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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Aug 31. 2021

너는 내 운명의 껌딱지 #끝

왜 아무 말 없는 거야?

“그래서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나쁜 사람’ 인가요?”


자신의 배우자에게 많이 실망해서 틈만 나면 불만을 털어놓고 있는 분에게 이렇게 물으면 대부분 잠시 생각을 한 후에 한숨을 쉬면서 대답을 한다.


“아… 그건 아니고… 사람은 착해요. 그런데…”


말을 끊어서 미안하지만, 그렇다. 그 사람은 착하다. 당연히 착하니까 결혼한 것이다. 이 세상에 나쁜 사람과 일부로 결혼하는 사람은 없다. 그나마 젊은 시절에 ‘나쁜 남자’라는 환상에 빠져서 결혼했다가 후회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분명히 착한데 왜 그런 갈등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정확하게 하나뿐이다. 상대방을 나와 똑같은 존재로 가정했기 때문이다. 나와 똑같은 기준에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나와 똑같은 이유로 그런 행동을 한다고 믿고 있어서 그렇다. 상대를 상대방의 입장에서 봐야 하는데 내 입장에서만 본다. 서로 전혀 엉뚱한 해석을 한다. 결국 차이를 차별로 정의한다.



상대가 꼬리를 세우면 싸움을 거는 것으로 여기는 고양이와 친한 상대에게는 꼬리를 흔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개가 만나는 장면과 같다. 개가 친근함 표시할수록 고양이는 화가 나고 결국 둘은 싸울 수밖에 없다.


서로 너무도 다른 환경에서 자랐고, 서로 너무도 다른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으면, 서로 너무도 다른 반응이 나타나는데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나와 ‘똑같은’ 존재라고 가정한다. 이것이 모든 갈등의 최초 시발점이다. 여기에 돈 문제, 시댁 문제, 처가 문제, 생활습관 차이 문제, 자녀 문제 등, 수많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달라붙는다. 문제 자체가 쉽지도 않은데 문제를 대하는 태도부터 전혀 다르다. 심각함의 대상이 다르다.


어려서부터 경쟁적 환경에 노출된 남자들은 자신의 욕구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고, 감정을 최대한 숨기는 것에 단련이 되어 있다. 감정적일수록 승부에서 이기기 힘들며, 경쟁적 상황일수록 자신의 요구사항을 명확히 전달해야 이뤄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여럿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할 때 최종적으로 자신의 원하는 방향대로 결정하려면 명확하고 직접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 두리뭉실하게 말했다가는 금세 묻히고 만다. 그러니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고 싶다면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게 확실히 말을 하고, 그렇지 않을 것이라면 어떤 말도 할 필요가 없다. 침묵 자체가 동의를 의미한다.


어려서부터 공존의 환경에서 살아온 여자들은 자신의 욕구를 표현할 때 부드럽고 간접적으로 하는 것에 익숙하다. 또한 그 이유를 설명할 때도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정도로 하면 된다. 딱히 내가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 이유를 힘들게 설득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누군가 뭔가를 하고 싶다고 하면 적당한 반응만 보여주면 된다. 그러니 침묵은 반대를 의미한다.


동의하면 말을 하지 않는 남자와 동의한다는 말을 기대하는 여자, 갈등의 서막이다.


남자들에게 있어서 관계는 경쟁적이고 수직적이다. 그러니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내가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남을 밟고 올라간다. 그러다가 밟을 때마다 느껴지는 쾌감에 중독되어 일부로 밟는 것을 즐기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물론 문명의 발달로 인해 꼭 그렇게 경쟁하지 않아도 살만하기 때문에 이제는 꽤나 많은 남자들이 그 길을 피한다. 하지만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여전히 남을 밟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꽤나 큰 스트레스이다.


