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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Sep 01. 2021

역할 바꾸기

당연함과 감사함

저희 집 근처에는 시장이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재래시장이죠. 걸어서 5분도 채 안 되는 거리인 데다가 규모도 어느 정도 돼서 딱히 장을 보기 위해 차를 타고 대형마트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더해서 시장 안에 꽤나 큰 규모의 마트가 하나 자리 잡고 있어서 시장에서는 구하기 힘든 가공식품류들도 구입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어 번 정도 시장을 봅니다.


시장은 원래 여자들의 세상이죠. 남자분들이 있긴 하지만,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분들이거나, 물품을 배달하는 중이거나, 아내를 따라 나온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다 보니 저처럼 ‘장을 보기 위해서’ 시장에 오신 분들은 거의 여성분들입니다.


꽤나 오랫동안 시장을 이용해왔던 탓에 건어물, 생선, 고기, 채소, 떡, 들기름 등과 같은 것들을 사려면 어떤 종류의 가게로 가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고, 비슷한 품목을 다루는 가게들 중에서 어느 가게 사장님이 친절한 지도 알고 있고, 시장에서 일하시는 분들 얼굴도 거의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골가게 하나 없고, 시장에서 일하시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며 지내지는 못합니다. 저의 낯가림 성격도 한몫 하지만 제가 남자인 이유도 있는 것 같더군요. 저에게 있어서 시장은 참 익숙한 곳이지만 이상하게도 갈 때마다 이방인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남자인 제가 시장에 다니는 이유는, 제가 요리를 담당하기 때문입니다. 요리뿐만이 아니라 청소며 빨래 등등 대부분의 집안일을 제가 합니다. 아내는 밥을 먹은 후 설거지 정도만 합니다. 


제가 프리랜서이기에 집에서 일을 하고, 또 일 자체가 그리 많지 않아서 시간이 넉넉합니다. 하지만 아내는 보통 사람들처럼 출퇴근을 하는 처지이니 상대적으로 시간이 남는 제가 집안일을 하고 있는 것이죠.


물론 아이를 키우고 있지 않아서 집안일 자체가 아이를 키우는 다른 집에 비해 현저하게 적은 것도 한몫합니다.


저희는 지금껏 살면서 집안 일로는 서로 언성을 높인 적이 거의 없습니다. 둘이 딱히 성격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연히 운좋게 그렇게 된 것입니다.


남자가 돈을 벌고 여자가 살림을 해야 한다고 믿는 사회에서, 남자가 살림을 하고 여자가 돈을 버는 형태의 구조가 되니 의도치 않게 두 가지 좋은 점이 생겨납니다.


첫 번째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아니라는 생각이 깔려 있으니 부담감이 적습니다. 아내는 돈을 벌긴 하지만, 그래서 본인이 가장이라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남자들이 느끼는 부담감에 비해서는 훨씬 덜합니다. 저 역시도 살림을 하긴 하지만, 그 일이 저에게 주어진 의무라기보다는 그냥 합리적으로 제가 할 수 있으니 하고 있기 때문에 많이 부담은 없습니다. 그래서 밥을 하기가 너무 귀찮으면 그냥 안 합니다.


보통 여자들은 그렇게 하기가 힘들죠. 그렇게 되면 일종의 책임 방기가 되어 버리니까요. 이런 마음가짐의 차이는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생각보다 아주 크게 작용합니다.


두 번째는 ‘내가 해야 할 일을’, 그것도 매우 부담스러울 수 있는 일을 상대가 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고맙습니다’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해야 할 일을 할 때는 당연하다는 생각만 드는데, 안 해도 되는 일을 해주니 고마운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혹시라도 제대로 못해도 불만이 생겨나지는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남편이 돈을 벌고 아내가 집안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설령 맞벌이를 해도 살림 그 자체는 여자가 책임지게 되죠. 둘이 똑같은 시간만큼 집안일을 해도 남자는 언제나 ‘돕는’ 입장이며, 잘 돕는 남자는 '멋진 남편'이라는 칭찬을 듣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칭찬을 해주지 않습니다.




