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그리스도교 봉사자를 만나다 ①
연합은 소중하다... 연합이 없으면 기독교인이 다 뿔뿔이 흩어지니까
나는 친구의 전도로 교회에 처음 나갔다. 사실 우리 엄마와 외할머니는 원래 교회를 다녔었다. 그러나 아빠는 교회에 가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와 아빠가 결혼한 뒤, 자연스레 우리 집은 교회에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유치원 때부터 알던 친구가 나를 전도해서 나는 한 번 교회에 갔다. 기억에 남는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연극을 하고 있었다. 예수님과 마귀가 힘 자랑하던 인형극으로, 귀신 인형이 갑자기 확 튀어나오는 연극이었다. 문제는 내가 너무 무서워했던 거? 교회에 대한 첫 번째 기억은 놀라서 운 기억이다. 이후 내가 이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친구와도 교회와도 멀어졌다. 나는 중국으로 이사한 상태였다. 어렸을 때 혼자 교회를 다니는 모습이 안 좋아서 그런지, 엄마랑 같이 교회를 몇 번 다니다가 소원해졌다.
사실 엄마도 나를 통해 다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꾸준히 교회에 간 것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다. 중학교 1학년 때, 나는 성가대를 시작했다. 중등부와 고등부에서 계속 성가대와 중창단을 맡았다. 특히, 중창단에서 리더를 맡으며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아이들을 연습시키고 그랬다. 기악팀에서 보컬로 섬기다가 한국에서 찬양 팀으로 들어왔다. 찬양으로 꾸준히 교회에서 봉사했고 무엇보다 내 역할이 생겨서 확실히 교회에 꾸준히 간 것 같다.
중등부 첫날부터 나는 찬양 팀에 들어갔다. 연습 시간에 많이 놀았다. 주일 8시에 만나서 9시에 연습하고 9시 반에 예배에서 찬양하다 10시 반에 예배 끝나면 분반 모임을 했다. 성가대 위주로 살았던 것 같다. 이때, 나는 중국 국제학교 한국인 여학생들이 유난히 파를 나누며 지내 적응하기 힘들었다. 학교에서 힘들었던 탓인지 교회가 더 좋고 적응이 더 잘 되었다. 특히, 선배들이 잘해주었다. 동아리처럼 학교에서 할 수 없었던 친교 활동을 교회에서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교회에서 했었던 크리스마스 칸타타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어떻게 보면, 나는 본질적인 고민을 최근 들어서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나는 작년부터 올해 초까지 대학 찬양팀에 있었다. 대학 찬양팀을 하면서 교목님 설교도 듣고 여러 가지 사회적 이슈를 접할 수 있었다. 최근 대학 사회에 있었던 여러 가지 사회적 논란을 접하면서 나는 민감함에 대해 생각했다. 예를 들어 동성애나 페미니즘 이슈 같은 것들. 이러한 주제들은, 제대로 알지 않은 채 관심만 두기엔 위험한 분야라 나는 정리했다. 그래서 내가 섣부르게 살짝 발을 담갔다가 너무 위험하게 어긋날 수 있다고 느꼈다. 제대로 공부하기 전까지 개입할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답답한 부분은 많았다. 전체적으로 단체 내에서 우리한테까지 침묵을 요구한 게 조금 그랬다. 나는 성경을 먼저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차적으로 성경을 기반으로, 하나님과 나의 기도 사이에서 신앙이 이루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S대 기독학생 연합에서는 전담팀이나 기구를 설치하며 대응한다고 했다. 사회적 문제에 전담 TF를 꾸려서 기독교인들이 조금 더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두도록 만들었다. 관련 기구는 논란에 대해서 생각하고 깊이 공부할 수 있는 자리를 일차적으로 마련했다. 그리고 전담팀은 대학 기독학생 대표자 회의에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전체 구성원의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나는 이러한 활동의 취지가 너무 좋다.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 다 같이 공부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한 건 현명한 일이다. 학생 사회의 기독교 활동이 비활성화된 상황에서 분열된 모습은 학생 사회를 더 위축되게 할 뿐이다.
성가대도 하고 단과대 기도 모임 대표도 맡고 연세대학교 기독인 학생 연합(이하 연기연)에서 서기도 맡으면서 느끼는 것이 좀 있다. 나를 세우기 위해 주님이 보내주셨던 것 같다. 나는 내가 왜 기도모임과 단체에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고민한 적이 있다. 지금도 지쳐 무딘 마음도 있지만, 여전히 봉사에 대해 생각한다. 다른 사람은 왜 하냐며 물어보는 자리를 내가 왜 하고 있을까 생각했다. 되게 자만하게 들릴 수 있지만, 누군가는 있어야 하는 위치들이다. 누군가는 있어야 하는 위치에 그 누군가가 나였던 것 같다. 단과대 기도모임도 내가 없으면 할 사람이 없던 상황이었다. 연기연에서도 임원이 없던 상황이었다. 필요한 자리에 하나님이 날 부르셨다고 생각한다.
봉사하면서 지치는 일도 많았다. 사람들한테 실망도 많이 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위로도 많이 해주셨다. 주위에 있던 가까운 지인이 나를 위해 기도할 때, 그렇게 강하게 느꼈다. 한번은 봉사하면서 인간관계로 너무 힘든 적이 있었다. 너무 힘들어서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고민할 정도였다. 너무 지쳐있던 상황에 지인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데, 지인의 모습으로 하나님이 위로하신다는 느낌이었다. 내가 나의 하나님 말고도 지인의 하나님도 알아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상처도 받고 치유도 받으면서 봉사를 한 것 같다.
내가 연기연 서기를 맡을 때, 연기연 대표가 나를 전국 기독학생 연합(전국 기연네트워크, 이하 전기연)에 데리고 갔다. 그 때, 내가 전기연 부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전기연 임원들이 다 졸업해서 내가 지금 회장을 맡았다. 전기연에서 가장 신기했던 것은 다양한 대학들의 기독교인 연합 모임 소식이었다. 교목실이 없는 학교도 있고 기연(대학 기독 학생 연합) 자체가 안 세워진 학교도 있고 세워졌다가 무너진 학교도 있고 이제야 다시 만드는 학교도 있었다. E대는 사람이 없어서 대학원생이 대표를 한 사례였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M대였다. M대 기독학생 연합은 교목실과 지역 교회와 연계가 잘 된 사례였다. 기독 학생 연합 동아리 방과 교목실 사무실, 지역교회 사무실이 다 한 층에 있는 구조라 서로 연계하기 편한 구조였다. 지역교회에서 선교 후원을 받기도 하고 확실히 연계가 잘 되었다. 정말 대학마다 분위기가 달랐다. 전기연 수련회는 참석자가 다 대표라 숨 좀 놓는 느낌이 강하다. 수련회에서 각 대학 중보기도도 같이해주고 서로 이야기 나누는 게 인상 깊었다. 연합 자체가 없으면 기독교인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니까 뭔가 소중한 것 같았다.
[글/인터뷰] 김도헌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신학과 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