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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국루터란아워 Jan 21. 2020

정연서가 떠올리는 교회의 모습은, 구성원 사이의 유대감

청년 그리스도교 봉사자를 만나다 ③

어렸을 적부터 교회에서 봉사했던 내가 떠올리는 교회의 모습


19/10/19 정연서 씨(오른쪽)의 작업실이 위치한 인천 부평에서 식사를 나누며. 그는 과거 다녔던 교회를 떠올리며 교회 공동체에 남아있는 이유로 공동체 안의 유대관계를 꼽았다.




지금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은 안식년을 가시고, 후임으로 새로운 목사님이 오셨다. 이전 목사님은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주의였는데, 이번 목사님은 그렇지 않았다. 그전에는 규모가 작아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서로 부담도 많이 없고, 진짜 뜻이 있는 사람들과 같이 (모임을) 세워온 거여서 잘 굴러온 것 같았다. 지금은 규모가 많이 커진 것 때문에 사람이 부족해서인지 도움을 요청하는 설교가 많아졌다. 공동체 안에서의 봉사와 헌신 이런 거.


축구 하러 간다거나 교회 전체단위로 수련회를 한다면 빠지지 않고 교회에 가곤 했다. 지금은 교회 봉사는 아무것도 안 한다. 유치부 같은 곳에서 교사로 봉사하지 않겠냐고 물어오면 바로 "No!"로 대답한다. 서울에 오기 전에는 광명에 있는 교회에 갔다. 아버지가 그 교회에서 계속 목사님으로 계셔서, 스무 살 되기까지 청소년부에서 쭉 봉사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찬양 간사를 맡으면서 교회를 옮겼다. 그 해에 아버지가 그 교회를 관둔 일도 있었다.


그의 작업실. 그는 현재 학업을 잠시 중단하고 본인이 좋아하는 음악을 만든다. 특히, 어렸을 적에 교회에 있는 악기를 체험하며 자신의 아쉬움을 풀었던 과거를 인터뷰에서 회상했다.


(아버지가) 교회 초창기부터 계셨는데, 교회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무엇보다 아버지는 미국에 선교를 가려 했다. 교회에 변화를 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런데 트럼프 정부의 이민 정책으로 아버지는 이민이 거부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가 사역 아닌 사역을 나에게 몰아주었다. 나는 돈도 벌고 좋아하는 찬양 사역도 하니 좋다고 생각하여 스무 살에 1월부터 6월까지 사역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하는 것들이 일로 여겨지고 재미도 없었다. 예를 들어, 내가 담당 전도사로 있던 곳에 음악을 관장하던 지휘자 집사님이 계셨다. 그분은 교회 음악에 대한 자신만의 뚜렷한 확신이 있던 분으로, 내가 재즈풍으로 음악을 바꾸면 그걸 술집에서 나온 악마의 음악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좋은 사람들이었던 것 같은데 잘 안 맞아서 나는 사역 아닌 사역을 관두었다. 그리고 전에 다니던 교회에 가자니 집에서 너무 멀고, 구성원도 바뀌어 편안한 느낌도 안 나서 그냥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어머니, 아버지는 이민을 준비하다 심사에 떨어져서 마땅히 갈 곳(교회)이 없었다. 그래서 부모님은 우선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우리 형은 교회에서 목회자 자녀라는 눈치를 세게 받다가 스무 살이 되자마자 그 교회를 박차고 다른 곳으로 나갔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그 뒤로 나와 내 동생에게 목회자 자녀라는 눈치를 주지 않았다. “목사 아들이 그러면 안되지!” 이런 것들. 내가 목사가 아닌데, 목사에게 들이대는 잣대를 나한테도 똑같이 들이대는 모습이 좀 그랬다. 가뜩이나 기독교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도 안 좋은데, 목사 아들이어서 사람들이 더 안 좋아하면 어쩌나 걱정한 적도 있었다.



내가 교회에서 봉사했던 이유: 같이하는 사람들


나는 교회 가는 것을 좋아했다. 사람들도 있고 악기 치는 것도 좋아하니까. 교회에 가면 나에게는 악기 치는 일밖에 없었다. 신앙적인 이유로 교회에 다니는 것도 있지만, 악기 치는 것도 큰 것 같다. 그 안에 친구들도 있고 공동체도 있었다. 많지는 않았지만 20명 정도 있었던 것 같다. 아동부 때는 50명 정도 있었는데, 들어오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까 자라면서 입시 때문에 인원이 많이 빠졌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찬양 팀이었다. 피아노 말고 드럼을 맡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봉사를 맡아서 별로 피곤하지 않았다. 아침에 세수하는 게 힘든 일이 아니듯 원래 하는 일이라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 체력이 좋아서 금방 지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일은 잘 빼는 스타일이라 조절을 잘했던 것도 있다.


그렇지만 목사 아들이라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한번은 청소년부 회장이 된 적이 있었다. 청소년부 전도사님이 친구 초청 잔치 준비를 부탁했었는데 난 하기 싫었다. 나는 연말에 아무도 자원하지 않은 임원을 뽑는 자리에 앉아 있다가, 간곡한 도움 요청과 추천으로 지목되어 회장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나는 하기 싫었는데 꾸역꾸역 일을 많이 했다. 무엇보다 일하는데 사람이 없어서 힘들었다. 그리고 같이 봉사하는 전도사님들 중에서도, 솔직히 전문가로 못 느낄 때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많은 전도사님을 보면서 자라 와서 그런 것 같다.


