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350년 전쯤 한 수학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피에르 드 페르마(Pierre de Fermat)였고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라는 악명 높은 문제 하나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심지어 그는 문제에 대한 주석으로 ‘나는 경이적인 방법으로 이 이 정리를 증명했다. 그러나 이 책의 여백이 너무 좁아서 여기 옮기지는 않겠다’,라고 적어 놨다!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그 어려운 문제를 증명했으나, 단지 종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 과정을 기록해놓지 않았다는 뜻이다. 둘 중 하나이다. 그의 말처럼 정말로 증명을 했거나 아니면 그냥 허세를 부린 것이다. 죽은 자를 되살릴 수 없으니 지금도 그 진위는 밝힐 방법은 없다.
그 후 수많은 수학자들이 이 정리를 증명하기 위해서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실패의 경험들이 수백 년에 걸쳐 쌓여가는 만큼 그 악명도 높아갔다. 그러다가 드디어 1994년도 영국의 수학자 앤드루 존 와일즈(Andrew Wiles)가 증명을 해냄으로써 수학계의 미제사건 하나가 사라지게 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아마도 그때 증명이 되지 않았다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도 2000년도에 결정된 수학계의 7대 난제 중 하나로 포함되어서 결국 8대 난제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페르마는 아마도 무엇인가를 했겠지만, 그 결과만 적어 놓고는 과정을 설명해두지 않았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
상상을 하나 해보자. 200년 전쯤 세상으로부터 배신감을 느끼고 숲 속에서 들어간 천재 과학자가 한 명 있었다. 그는 홀로 연구를 거듭한 끝에 20년 만에 꿈의 장치라고 부를 수 있는 ‘반중력 비행장치’를 만들었다. 그리고 첫 실험 비행을 하던 날 그는 중력의 힘을 반대로 이용해 정말로 새처럼 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도중 균형을 잡아주는 장치에 문제가 생겨서 결국 추락하고 말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떨어진 위치가 그의 연구소였고, 지붕을 뚫고 들어 온 그의 몸의 충돌로 인해 촛불이 쓰러졌고, 운 나쁘게 옆에 있던 종이에 불이 옮겨 붙게 되었다. 그 사고로 인해 우리가 이름도 모르는 그 과학자는 그 즉시 추락사를 했고, 그의 연구결과도 결국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페르마가 증명했다고 주장한 메모나, 상상 속에서 반중력 장치를 개발한 과학자나, 아무리 대단한 의미를 가졌어도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다. 후대에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페르마는 문제 자체라도 남겼지만, 운이 나쁜 과학자는 연구결과와 자신이 연구를 했었다는 기록조차 남기지 못해서 우리가 아예 모르고 있다. 그것은 과연 존재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지식은 후대로 전달될 때만 유일하게 의미가 생겨난다. 그래서 인류의 문명 발달의 근원은 바로 선대의 지식이 후대로 계승되는 과정이다. 그렇게 해서 수천 년의 시간이 누적된 결과물이 바로 오늘날의 문명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느냐 여부와 상관없이 역사 속에서 쌓인 수많은 지식들을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런데 아주 흥미롭게도 그것을 이해하는 순간부터 그 지식들은 온전히 내 것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수천 년에 걸쳐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에 의해 층층이 쌓인 지식들이 ‘내가 단지 좋은 머리로 이해했다는’ 이유로 내 것이 되는 것이다. 그 후 그 지식을 이용해 무엇인가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면 당연히 그 지식도 ‘내 것’이 된다. 사실 그것만큼 확실한 내 것도 없다.
한글에 능숙해지면 ‘글 쓰는 능력’은 내 것이 된다. 돈을 주고 뭔가를 사면 그것은 그 즉시 ‘내 것’이 된다. 옥수수 씨앗을 심어 옥수수를 키우면 그것은 '내 것'이 된다.
“그럼 내 것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게 내 것이 아니면 대체 누구 건데요?”
당연한 비판이다. 누구나 인정할만한 보편타당한 논리이다. 질문처럼 그런 것들이 내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 것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들이 정말로 내 것인지에 대해서는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필요는 있다. 왜냐하면 생각만큼 ‘무엇인가가 내 것이라고 믿는 것이’ 날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기에 그렇다.
한글은 다들 알다시피 세종대왕님이 만들었다. 그 후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백성들 사이에 쓰이다가 20세기 들어서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의 문자가 되었다. 나는 한글이란 문자를 만드는 것에 뭔가를 보탠 적도 없고, 내가 쓰는 모든 단어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딱히 수고를 더한 적도 없다. 그저 나는 학교에서, 책에서, 대화에서 한글이 사용법을 배웠다. 그런데 내가 그 한글로 글을 쓰는 순간부터 ‘내 것’이 된다.
돈을 주고 사는 제품들 중에서 비싸기로는 집만 한 것도 없을 것이다. 보통 수 억에서 수십 억이 오간다. 그래서 집은 우리가 가진 것들 중에서 가장 ‘내 것’이라고 느끼는 것들 중 하나이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그 집을 지은 땅은 과연 내 것일까? 나는 누구에게 그 권한을 위임받은 것일까? 물론 국가에서 보증을 해준다. 하지만 국가는 처음에 어디로부터 그 권한을 받아 온 것일까? 지구와 계약이라고 한 것일까? 아니면 자연계 전체와 대화를 통해 협정을 맺은 것일까?
집을 지을 때 썼던 시멘트나 철근, 집을 짓는 동안 이용된 수많은 중장 비을 운용하는데 쓰인 석유 등도 다 마찬가지다. 우리 인간들은 집을 짓는 동안 들어간 모든 자재들을 돈을 들여서 생산해냈다는 이유로 당연히 우리들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사람의 노동력이 들어갔으니 그 부분만큼은 확실히 인간의 소유권을 주장할만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우리 몸을 움직일 에너지 자체가 어디에서 왔을까? 스스로 생산해 낸 것일까?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가 먹고 있는 음식에서 왔다.
내 텃밭에 심은 옥수수는 내가 땅을 고르고, 거름을 주고, 정성스럽게 심었으니 거기에 옥수수가 열리면 당연히 내 것이 된다. 하지만 진짜로 옥수수를 키운 것은 내가 아닌 태양이다. 그리고 물과 땅에 살고 있는 보이지도 않는 박테리아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엔 내가 온전히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단 하나라도 존재할까?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만들어 주신 분부터 내 부모님이고, 물리적으로 나를 구성하는 물질들은 이 우주에 이미 존재했던 원자들의 결합인데 말이다.
물론 이런 말들을 들으면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딱히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냥 나에게 그것들을 쓸 권리가 있다면 내 것이지, 뭘 그리 쓸데없는 생각을 하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짜증이 나서 네가 가진 모든 것들이 네 것이 아니라고 해도 너는 순순히 수긍할 수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결국 내가, 우리 인간이 그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지구 상에서 제일 잘나고 똑똑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 모든 것들은 그저 승자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가까운 미래에 외계인들이 쳐들어와서 자신들이 힘이 더 강하니 이 지구는 우리가 접수하겠다고 하면 우리는 과연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까? “넹! 당연히 그러셔야죠.”,라고 할까?
그 모든 것을 떠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내 것이 될 수 있다고 믿고, 그것을 추구하는 삶이 과연 나를 얼마 큼이나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우리는 이쯤에서 법정스님이 남기고 가신 『무소유』에 대한 화두를 다시 한번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