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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Sep 06. 2021

너도 그렇잖아?

‘우리의 시대’가 저물고, ‘나의 시대’가 밝아질수록 우리들 개인 하나하나는 점점 더 행복한 삶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들은 다 내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쓰는 데 있어서 불필요한 ‘남의 눈치’를 보는 일은 줄어들었고, 남의 불필요한 참견이나 오지랖을 떠는 일들은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능력도 익혔다.


지금 이 순간 새삼스럽게 생각해봐도 이해는커녕 화만 더 난다. 왜 내 능력으로 정당하게 번 돈을 쓰는데 남의 눈치를 봐야 하며, 그동안 왜 내가 선택한 삶에 대해서 개뿔도 모르는 타인이, 단지 나이가 좀 더 많다는 이유로 “이렇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거지”, 라면서 나에게 꼰대 짓을 하는 것을 허용했단 말인가?


이제 나는 그런 참견을 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더 이상 전체의 의견에 따라야 하는 존재가 아니며 그저 나는 나로서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내가 살고 싶은 방식으로 살면 된다.


여기까지는 아주 좋다. 그런데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내가 내 삶을 내 것이라고 믿게 될수록 나는 이제 내 삶을 홀로 책임져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된다.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결정하면서 내가 불행할 수 있는 일도 혼자 감당해야 한다. ‘우리’에서 벗어난 ‘내’가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불안한 현실이다.


누군가 들으면 “그건 당연한 것 아닌가요?”,라고 말을 할 것이다. 그렇다. 이제는 그것이 너무도 당연해서 그것을 부작용이라고 부르거나 문제라고 인식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요즘 아이들 놀이터를 가보면 아이들은 뛰어놀고 있고, 그들의 부모들 중 한 명이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꽤나 익숙한 광경이다. 아이들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기 때문에 아이들의 부모들은 눈앞에서 놀고 있는 아이조차도 한시도 눈을 떼면 안 된다.


하지만 우리가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한참 전 과거에 부모들은 아이들이 하루 종일 밖에 나가 있어도 별 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실 일이 많아서 그럴만한 시간도 없었다.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아이들이 놀다가 우연히 마주친 동네 어른들이 그들이 모두 누구네 집 자식인지를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이들의 부모들이 자신들의 아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으면 동네 사람들 중 아무나 붙잡고 몇 번 반복해서 물어가면 결국 한 시간쯤 전에 그들을 본 사람이 반드시 나타났다. 그래서 아이들이 그때 강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는지, 밤을 따러 산에 올라갔는지, 누구네 집에 모여서 딱지치기를 하고 있었는지 언제든 알 수 있었다.


덕분에 아이가 밖에 나가서 하루 종일 보이질 않아도 ‘불안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아이가 10분만 눈에 보이질 않아서 부모들은 가슴이 철렁하는 커다란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 부모들의 반응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그것은 내가 나인 지금의 세상에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과거 내가 우리들 중 일부였던 세상에서는 꼭 당연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나로서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새롭게 감당하게 된 것들일 뿐이다.


원래 내 삶을 온전히 책임진다는 것은 꽤나 매력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숨겨진 의미는 생각보다 많이 무겁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생각보다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자신의 삶을 홀로 감당하는 일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아니, 처음부터 아예 불가능하다.


사실상 혼자서는 구구단조차 생각해내지 못하는 우리가 어떻게 평생 동안 자신의 삶을 홀로 책임질 수 있겠는가? 우리가 아무리 그렇게 산다고 믿더라도 그 한계는 명확하다.


우리는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들 각자가 매일 이만큼이나 살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 모두도 뉴턴처럼 거인의 등에 타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거인의 등은 단지 과거로부터 전해온 지식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과정 속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들이 다 사실상 거인이 된다.


그러니까 내 삶 그 자체가 바로 인류라는 거대한 거인의 등에 타고 있는 과정이다.


내가 매일 먹는 채소나 과일은 햇살과 물 그리고 땅이 품은 영양분, 거기에 이름 모를 그 누군가의 노동력이 더해진 결과이다. 나는 돈을 지불함으로써 그것을 먹을 권리가 생겨난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내가 지불하는 만큼의 돈을 주면 나는 과연 그것들을 재배할 수 있을까?


내가 매일 쓰는 스마트폰은 어떨까? 누군가 나에게 백만 원을 주면 나 홀로 그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하다못해 우리는 흔히 쓰는 검은 비닐봉지조차 10억을 줘도 혼자서는 만들어 낼 수 없다.


석유가 있는 위치를 발견하고, 땅을 깊게 파서 석유를 뽑아내고, 그것을 충분히 정제하고, 그 과정에서 나오는 원료를 아주 얇게 펼쳐서 비닐을 만들고, 그 봉투 모양대로 잘라야 할 것이다. 사실상 평생 동안 해도 그것과 똑같이 만들기는 아예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50원이란 돈을 지불하면서 비닐에 대한 타당한 권리를 얻는다. 덕분에 수천 년간 쌓인 지식을 통해 만들어진 수많은 기계들과 그것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노동자들의 힘을 통해 만들어진 ‘검은 비닐’은 조금만 더러워져도 아무런 아쉬움이 없이 비닐 재활용품으로 묶어서 버릴 수 있게 되었다.


“그게 뭐가 문제죠? 그 기계들을 만든 사람들이나, 일을 한 노동자들 모두 돈을 받았잖아요. 처음부터 나를 위해서 만든 것도 아닌데 내가 왜 그것들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죠?”


맞는 말이다. 내가 그렇듯 그들도 모두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그런 제품들을 만들었다.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무거운 짐을 나르고 있는 택배 노동자들도 결코 나를 위해서 배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자신의 돈을 벌기 위해서 그런 힘듦을 감당하고 있다.


높은 산을 오르는 도중 만나게 되는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작은 벤치도 근처 관할 시나 군에서 돈을 주고 사람을 시켜 자재를 하나씩 등에 지고 등산로를 따라 걸어서 올라 온 결과물들이지, 결코 산을 오르느라 지치고 힘든 나를 위해서 따로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니다.


가을이면 황금빛 들판을 물드는 벼들은 비록 사람이 심었지만 그들 자신은 그저 자신의 후손을 남기기 위해 씨앗을 맺었을 뿐이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욕심이 많아서 일 년 만에 한 알의 씨앗에 수백 개의 새로운 씨앗들이 생겨난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다 그렇다. 다 각자 자신만의 목적으로 존재한다. 거기엔 나를 생각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모두 나에게 거인의 등이 되어 준다. 그들이 나에게 타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아무 말 없이 올라 타도 기꺼이 자리를 내어 준다.


그 거인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서 나 혼자서는 절대로 이동할 수 없는 속도로 앞으로 갈 수 있게 해 주고, 나 혼자서는 절대로 올라갈 수 없는 높은 위치에서 삶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런데 처음에만 신기할 뿐,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내가 거인의 등에 타고 있음 자체를 까맣게 잊는다.


내가 그것에 대해 잊는 순간 가질 수 있는 것들은 ‘당연함’과 ‘불만’이고, 그 순간 내가 잃어버리는 것들은 바로 ‘감사함’과 ‘상대방에 대한 이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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