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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Sep 03. 2021

네가 잘난 걸까?

아내: 그냥 끼워줘.

남편: 안돼. 저렇게 막 들어오는 차는 절대로 끼워줘서는 안 돼.

아내: 위험하다니까! 아 쫌 그냥 들어오게 나둬!!

남편: 안 된다니까. 저런 놈들은 끼워줘도 고마워하지도 않는단 말이야.

아내: 하여간.. 그 성질머리 하고는.

남편: 히히~ 봐 바. 결국 포기하네.

아내: 그래 포기하고 앞으로 간다. 그래서 저기 앞쪽에서 들어왔다. 좋겠다.

남편: 난 내 앞만 지키면 돼. 내 앞은 내 거야.

아내: 그래.. 당신 앞이 당신 거라서 참 좋겠다. 그런데 나는 그런 당신이 내 거라서 참 안 좋다.




귀여우면서도 시크하다. 부드럽고 우아하다. 하지만 가끔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기 때문에 ‘냥아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거칠지만 격정적이다. 한결같으며 충성스럽다. 가끔은 신발을 물어뜯어 놓아서 혼나기도 하지만, 귀엽기 때문에 ‘멍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귀엽기도 한데 꽤나 똑똑하기도 하다. 오래 키우다 보면 얘가 동물인지 사람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을 정도로 눈치가 빠삭하다. 그래서 어처구니가 없거나 얄밉게 굴 때도 있다. 어떨 땐 인간의 아이와 잘 구분이 안 갈 정도이다.


하지만 결국 강아지와 고양이가 인간처럼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좀 이상하긴 하다. 비록 그들이 사람만큼이나 머리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똑똑한 애들은 아이큐가 80 정도는 된다고 한다. 그런데 동물들은 왜 인간처럼 될 수는 없을까?


단순히 머리의 좋고 나쁨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마도 가장 큰 벽은 ‘언어의 문제’ 일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소리를 내도 ‘야옹야옹’이나 ‘멍멍’ 소리 정도만 낼 수 있는 고양이와 강아지는 인간의 말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인간의 언어를 알아듣는 것도 불가능하다. 물론 소리를 구분할 것이고, 몸으로 가르쳐주면 배우긴 한다. 하지만 거기엔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한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그 내용을 설명해줄 수 없다는 점이다. 


사람의 아이도 어릴 때는 어른을 따라만 하지만, 커갈수록 지식의 습득을 통해 왜 그래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어떤 원리로 그렇게 되는지도 배울 수 있고, 의미도 알 수 있게 된다. 그런 것들은 단순한 소리나 동작으로 알려 줄 수가 없다. 한 사람에게 호루라기를 하나 주고 호루라기와 동작만으로 어린아이에게 공중도덕을 가르쳐줘야 한다면 과연 얼마큼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까?


무엇인가를 표피적으로 아는 것은 ‘응용’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원리와 의미를 이해해야 배우지 않은 것에도 적용할 수 있는데, 그것이 불가능하다. 결국 동물들은 응용을 하기 힘들기 때문에 ‘일문일지’, 그러니까 하나를 알려주면 하나만 안다. 그것조차도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채 표면적으로만 안다.


인간은 인간의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정말로 많은 것들을 배울 수가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것들의 이유, 원리, 의미를 머리가 허용하는 한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거기에 삶을 살아가는 동안 쌓인 경험이 더해지면 비로소 한 명의 인간이 된다.


그럼에도 만약 언어가 ‘말’에서 끝났다면 인류 문명은 이렇게까지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문자’와 그 문자를 기록할 수 있는 책이 발명됨으로써 우리는 이제 지식을 현세대가 아닌 후세대를 위해 남겨줄 수 있게 되었다. 지식의 전승, 어떤 면에서 보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예전에 미국의 한 연구기관에서 선정한 ‘인류문명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발명품’에서 수많은 발명품들을 제치고 독일의 구텐베르크 인쇄술을 1위로 꼽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말을 통해 현재의 지식을 배울 수 있지만, 과거의 지식은 인쇄된 문자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물론 지금은 디지털 정보로 남겨져 있는 ‘유튜브’도 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말을 할 수 있고, 인간의 지식을 배울 수 있으며, 인간들 사이에서 한 명의 존재로써 그 권리를 인정받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강아지나 고양이가 인간처럼 살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인간의 말을 할 수 없고, 인간의 지식을 배울 수 없으며, 인간이 아니기에 인권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처음부터 혼자 살아야 했다면 우리는 강아지와 고양이와는 다르게 살았을까? 일단 타잔이나 정글북의 주인공 모글리는 그랬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1920년대 인도에서 늑대 무리에서 키워진 두 아이, 카말라 아말라는 7살, 2살 때 인간에게 발견되어서 이후엔 인간으로서 키워졌지만 생고기를 뜯는 등 인간 문명에 적응하지 못하다가 죽고 만다. 이것과 비슷한 많은 사례 등이 결국 타잔이나 모글리는 소설 속에나 가능함을 증명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학생 시절 미분을 배우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배우고, 인간에게는 혈액형이 있다는 것을 배우고, 우리 조상이 조선이란 나라를 세웠다는 것을 배우고, 컴퓨터 사용법을 배우고, 세계에 얼마나 많은 나라가 있는지를 배운다.


그런데 만약 오직 혼자서라면 이런 지식들을 알아낼 수 있을까? 미분방정식을 생각해 낸 천재 뉴턴이나 지구가 둥글다고 한 코페르니쿠스나 인간의 혈액형을 발견한 라인 슈타이너나, 우리에게 한국 역사를 가르쳐 준 국사 선생님은 과연 그런 지식들을 혼자서 알아낼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특히 뉴턴은 스스로 그것에 대해 자각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만약 내가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에 가능했다.
(If I have seen farther, it is by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


내가 무엇인가를 알아냈다면, 그것은 이미 오랜 시간 쌓인 과거의 지식을 통해 이뤄냈다는, 아주 겸손한 표현이다. 살아생전 오만하기로 하늘을 찔렀던 그가 한 말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어 보인다.


아이큐가 200이 넘는 사람이라고 해도 원시시대에 태어났다면 평생 동안 잘해야 좋은 돌도끼를 만들려면 어떤 돌을 골라야 할지 정도 알아내고 죽었을 것이다. 현대에 태어났더라도 늘 내전에 휩싸인 그런 환경이라서 어려서부터 책 대신 총을 손에 쥐어야 했다면, 적탄에 맞아서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이 천재라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죽고 말았을 것이다.


내가 지금처럼 살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인간사회에, 그것도 꽤나 괜찮은 사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히 잘난 존재이지만, ‘나라서’ 잘난 것이 아니라 ‘우리이기에’ 잘났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아주 자주 잊는다. 아니, 대부분은 처음부터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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