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내가 가지고 싶은 것들이 ‘나의 권리’라고 믿으면 믿을수록 그것에 대한 강한 집착과 소유욕을 느끼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욕망 자체를 나쁘다는 식으로 표현하지만, 사실 욕망은 아무런 죄가 없다. 오히려 욕망이 없는 사람이 더 문제가 될 지경이다. 욕망은 삶의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우리를 열심히 살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니 욕망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훨씬 낫다.
나쁜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욕망 자체가 아니라, 욕망에 사로잡혀서 괴물이 되거나, 어떤 욕망을 실현할 능력이 부족한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점점 찌그러지는 것이다. 그나마 욕망의 괴물이 되면 그 욕망을 실현할 수나 있어서 낫다. 하지만 능력 부족으로 인한 실망으로 인해 세상에 대한 피해의식과 자괴감이 가득 찬 모습으로 변하는 것에서 어떤 좋은 점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 처음부터 내가 가진 욕망이 실현되지 않을 때 왜 그런 감정들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냉정히 따져서 무엇인가를 갖고 싶은 마음은 갖지 못하게 되면 그냥 사라지면 되는 것이 아닐까?
길을 가다가 아이가 맛나 보이는 빵을 먹고 싶은 장면을 보고 ‘나도 저 빵을 먹고 싶다’,라고 느꼈을 때 결국 그 빵을 먹지 못하더라도 딱히 불편한 감정을 느끼지는 않는다. 누가 그런 일로 인해서 우울해지기까지 할까?
하지만 그 빵이 내가 방금 빵집에서 사려고 했지만 그 아이가 바로 내 앞에서 마지막으로 사간 것이라면 전혀 다른 감정이 밀려온다. 화가 날 수도 있고, 짜증이 날 수도 있다. 그 아이가 밉다. 내가 먹고 싶었던 욕망의 크기에 저 빵은 내 빵이 되었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해지면서 저 아이가 ‘내 빵’을 빼앗아 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니 심한 경우 우울해질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욕망을 품은 무엇인가를 내가 가지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가정하게 되면 그것을 갖지 못하는 상황은 반드시 불만으로 이어진다. 그런 감정들이 오랜 시간 층층이 쌓이면 결국 세상에 대한 피해의식과 자신에 대한 실망감으로 인한 자괴감으로 번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 대한 말씀은 두 가지 면에서 생각을 해봐야 한다. 하나는 가진 것들을 지켜야 하는 걱정과 근심이다. 또 하나는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불만이다. 가져도 문제, 갖지 못해도 문제인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한 번쯤 우리가 평소에 가지고 싶어 하는 것들 중에서 정말로 반드시 가져야 하는지 여부에 대해서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지금 이 순간엔 그것을 절대적으로 반드시 가져야 한다고 믿고 있지만,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 만약 그런 것들만 없앨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런 것들 중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제일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대상이 바로 ‘행복’ 그 자체이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불필요하게 가지려고 하는 마음을 없애려고 하는데, 그 첫 번째 문제가 바로 ‘행복’이라는 뜻이다.
처음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이니 그것을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무척 이상한 일이고, 지금껏 수많은 사람들이 책을 통해서, 강연을 통해서 ‘당신은 행복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줬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우리나라 헌법에도 ‘국민이 행복할 권리’에 대해서 떡하니 명시되어 있다.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절반만 맞는다. 우리나라 헌법에 행복할 권리에 대해서 나오긴 하지만, 정확히 따지면 ‘행복할 권리’가 아니라, ‘행복을 추구할 권리’이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우리나라 헌법 10조이다. 사실 모든 국민이 행복할 권리를 갖게 되면 국가는 금세 무너질 것이다. 어떤 국가가 국민 전체를 모두 다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누구나 행복한 삶이 자신이 반드시 누려야 할 권리라고 믿는다.
