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니?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름, 고향, 형제관계, 전공, 졸업한 학교, 다니고 있는 직장, 연봉, 모아 놓은 재산, 부모님의 직업, 부모님이 사는 동네 이름을 아는 것일까? 잠시 생각해보니 그것은 아닌 것 같다.
"나이가 몇이지? 형제는 몇이고? 체중은 얼마지? 아버지 수입은 얼마야?"
생텍쥐페리는 자신이 쓴 소설 「어린 왕자」에서 어른들이 이런 질문을 통해 ‘누군가를 아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신 "그 애 목소리는 어떻지? 그 애가 좋아하는 놀이는 무엇이지? 나비를 수집하는지?",라고 질문을 해야 한다고 했다. 작가는 스펙를 쌓기 위해 너무도 지친 우리를 따뜻하게 어루만져준다.
하지만 그의 질문도 온전하지 않다. 상대가 좋아하는 색이나, 즐겨 듣는 음악이나, 좋아하는 음식이나, 선호하는 차나, 잘 마시는 술의 종류나, 좋아하는 스포츠 종목을 알면 그 사람을 정말로 ‘아는 것’ 일까?
물론 나이나 체중이나 연봉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는 낫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그 사람의 반쪽만을 아는 것이다. 그 사람이 가진 ‘낭만의 영역만’ 아는 것이다. 나머지 모르는 절반은 바로 ‘현실’이다.
겨울바다는 텅 빈 공간과 스산함으로 우리를 어딘가로 이끌지만 조금만 있어도 뺨이 갈라질 듯 아프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한 후 어떤 노래를 들어도 다 내 얘기인 것 같아서 한없이 눈물이 나지만 TV에 속에서 보글보글 끓는 김치찌개를 보면 갑자기 입에 침이 고인다.
남녀가 연인관계일 때는 주로 밖에서 만난다. 서로를 위해서 잘 꾸미고, 행복한 데이트를 위해서 돈을 아끼지도 않고, 가능하다면 분위기 좋은 장소에도 간다. 처음부터 상대방을 최대한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 만나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한다. 이것은 아주 좋은 것이지만, 낭만이다.
남녀가 결혼과 동시에 한 집에서 살게 된다. 그냥 한 집에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진짜 삶을 살아간다. 이때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한 상대방의 ‘나머지 절반’이 드러난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서 대화를 하고 있을 때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다. 바로, 현실이다.
우선 생활습관 대해서 알게 된다. 자는 동안 코를 얼마나 고는지, 이를 가는지 여부를 알게 된다. 머리를 며칠 만에 감는지, 하루에 이를 몇 번 닦는지도 알게 된다. 화장실 변기커버를 어떻게 하는지, 샤워를 하고 나면 얼마나 사방에 물이 튀어 있는지를 알게 된다.
돈 씀씀이가 어떤지도 알게 된다. 어떤 물건들을 사는지, 얼마나 자주 사는지, 돈을 아끼는 사람인지, 돈을 많이 쓰는 사람인지, 즉흥적으로 소비를 하는 사람인지, 계획적으로 쓰는 사람인지 알게 된다. 품질을 따지는지, 무조건 싼 것을 사는지, 가성비 있는 제품을 사기 위해서 얼마나 오래 검색을 하는지, 모든 제품은 무조건 백화점에서만 사려고 하는지를 알게 된다.
나와 데이트를 하고 있던 시간 이외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알게 된다. 게임을 하는지, 드라마를 보는지, 책을 읽는지, 등산을 하는지, 주말이면 꼭 자전거를 타는지, 그냥 TV를 쥐고 하루 종일 소파에서 뒹굴거리는지, 근처 가까운 곳이라도 산책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게 된다.
공동생활에 대한 태도도 알게 된다. 청소를 하는지, 요리나 설거지를 하는지, 음식쓰레기를 버리는지, 양말이나 속옷을 거꾸로 벗어 놓는지, 뭔가 고장이 나면 스스로 고치는지, 옆집 사람과 어떻게 지내는지, 시댁이나 처갓집을 얼마나 자주 방문하는지, 부모님과 얼마나 자주 통화를 하는지를 알게 된다.
사실 ‘모르던 있던 절반’은 매우 자질구레한 것들이다. 하지만 이 자질구레한 것들이 매일같이 사소한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그로 인해서 정말로 운이 좋은 부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부부는 신혼 초엔 정말로 자주 싸우게 되고 최소 10년 이상은 같이 살아야 어느 정도 맞춰진다.
결혼 전 예쁘게 꾸미고 나와서 데이트를 하던 낭만은 간데없고 간데없고 음식 쓰레기 버리는 문제로 싸우고, 변기 커버를 올리고 내리는 문제로 서로 짜증을 내고, 손톱을 깎아 놓고 치우지 않은 것으로 인해 대판 싸우고 며칠간 서로 말을 하지 않기도 한다.
