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꿈에 대한 이야기
번역가 황석희 님의 책 <번역 : 황석희>의 프롤로그에서 발견한 문장이다.
말씀을 그대로 빌려오자면,
사실 우리는 누구나 번역가거든요.
상대의 말은 물론, 표정과 기분을 읽어내 각자의 언어로 이해하는 것도 번역이고
콧속에 들어온 차끈한 아침 공기로 겨울이 오고 있음을 깨닫는 것도 일종의 번역이죠.
그 과정에서 때론 오역을 하기도 하고 과한 의역을 하기도 해요.
스물아홉 살 즈음,
기억도 가물 가물해서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선배 중 한 사람이었던 아무개로부터 들은 말이 있다.
"사회생활을 하려면 3가지 '치'가 필요하거든. 바로 눈치, 염치, 재치라는 거야"
그 당시 나는 재치는 그다지 없었지만 눈치와 염치는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는데,
상대가 무엇을 원하고 또 불편해하는지 금세 감지했고,
상사의 의도를 빨리 이해하고 상황에 맞게 움직일 줄도 알았다.
또 함부로 선을 넘지 않고 내 몫을 다하려는 태도는 타인으로부터 신뢰를 얻기도 했다.
게다가 두 번이나 회사 설립 초기 멤버로 합류하면서 자연스럽게 오너와 가까이서 호흡할 기회가 많았는데
모시는 상사뿐만 아니라 외부 이해관계자들의 의중을 읽어내어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주로 해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나의 섬세한 감각과 빠른 판단력, 직관적인 시선을 신뢰받아 주요 논의에도 함께 했다.
아주 감사한 기회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그 시간 동안 피로를 느끼기도 했다.
타인의 말과 행동을 분석하고 그들의 표정을 살피느라 정작 내 기분은 뒷전인 삶의 연속이었고
좋게 표현해서 섬세한 감각이지 어느 순간 '눈치를 보는 일'이 마치 내 업무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과거의 나는 그런 나의 감각을 썩 좋아하지 않았는데,
'예민하다, 유별나다, 까다롭다'라는 말을 듣는 일이 잦아서 나의 섬세한 면모를 단점으로만 여겼다.
'얼렁뚱땅, 그냥 무던한 사람이 되어야 해, 유별나게 굴지 마!' 하면서.
여담이지만, 눈치를 볼 줄 아는 능력이라면 능력인 이 감각이 언제부터 생긴 건지 좀 궁금해졌다.
그동안 눈칫밥을 먹고 산 인생도 아닌데, 왜 나는 눈치를 볼 줄 아는 능력이 생긴 거지? 하는 단순한 궁금증!
그래서 GPT한테 물었다.
(환각 현상이 심해서 그럴싸한 거짓 답변을 내놓는 GPT한테 신뢰가 많이 떨어진 상태지만, 한번 물어봤다)
눈치를 잘 본다는 것은 꼭 어린 시절에 가정해서 눈칫밥을 먹으며 생긴 것만은 아님.
어떤 사람은 원래부터 주변 환경의 변화나 미묘한 분위기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음 = 기질적 특성
주변 사람들과 원만히 지내려면 상대의 기분을 살피는 습관이 생기기 마련인데
가족, 친구, 학교, 직장에서 분위기를 먼저 살피면 일이 수월하다는 걸 체득하면서 자연스럽게 습득했을지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소속과 안전을 원하므로 관계에서 위험을 줄이고 싶다는 자연스러운 생존 전략임.
뭐 이런 답변! 믿거나 말거나.
HSP(Highly Sensitive Person).
매우 예민하고 감각적 자극이나 감정적 반응에 깊이 반응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심리학적 용어다.
오감이 매우 예민해 미세한 소리, 냄새, 분위기 등 외부 자극에 남들보다 깊이 반응하는 사람이라나.
그동안 이런 용어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최근에 알고 보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나예요!" 하며, 너도 나도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어요!" 하고 반가워한다.
우리들의 이런 섬세한 감각이 결코 나만의 유별남이 아님을 알게 되어 왠지 모르게 안도하는 것 같다.
이제는 내가 이 감각의 덕을 많이 봤다는 것을 잘 안다.
황석희 번역가님 말씀대로 때로는 오역을, 또 가끔은 과한 의역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타인의 언어를 번역하는 일이 나에게 큰 어려움이 아니라는 건 엄청난 강점일 것이다.
사실 나에게는 몇 가지 꿈이 있는데
100억 부자가 되어야지, 한강뷰 아파트에 살아야지 이런 목표 말고 -
첫째, 독서를 통해 사색할 시간을 충분히 가지며 사는 것.
둘째, 누군가를 겨누는 총이나 칼날이 없는, 사려 깊은 글을 쓰며 사는 것.
그리고 셋째,
사람에게 좋은 질문을 던지는 인터뷰어이자, 여러 목소리를 공정하게 담아내는 모더레이터로 살아보는 것.
(내가 생각하는 모더레이터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흐름을 읽고 연결하는 역할을 맡는 사람인데, 대화 흐름이 치우치거나 과열되지 않도록 조율하는 능력, 겉으로 드러나는 말뿐 아니라 행간의 의도와 감정을 읽어내는 섬세함, 질문을 통해 상대가 스스로 생각을 풀어낼 수 있도록 돕는 성향, 재치와 유연함, 그리고 참여자들이 안심하고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 줄 아는 능력! 이 모든 것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꿈은 지금도 여전하고
언젠가 기회가 왔을 때 바로 알아볼 수 있는 혜안을 기르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임을 안다.
나를 형용하던 단어들 - 꼼꼼하다, 세심하다, 신중하다 - 의 가치를 새삼 깨닫는 요즘인데
하지만 이런 단어들을 핑계 삼아 타인의 마음을 파헤치려 든다거나 하지는 않을 것을 다짐한다.
누군가의 진심 어린 목소리를 듣고 싶을 때 앞세울 것은 내 감각보다 '사려 깊은 태도'일 테니까.
사실 우리는 누구나 번역가거든요.
- 네 그러네요, 저는 진작 번역가의 삶을 살고 있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