교회 안에서 악기 쪽으로 봉사를 맡았다. 주일마다 드럼을 쳤다. 가끔 피아노 치는 누나가 펑크를 내면 내가 들어가 메꾸고 청년부 선생님이 드럼을 펑크내면 내가 메꿔주면서 봉사했다. 우리 교회는 중등부와 고등부가 사람이 없어서 통합된 경우였다. 그래서 중1 때부터 중고등부 예배에서 드럼을 쳤다. 기타를 치며 찬양을 인도하는 형이 내가 중학교 1학년일 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내가 중3 되던 해에 그 형이 재수하면서 봉사를 쉬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까지는 피아노 치는 누나랑 드럼인 내가 ‘뚱땅’거리면서 반주를 맡았다. 고1이 되니까 전도사님이 나에게 찬양 인도를 시켰다. 나는 어릴 때부터 찬양 인도가 멋있는 것 같아서 하고 싶었다. 되게 열심히 했다.


내 드럼 자리를 채워야 하니까 중1 한 명을 데려왔다. “드럼 치는 거 좋아하니” 물으니까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그 친구에게 드럼을 가르쳐줬다. 또, 이왕 하는 거 풀 밴드로 하고 싶었다. 청년부에서 베이스 기타를 치는 형에게 내 동생 진우를 데려가서 한 달 동안 베이스 기타 치는 법을 가르쳐주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바로 반주를 시켰다. 또 음치이면서 박치인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에게 “일렉 기타를 치고 싶지 않니” 물어보니까, “멋있는 것 같아요, 형” 그랬다. 나는 일렉 기타를 칠 줄도 몰랐지만, 바로 혼자 연습하며 알아내어 그 친구를 가르쳐주고 찬양도 많이 들으면서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가 먼저 공부하고 알려주는 구조로 열심히 찬양 팀에서 봉사했다. 전도사님은 먹을 것들을 사주시면서 잘한다 칭찬하셨다. 물론, 연습을 너무 시켜서 친구들이 힘들어하긴 했다.


고등학생인 나는 음악이 하고 싶었다. 그런데 중형 규모였던 교회가 무리한 건물 증축으로 힘들었던 시기였다. 아버지는 뒷바라지해주실 처지가 안 되셔서 내가 음악 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셨다. 나는 어찌 보면 교회에서 아쉬움을 푼 것도 있다. 그리고 스스로 찬양 인도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 사역을 그만두면서 깨달은 건데, 나는 찬양 인도를 같이하는 사람들이랑 시간을 내면서 하나하나 만들어 가는 게 좋았던 거지 찬양 인도 자체를 좋아하던 게 아니었다.



교회 다니는 '나'를 정직하게 말하기


10대 때, 교회에는 감정적으로 훅 다가오는 것이 있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만큼 여러분을 사랑하세요.”라는 말처럼, 예수의 고난에 감정을 이입하거나 비슷한 것들. 이것을 200번 들으니까 그 내용이 마음에 와닿았었다. 그런데 감정적으로 할 만큼 하니까, 어느 날 내가 교회에 가는 강한 동기 중의 하나였던 감정이 사라졌다. 요즘은 더 깊은, 초월적인 의미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그냥 교회를 다닌다. 안 다니면 뭔가 가슴 속에 찝찝한 기분이 있고, 아무튼 지금은 좀 그렇다. 물론, 예수에 대한 연민도 있고 감탄과 놀람도 있다. 조건 없는 사랑을 내가 평소에 묵상으로 되새김질을 안 해서 이런 것일 수도 있다. 또, 교회에 가면 성경에 나오는 감동과 신앙심이 꿈틀댄다. 그러나 지금은 습관성 신앙에 가깝다. 교회 밖으로 나가면 교회의 영향력이 사라지고, 무엇보다 나는 교회가 환경이 되어주기에 계속 다니는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계속 다니고, 가족들이랑 다녀서 그런지 교회 안에 가족 같은 분들도 많았다. 나에게 의미 있는 분들이 교회 안에 많았다. 애틋하고, 내 교회 느낌도 나고. 교회가 날 키웠다. 나는 교회가 어려웠을 때부터 교회랑 같이 성장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의 사례금으로 가족을 부양하기가 어려운 걸 교회 사람들이 다 알아서 먹을 것들도 막 나눠주시고 그랬다. “똑똑똑, 안녕하세요! 명절인데 목사님, 이거 한 번 가족들이랑 드셔보세요.” 그러시면 감사하면서 맛있게 받아먹고 그랬다. 교회에 그런 분들이 적지 않았다. 교회에 오면 잘 환영해 주시고. 그런데 교회가 바뀌어 버리니까 구성원도 달라서 그런지 이전처럼 교회에 대한 정감이 가지 않는다. 물론, 내가 어린아이 같은 느낌도 있다. 그리고 지금 교회는 나눔을 하면서 친해지는 중이어서 그렇다. 솔직히 교회에 가서 가만히 말씀 듣고, “아멘”하면서 예배드리고 나오는 것밖에 없어서 그런 것도 있다.


확실히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이랑 뭐든 간에 주고받는 것이 큰 것 같다. 그 안에서 서로 경험이든 마음이든 같이 주고받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서서히 쌓은 신앙생활과 이야기들이 중요한 것 같다. 중고등부 시절에 그런 게 많았다. 11시 반에 예배드리고, 김밥 시켜서 다같이 밥을 먹다가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하고, 이후에는 커피를 마시거나 성경 공부를 했다. 일처럼 하는 것들이 별로 없었다. 예배 시간도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 외에는 큰 부담이 없었다. 상식이 통하는 교회였다. 점심시간 전에 예배를 드리고 그 다음에 자율적으로 모임을 하거나 가족들이랑 시간을 보내도록 두는 것이 좋은 것 같다. 교회 안에 사람들을 붙잡아두는 곳들이 있는데, 뭘 그렇게나 하려는 지 잘 모르겠다.


[글/인터뷰] 김도헌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신학과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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