국 하나에 반찬이 서너 가지 놓인 밥상조차도 그것을 차리는 일은 해보면 참 쉽지 않은데, 그것을 매일 해야 하는 일은 정말로 힘듭니다. 더해서 어떤 요리를 먹을지 결정하는 일도, 또 이미 자주 해 먹던 것을 반복하기 싫어서 새로운 요리에 도전해보는 것도, 그럴 때마다 맛이 제대로 날지 긴장하면서 간을 맞추는 것도 부담스럽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늘 고마워하며 맛있게 먹어주는 아내를 떠올리며 합니다.


하지만 많은 남자들은 그런 밥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물론 여자들도 통장에 들어오는 남편의 월급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반찬투정을 하고, 여자는 월급이 적다고 불만을 늘어놓습니다.


그런 현상은 상대방이 해주는 것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하는 일이 ‘의무’가 되는 순간, 그 모든 것들은 당연한 것이 되고, 그 당연함은 강력한 지우개가 되어서 상대방이 한 노력에 대한 감사함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고 맙니다.


힘들게 노력했는데 상대로부터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 그로 인해서 감사함을 받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그 일 자체의 힘듦보다 더 견디기 힘들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서로 감사해하면 서로 일할 맛이 날 수 있는데, 서로 당연하게 여기면서 불만을 털어놓습니다. 그런 면에서 다른 부부와 달리 역할을 바꾼 저희는 의도치 않게 상대에 대해 감사함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죠.


이런 역할 바꿈과 함께 저희 집은 평화로운 삶을 위해서 잠정적으로 정해진 원칙이 두 개 존재합니다. 


첫 번째 원칙은 그것이 무엇이든 ‘아쉬운 사람이 한다’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못 버틴 사람이 한다’입니다. 그러니까 집이 엄청 더러워도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청소를 안 하고 살아도 됩니다. 대부분의 경우 제가 못 버티기 때문에 청소를 합니다. 부칙으로, 못 견뎌서 할 때는 혼자만 해야 합니다. 같이 하자고 하거나 시키면 안 됩니다.


두 번째 원칙은 ‘가까운 사람이 한다’입니다. 밥을 먹다가 한 명이 물을 먹고 싶으면 첫 번째 원칙에 따라 본인이 가져와야 하지만, 둘 모두 동시에 물이 먹고 싶으면 그 순간 냉장고와 더 가까운 사람이 가서 가져와야 합니다. 그래서 가끔 거리가 비슷하면 몸을 최대한 말아서 대상과의 거리를 최대한 넓히거나 혹은 상대를 발로 밀어서 가깝게 만드려는 웃기는 짓도 합니다.


어느 정도 재미로 하는 것도 있지만, 사실 이 두 원칙이 꽤나 도움이 많이 됩니다.



돈을 버는 일도 힘들지만, 집안일을 하는 것도 꽤나 힘듭니다. 육체적으로 힘들다기보다는 해도 티도 잘 안 나고 인정받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아마도 '인정 받기'를 목숨처럼 추구하는 남자들이 집안일을 하면서 살 수 없을 것도 같습니다. 집안일을 도와서 좋은 남편이라는 ‘인정’을 받을 땐 잘 하지만, 전업주부가 되어서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집안일을 하고 살 때는 아무런 ‘인정’도 받지 못하니까요.


집마다 모두 각자 다른 사정이 있으니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상대가 해주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일들이 정말로 상대가 당연하게 해줘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밥을 먹을 때 ‘이런 맛있는 밥을 차려줘서 고마워’,라고 생각해주고, 통장에 월급이 들어올 때마다 ‘한 달간 고생이 많았구나’,라고 생각해 주는 것이 많이 어려운 일일까요?


오늘 아침에도 출근하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살짝 안타까움이 느껴지네요. 그래도 돈을 벌어야 하니 출근은 꼭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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