할까?
우리 인간이 그리 단순하게 둘로 나뉘지 않기 때문이다. 성적 역할로 인해 생겨나는 차이보다, 그것을 통해 만들어지게 되는 남자나 여자만의 고유한 특징이 훨씬 더 크고 강렬하기 때문에 오히려 타고난 성적 역할은 그리 큰 차이로 느껴지지 않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남성’과 ‘여성’의 차이보다 훨씬 더 크다는 뜻이다. 도대체 왜 그렇게 커져버린 것일까?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아니 모든 생명체에게 후대를 남기는 일은 타고난 본능 중 하나이다. 물론 본능이라고 해도 당연히 거부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몸이 반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나이가 되면 몸이 2차 성징이 발현되기 마련이다.
여자와 남자는 공통적으로 임신에 필요한 유전자 중 절반을 제공한다. 그런데 이후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왜냐하면 열 달 동안 아이를 품는 역할은 오직 여자만이 담당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자만이 유일하게 ‘임신의 주체’가 되는 현상은 단순히 ‘임신을 할 수 있다는’ 차이를 넘어서서 서로 상대방 성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를 변화시키게 된다.
기본적으로 후손을 남기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많은 후손’을 남기는 일이다. 비록 요즘 시대엔 애 키우는 일이 힘들어서 아이를 셋 이상 낳으면 ‘애국자’ 소리를 듣는 형편이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이 쉽다면 지금 시대라도 많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애국자가 될 것이다.
여자와 남자 모두 ‘많은 후손’을 남기고 싶다는 욕구는 같지만, 그것을 실제로 실현해 내는 능력은 남자가 월등히 뛰어나다. 사실상 비교가 되질 않는 형편이다.
잠시만 윤리적인 관점을 접어두고 생각해보자. 남자 한 명이 평생 동안 몇 명의 후손을 남길 수 있을까? 뭐, 남자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건강한 남자라면 몇 천명, 만약 과학적 도움까지 받는다면 수십 억 명 이상도 가능할 것이다. 남자는 ‘임신을 하고 있는 기간’이 필요 없어서 그렇다.
여자는 전혀 다르다. 여자는 자신의 유전자를 타고난 한 명의 아이를 갖기 위해서는 언제나 열 달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평생 30명의 아이를 낳는 것이 물리적 한계일 것이다. 과학적 도움을 받는다고 쳐도 한 명의 여자가 가진 난자의 숫자가 대략 500개 정도이기 때문에 잘해야 500명이다. 몇 천명 대 30명, 수십 억 명 대 500명, 비교도 안 되는 숫자이다.
그러니 훌륭한 후손을 남기는 일에 대해서 만큼은 남자에 비해서 여자는 ‘선택과 집중’이 매우 중요하다.
수많은 자손을 남길 수 있는 남자의 경우는 상대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도 정자를 제공할 수 있다. 금세 또 다른 여자에게 정자를 제공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여자는 전혀 다르다. 일단 한 명에게 정자를 제공받고 나면 그 아이를 낳을 때까지 또 다른 선택의 기회는 없다. 그러니 언제나 ‘최고의 상대’를 고르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단순히 생각하면 성적 역할에서만큼은 남자들이 훨씬 더 유리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큰 착각이다. 왜냐하면 한 남자가 동시에 많은 여자들을 임신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자신이 승자의 입장에서 많은 여자에게 선택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나 좋은 것이지, 반대로 패자가 되어서 여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입장이 되면 아예 후손을 남길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악몽이 되고 만다.
생물학계의 연구에 의하면, 자연계에서는 수컷들이 평균적으로 10%만 후손을 남긴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떤 남자들이 여자들의 선택을 받아 자손을 남길 가능성이 높을까? 당연히 ‘강한 남자’인데, 기본적으로 그 강함은 ‘먹을 것을 잘 구하는 능력’을 뜻한다.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임신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동안 ‘자신과 아이가 먹을 것’을 잘 구해다 주는 남자의 역할이 너무도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여자가 남자를 선택할 때 경제력을 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결국 남자들에게 있어서 ‘먹을 것을 잘 구하는 것’은 단순히 내 생존에 머물지 않는다. 당장 먹고사는 것도 문제이지만, 무려 자신이 여자의 선택을 받아 자손을 남길 수 있을지 여부마저 결정되고 만다.
먹을 것을 잘 구하려면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탁월한 ‘역할’을 맡아야 하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할 수 있는 ‘의사소통’의 능력을 갖춰야 하며, ‘공정함’의 기준이 자신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도록 많은 우호적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누가 그런 역할을 할까? 따로 생각할 필요도 없다. 바로 무리의 ‘리더’이다.
그로 인해 남자들은 평생 동안 리더가 되기 위해서 끝없이 위로 올라가려고 한다. 가장 높이 올라갔을 때 모든 것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자들이 경쟁을 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 동료들의 ‘인정’을 받아 리더의 자리에 오르려고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단지 여기에서 문제는, 인정을 받을 때마다 경험하게 되는 쾌감에 중독되어서 그것이 무엇이든 이기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침을 멀리 뱉는 것도 경쟁을 하고, 아이와 놀 때도 이기려고 하고, 친구보다 더 큰 물고기를 잡았다고 자랑하고, 게임에 졌다고 많이 우울해한다.
만약 먹을 것을 잘 구하는 능력이 단순히 먹고사는 일에만 한정되었다면 남자들이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능력이 ‘후손을 남길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남자들은 어쩔 수 없이 무한대의 경쟁에 내몰고 만다. 그리고 운 좋게 승자가 된 남자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성취한다.
조선 시대의 태종은 아내 12명에게서 28명의 아이를, 세종은 아내 6명에게서 22명의 아이를, 성종은 아내 12명에게서 28명을 얻었다. 하지만 이 분야에서 칭기즈칸을 따라 올 남자는 없다. 그는 이미 예전에 죽고 없지만, 지금 시대에 전 세계 사람들의 0.5%(1,750만 명)가 칭기즈칸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상태이다. 칭기즈칸은 ‘남성’으로만 보면 최고의 성공을 거둔 남자이다.
남자들은 누구나 칭기즈칸이 되고 싶어 한다. 단지 그러기 위해서는 타고난 능력, 도달하는 동안 받게 될 스트레스, 경쟁 중 지게 되면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대부분 포기를 할 뿐이다. 그렇지만 그 안에 있는 가지고 있는 경쟁심과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늘 잠들어 있다.
그러다가 가끔 ‘생명을 걸 필요가 없는 수준’의 경쟁심이 크게 발휘가 된다. 무엇이든 이기려고 하는 것이다. 친밀함과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남자들의 모습이 위태위태 하다. 저렇게 심각하게 경쟁하다가 이기고 지면 이후에 서로 얼굴도 안 볼 것 같은데, 놀랍게도 남자들은 그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똑같이 어울린다.
‘저들은 져도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일까?’ 아니다. 상처를 받는다. 아주 크게 받는다. 그런데도 그들은 왜 별 일도 아닌데도 계속 경쟁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