그나마 거기까지는 좋다. 행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 테니까. 그런데 만약 노력을 했다고 해도 결국 행복하지 못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이의 빵을 먹고 싶었지만 먹지 못해도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는 것처럼 원래 행복하고 싶었지만 행복하지 못한 것은 그냥 결국 행복하지 못한 것으로 끝나야 한다. 하지만 그 빵은 반드시 내가 사야 했다고 믿는 순간부터 생겨난 권리의식은 내가 ‘행복하지 못한 것’을 ‘불행한 것’과 동급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주말에 집에 가만히 있으면 그냥 심심하거나 약간 지루한 채로 끝나야 하는데, 일요일 저녁이 되면 불현듯 ‘내 삶은 도대체 왜 이렇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우울해지고 만다. 행복하지 않은 자신과 달리 매우 행복한 삶을 사는 듯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 그냥 부러움 정도로 끝나야 하는데 자신의 행복하지 못한 삶에 대한 비관과 피해의식으로 이어진다.
배가 고픈데 뭔가를 먹고 있는 사람을 보면 그냥 부럽고 만다. 하지만 내가 딱히 먹을 것이 없어서 콩나물 국을 먹고 있는데 나하고는 달리 아주 비싼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활짝 웃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갑자기 속에서 뭔가가 치민다.
많이들 착각하지만, 그 순간 우리는 그들의 스테이크가 부러운 것은 아니다. 그들이 느끼고 있을 행복에 질투가 나고 상대적으로 불행한 내 처지가 우울해지는 것이다. 만약 내가 맨 밥을 간장에 찍어 먹고 있다고 해도 충분히 행복하다면 아무리 비싼 음식을 먹는 광경을 봐도 그냥 그 음식 자체만 부러울 뿐 질투심을 느끼지는 않는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처음부터 질투심은 그 사람이 가진 물건들에 대한 것이 아니다. 언제나 그 사람이 느낄 것이라고 믿고 있는 행복을 향하고 있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저렇게 돈이 많은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저런 것을 먹고사는 사람은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의 환한 미소를 보면서 나도 저런 좋은 집, 많은 돈, 비싼 음식만 가질 수 있다면 반드시 행복해질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얻기가 쉽지가 않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오직 그것만을 목표로 한 채 살아가게 된다. 그러다가 보면 어느 날 처음에 내가 그들이 누린 행복을 부러워했음을 까맣게 잊고, 좋은 집, 많은 돈, 비싼 음식 그 자체가 삶의 목표가 되어 버린다.
그것을 추구하는 동안 많이 힘들어서 불행해졌기 때문에,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지 못하면 분노와 절망감에 사로잡혀서 견딜 수가 없게 된다. '얼마나 힘들게 노력했는데 나에게는 왜 주어지지 않을까?', 라는 불만이 생기면서 삶이 본격적으로 불행해지고 만다. 내가 노력한 만큼 행복은 반드시 주어져야 할 정당한 권리이다.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가 처음에 진짜로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많은 돈이었을까? 아니면 행복이었을까?
“그렇다면 행복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지 말라는 뜻인가요?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당신은 이미 행복하니 그런 듣기 좋은 소리나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불행해서 정말로 행복하고 싶다고요.”
그래, 충분히 따질 만하다. 당신이 행복하고 싶어 해도 된다. 단지 적어도 그것이 당신의 권리라고는 생각지 않는 것이 당신을 위해서 좋다. 만약 그 권리의식이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준다면 오히려 더 하라고 말하겠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당신을 더 불행하게 만든다. 사실 지금 당신이 불행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 권리의식만 없었다면 당신은 그냥 '행복하지 않은 사람'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불행해져 버렸다.
원래 욕망과 권리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야 한다. 무엇인가를 갖고 싶다는 생각과 왜 나는 저것을 반드시 그것을 가져야 할 권리가 하나로 묶여야 할까?
우리가 느끼는 반드시 지켜져야 할 권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내 생존의 권리’는 갑자기 죽을병에 걸리거나 강도가 내 머리에 총을 대고 돈 달라고 소리칠 때 어떻게 될까? 그때가 되어도 생존은 내 권리이니 나는 꼭 살아야 한다고 답할까? 아니다. 정말로 그때가 되면 제발 살려만 달라고 울부짖게 된다.
살고 싶다는 욕망과 살아야 할 권리는 원래 전혀 다른 것이다.
그 귀한 생명의 권리조차도 죽음의 순간 앞에서는 금세 사라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데, 우리가 욕망하고 있는 그 수많은 것들에 대한 권리는 과연 얼마나 유효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