이것은 일종의 ‘문화충격’이다. 그래도 그나마 이런 문제들만 생기면 그래도 그렇게까지 심한 싸움으로는 번지지 않을 것이다. 진짜 문제는 사실 따로 있다.
결혼 전 ‘내가 저 사람이랑 결혼을 해야겠다’,라고 느꼈던 상대방의 장점이 결혼과 동시에 갑자기 단점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상대는 바뀐 것이 전혀 없는데 내 입장의 차이로 인해서 그렇게 된다. 결국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진다.
세련된 외모를 가졌던 남자는 옷과 화장품을 사는데 매달 수십 만원을 지출하고 있다. 늘 예쁘게 꾸미고 나오던 여자는 밖에 나갈 때마다 꾸미기 위해 두 시간 이상이 걸린다. 내 말이라면 다 들어주던 남자는 자신의 엄마 말도 잘 듣는다. 엄마와 사이가 좋던 여자는 결혼 후에도 매일 몇 시간씩 통화를 해서 장모님이 내 엉덩이에 커다란 점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여자에게 돈을 아끼지 않고 돈을 팍팍 쓰던 남자는 매달 통장이 적자이고, 술을 잘 먹어서 좋았던 여자는 평일에도 직장동료와 자주 술 약속이 있다.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아서 보기 좋았던 남자는 주말마다 끝없이 약속이 있고, 모든 스케줄을 남자에게 맞춰줘서 편했던 여자는 집에 일 년 내내 개인적인 약속이 하나도 없이 모든 시간을 남자와 함께 보내길 바란다.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서 서로 잘 맞지 않아도 상대가 결혼을 결심할 정도로 ‘좋은 점’이 있으니 참고 살아가야 하는데, 그 좋은 점마저 이젠 나쁜 점이 되고 말았다. 그때가 되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원래 알고 있던 사람은 어디로 갔지? 이 사람은 나를 속이려고 그 동안 연기를 한 것일까?’
이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파멸이 시작된다. 하지만 본인만 몰랐을 뿐 이미 파멸의 전조는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를 아는 것을 그 사람의 이름, 외모, 연봉이라고 믿었던 시절부터, 누군가를 아는 것을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음악, 음식, 스포츠 경기라고 믿었던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다.
누군가를 ‘진짜로’ 아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코를 고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과의 삶을 살아 볼 때만 제대로 이뤄진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그런 기회가 없다. 결혼을 하고 난 후에나 비로소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나와는 다른’ 상대방의 모습이 그렇게나 나쁜 것일까? 내가 그렇게 짜증을 내고 화를 내야만 하는 것일까? 양말 좀 뒤집어 벗어 놓는 것이 그렇게나 미워할 짓일까? 뒤집어 벗어 놓았다면 그냥 뒤집은 채로 빨아 놓으면 된다. 그러면 나중에 본인이 뒤집어 신을 것이다.
뒤집어 놓은 남자와 뒤집은 꼴을 보지 못하는 여자, 누가 문제일까?
결혼 후 상대방에게 심각한 수준의 빚이 있었다든지, 건강상에 커다란 문제가 있음을 말하지 않았다든지, 불륜을 저질렀다든지 하는 문제들이 있다면 파탄이 날 수도 있다. 그것은 상대가 나를 확실하게 ‘속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버릇이나 생활습관이나 얼마나 나와 다른지의 여부가 그렇게 심각한 수준의 문제들이 되어야 할까?
혼자서 살면 혼자 다 할 것을 둘이 산다고 해서 왜 혼자서 하면 안 되는 것일까? 혼자만 하면 왜 그렇게 기분이 나빠야 하는 것일까?
명작 중 하나로 꼽히는 영화 「굿 윌 헌팅」에서 로빈 윌리암스는 사별한 아내의 방귀소리에 대해서 추억한다. 그는 맷 데이먼에게 자다가 본인이 뀐 방귀소리에 놀라 깨어난 아내가 자신에게 “당신이야?”라고 물었던 모습을 말해주며 크게 웃는다. 하지만 이내 두 눈엔 눈물이 고인다.
누군가가 사랑스럽다면,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했다면 그 사람이 가진 ‘조금 나쁜 버릇’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니, 아니어야 한다. 왜 그런 것들이 상대방에 대한 짜증의 이유가 되어야 할까?
왜 상대는 내가 수십 년간 해온 생활습관에 맞춰야 할까? 그 사람은 왜 나를 위해서 수십 년간 해온 생활습관을 고쳐야 할까? 나는 그 사람에게 맞춰줄 수는 없을까? 아니 그것은 좀 힘들더라도 그냥 그 사람의 생활습관을 내가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것일까?
둘 사이에서 내 상식의 기준만이 옳다는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