여자들에게 있어서 관계는 개별적이며 수평적이다. 그래서 남자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수동적으로 느껴진다. 물론 요즘은 여자도 사회에 많이 진출하게 되면서 남자들처럼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여자들이 늘고 있다. 그럼에도 남자들만큼 강한 공격성은 나타나지 않는다. 여자들은 내가 ‘잘 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 남자들처럼 ‘살아남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남자들에게 경쟁이 ‘생존’의 문제라면, 여자들에게 있어서 경쟁은 ‘행복’의 문제이다. 그러니 남자와 달리 스스로 불행해지면서까지 행복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랬던 여자도 생계의 책임'을 지고 남자들의 경쟁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결국엔 남자와 비슷해지고 만다.


남자들은 맞는 말을 들어도 그것을 비판하려고 하고, 여자들은 틀린 말을 들어도 가능하면 공감해주려고 한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이 표현에서 남녀의 오래된 입장 차이가 나온다. 남자들은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말이라도 듣는 순간 반론을 생각한다. 누군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아 위로 올라갈수록 내 순위가 자동으로 내려가기 때문이다.


여자들의 입장에서는 설령 상대의 말이 틀렸다고 느껴도 그 말이 나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다면 그냥 넘어가 준다. 그것을 따져봐야 상대방 감정만 상할 뿐이고 나와 관계만 나빠지게 된다.


언제든 공격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남자들은 남들 앞에서 말을 하려고 할 때 긴장하게 된다. 하지만 여자들은 그렇지 않다. 그로 인해 남자들의 대화는 늘 회의실 분위기처럼 간결하고, 여자들의 대화는 늘 한적한 카페의 분위기처럼 풍성하게 이뤄진다.


여자들은 대화를 즐기고 남자들은 대화를 부담스러워한다. 그래서 여자들은 대화를 원하고 남자들은 대화를 피한다. 이런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두 사람이 결혼 후 매일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본다. 대화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대화를 대하는 태도'로 인해 없던 문제도 생겨날 지경이다.


행복의 관점에서만 보면 여자의 삶이 확실히 나아 보인다. 사실 돌이켜보면 남자들도 어렸을 때는 여자들과 비슷했다. 말이 많았고 그 내용도 풍성했다. 중간에 남자로 키워진 것이다. 결국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절박함과 누구도 시키지 않은 책임감의 무게에 눌려 감정이 사라진 로봇이 되어 버린 후 말문이 막혔다.


한 생명체의 존재 이유가 자신의 행복이 아닌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수행한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니,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 그러니까 인정을 받는 것이 행복이 되어 버렸다.


그때 얻은 것은 ‘인정’이고 잃은 것은 ‘공감능력’이다. 물론 그런 남자의 성향이 필요할 때는 있다. 특히 위험한 상황에서 그 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세상은 점점 더 안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남자의 그런 능력이 장점으로 발휘될 순간들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남자들은 지금이라도 잘 생각해봐야 한다. 이 세상을 여전히 순위를 매기면서 경쟁적으로 살아야 하는지, 다른 사람들의 말을 ‘그냥 들어주는 것’은 왜 불가능한지, 나를 왜 세상의 기준에 강제로 맞추려고 하는지, 지금 내가 추구하고 있는 행복만이 유일한지에 대해서 깊게 고민해 봐야 한다.


여자들은 그런 남자들의 모습이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자들 전체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봐줘야 한다. 그저 남자로 키워진 것이다. 단지 너무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와서 이제는 자신의 정체성이 그렇다고 스스로도 믿고 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통장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과 잘 지내는 일은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 이 사람과의 관계가 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해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행복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나도 힘든 만큼 그 사람도 힘들다. 내가 답답한 만큼 그 사람도 답답하다. 내 존재의 본질이 아내나 남편이라는 역할이 아니듯 그 사람도 남편이나 아내가 그 사람의 본질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다. 그 사람도 사람이다. 


우린 모두 엄마, 아빠, 아들, 딸, 김대리, 사장님, 이모, 어이, 야, 저기요 가 아니라 그저 행복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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