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찬우 Sep 05. 2021

우리가 뭔데?

“어떻게 하면 집에 도둑이 들어오지 않게 할 수 있을까요?” 질문이 뜬금없지만 한번 생각해보자.


제일 흔하게 떠오르는 아이디어는 바로 아주 강력한 보안장치를 하는 방법이다. 단순하게는 많은 열쇠를 달아 두는 방법이 있고, 조금 복잡하게 하면 CCTV와 같은 것들을 달아서 실시간으로 감시를 하는 방법도 있다. 


두 번째로 선택되는 아이디어는 바로 강력한 사회적 안전장치를 하는 방법이다. 경찰을 많이 뽑고, 빈틈없이 CCTV를 달아 두고, 도둑이 잡혔을 경우 강력하게 처벌하면 된다. 그러면 도둑들이 무서워서 도둑질을 그만두게 될 것이다. 실제로 요즘 CCTV와 자동차 블랙박스가 워낙 많이 설치되어서 좀도둑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세 번째는, 원래는 존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집에 도둑질을 올만한 사람들과 모두 잘 알고 지내는 방법이다. 도둑이 철면피가 아닌 다음에야 도둑질하다가 걸렸을 때 당할 수 있는 인간관계의 단절의 위험을 무릅쓰고 내 집에 도둑질을 하러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효과는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은 마을 단위의 삶을 살았던 조선시대에나 가능했다. 지금은 ‘내 집에 도둑질을 올 만한 사람들’이 이 세상 사람 전체이다. 어떻게 다 알고 지내겠는가?


네 번째 선택은 누구도 도둑질을 하고 살지 않을 만큼 풍족해지는 것이다. 아주 특별한 취미생활로 도둑질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 도둑들은 먹고살기 위해서 그런 짓을 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꼭 도둑질을 하지 않고 살아도 될 만큼 충분히 돈을 준다면 힘들고 귀찮아서라도 도둑질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원래 야밤에 남의 담을 넘어서 남의 집을 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걸렸을 때 감당해야 할 위험도 너무 크고, 심지어 따로 수당도 없는 야근 노동자이다.


이 방법들 중에서 요즘은 첫 번째랑 두 번째 방법인 집에 강력한 보안장치를 하고 강력한 처벌로써 도둑을 막는 방법이 선호되고 있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효과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가장 이상적인 방법을 꼽으라면 바로 네 번째이다. 아무도 도둑질을 할 필요가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효과는 가장 좋을 것이다.


예전에 ‘눈이 마주쳐서’ 죽였거나 ‘너무 행복해 보여서’ 죽였다고 한 아주 황당한 ‘묻지 마 살인사건’들이 일어났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누구나 “미친놈들, 정말 세상이 말세다, 말세야”,라고 하겠지만, 사람이 너무 불행하게 되면, 그리고 그 원인을 남 탓으로 하게 되면, 정말로 밑도 끝도 없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결국 그 피해의식이 살해 동기가 된 것이다.


순간적으로 충동에 휩싸여서 그런 미친 짓들을 한 것이다. 집 안이 아닌 밖에서 일어나는 이런 강력한 범죄들은 도대체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집이 아니라 밖이라서 자물쇠를 달수도 없고, CCTV를 달고 다닐 수도 없다.


그나마 범인이 잡히면 강력한 처벌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살인 사건은 일어난 후이다. 이미 내가 칼에 찔려서 죽은 후에 살인자를 처벌해봐야 무슨 소용이 되겠는가? 그나만 범인을 강력하게 처벌하면 억울함은 조금 풀리겠지만, 이미 나는 죽었고 내 가족은 나를 잃은 상황에는 변함이 없다.


결국 거리에서 묻지 마 살인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바로 네 번째뿐이다. 다들 먹고살만하게는 해줘야 그런 삐뚤어진 피해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최소화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요즘도 여전히 좀 더 강력한 경찰 행정력으로 그런 사건들을 막아 보려고 애쓰고 있다. 하지만 우린 심심치 않게 그런 살인사건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한 번쯤 생각해보자. 너무 이상적이라서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해도 결국 가장 좋은 해결책이 될 수밖에 없는 네 번째 해결책, ‘나’의 행복한 삶과 더불어 ‘우리’의 행복한 삶에 대해서 말이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제대로 된 담도 없이 살았기 때문에 내 집은 누구나 지나가다 들를 수 있었고, 그나마 안전한 보안장치라고 해봐야 숟가락을 꽂아 놓은 문고리가 전부였다. 내 집이긴 하지만 ‘우리 집’이었던 것이다.



그런 형태의 삶이 우리 조상들의 안전을 책임져줬다. 다들 서로 알고 지내고, 옆집에서 큰 소리가 나면 주변 사람들이 다 몰려왔기 때문에 범죄가 일어나가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안전하긴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아주 심각한 단점 하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생활’의 부재이다.


누구네 밥숟가락이 몇 개인지 다 알고 있을 만큼 서로 왕래가 많았던 우리의 조상들에게 있어서 사생활은 거의 없었다고 볼 수밖에 할 수 없다. 심지어 우리 조상들에겐 결혼 첫날밤에 창호지에 구멍을 내서 구경하는 그런 풍습조차 있었다.


꽤나 곤란한 상황이다. 도둑이 드는 것과 같은 불행을 막아주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매우 좋지만, 개인의 남다른 성생활과 같은 행복을 추구하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매우 불편한 것이 되고 만다.


현대 사회는 많이 안전해졌기 때문에 그리고 많이 풍족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안전함보다는 개인의 행복의 관점에서 다른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나를 불편하게 할 만한 ‘참견’은 가능하면 최소화시키고 이후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만’을 제공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내 것이고, 내가 이룩한 모든 것은 내 능력이고, 나를 보호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고, 나와 남과의 연결고리는 가능하면 최소화시키고, 내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내 집이나 내 마음에 들어오면 안 되고, 너는 오직 내 행복의 관점에서만 존재해야 한다.


너는 나와 함께 걸어가는 동등한 존재가 아니라, 내가 필요할 때 부르면 오고 내가 필요가 없을 때 가라고 하면 가는 부수적 존재이다. 내가 행복하려면 너는 그래야 한다. 그런 나를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너도 그렇게 살면 된다. 네가 설령 나에게 그렇게 대해도 나는 아무런 상처를 받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바야흐로 ‘우리’의 시대가 아니라, ‘나’의 시대이다.

작가의 이전글 당연히 내 거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