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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나 Apr 24. 2018

기다림과 휴식 사이

<이민 일기 #11> 구직 끝에 다시 한걸음

미국에서 오래 사신 교포 분께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처음 미국 공항에 도착했을 때 누가 마중 나오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평생 직업이 달라진다고. 세탁소에서 일하는 지인이 마중 나오면 세탁소에서, 델리 가게에서 일하는 지인이 찾아오면 델리 가게에서 일하게 될 확률이 크다는 말이다. 그만큼 이국 땅에서 처음 꿰는 단추가 중요하다는 말도 될 것이고, 직업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말도 될 것이다. 그리고 힘들어도 성실히 꾸준히 한 업종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말도 되리라. 실제로 그 교포 분은 세탁소를 오랜 세월 동안 성실히 운영해 오신 분이었다.


이민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 아파트에 있는 코인 세탁기에서 빨래를 돌리는데, 어느 한국 여자분을 만나게 되었다. 한국 사람임을 알고는 반가워 인사를 나누는데, 나에게 문득 "여기서 일을 하실 거면 네일 일을 하게 될 거예요." 하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다른 직업보다 비교적 손쉽게, 기술이 없어도 배우면서 시작할 수 있는 일이기에, 또 그만큼 수요가 많기에 그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듣는 내 기분은 썩 좋지는 않았다. 추천도 아니고 추측도 아니고 넌 그 일을 하게 될 거야 하는 단정적인 어조로 들렸기 때문이다. 누구나 경험과 재능과 기술이 다름에도, 다들 그렇게 하기 때문에 너도 그렇게 될 거라는 말로 들려서 난 속으로 중얼거렸다. 보란 듯이 난 다른 일을 할 거야 하면서. 실제로 많은 한인 여자분들이 특히 처음 이민을 와서 네일 가게에서 많이 일한다고 한다. 육체적 고단함이 따르긴 하지만, 기술에 따라 대우받고, 현금으로 바로 받으며 팁도 챙겨 받는 매력도 여기에 한몫 더하리라.

   

아무튼 난 그 예언(?) 같은 말에 항거라도 하듯, 네일 가게 등의 구직은 그냥 지나쳤다. 손재주도 없었고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그리고는 나를 흔쾌히 오라 해 준 한인 여행사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비행기 표를 알아보고, 전화로 고객과 상담하는 일은 나름대로 보람도 있었고 적성에도 부합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재정에 늘 허덕이던 신생 여행사는 사장의 허망한 짓으로 급작스럽게 문을 닫게 되고, 나는 또다시 일을 찾아 나섰다. 약 7개월 간의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일을 하면서 더욱 실감했던 것은, '영어'에 대한 갈증이었다. 항공사와 통화하면서도 내 짧은 영어로 얼마나 답답하였던가. 영어권 손님 앞에서 얼마나 긴장을 했던가. 영어만 잘하면 기회의 문은 더욱 많이 열릴 것 같았다. 실제로 사무직 구인광고들은 영어와 한국어 둘 다 유창하게 잘하는 이중언어 구사자를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비록 지금 내 실력으로는 언감생심일지라도 부딪쳐서 해보고 싶었다. 내 발전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중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어시스턴트를 뽑는다는 광고를 보고는 용감하게 지원해 보았다. 그리고는 면접까지 보게 되었다. 나를 인터뷰한 변호사도 신사적으로 보였고, 조용한 분위기의 사무실도 마음에 들었다. 고객들은 한국 사람들이 많지만, 업무를 진행해야 하는 곳들은 다 미국 공공기관들이기에 영어가 많이 요구되는 곳이었다. 다행히 영어 인터뷰는 보지 않았고, 그분도 내게 호감을 가지고 인터뷰를 해 주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희망을 가지고 결과를 기다려 보았지만, 결국 연락은 다시 오지 않았다.   


그리고 교회 집사님을 통해 또 다른 곳에서 면접을 보게 되었다. 미국 의료보험 관련 회사였고, 사무실도 미국 사람들과 같이 쓰면서 한인 고객들을 주로 상대하는 곳이었다. 그분도 긍정적으로 인터뷰를 해 주었고, 자신이 출장을 갔다가 다시 연락을 주신다고 해서 이번엔 더욱 희망을 가지고 기다렸다. 그런데 웬걸, 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아서 답답한 마음에 내가 먼저 연락도 해 보았지만, 또 좀 더 기다려 달라는 말을 듣고는 이곳도 아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은행에 텔러로 지원하여 면접도 보았지만, 기다림 끝에 합격 통지는 받지 못했다.    



이처럼 여러 기다림들을 겪으면서 내 마음도 지쳐갔다. 아예 처음부터 아니라고 분명히 말을 해 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될 것처럼 이야기하고는 계속 기다리게 했던 부질없는 희망의 말들이 야속하기도 했다. 기다림에 애타는 희망고문들... 아마 그 사이 그들도 더 나은 적임자를 찾느라 그렇게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결국은 그 일에 내가 적임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영어도 부족하고 새로 일을 시작하기에 나이도 많다는 단점들을 덮으려고 무조건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섞인 말로 인터뷰에 응했던 것 같아 낯 뜨겁고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돌아보면 그때 바로 직이 안 된 것이 내겐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내 인생에서 소중했던 순간들은 다른 곳에 있었으니 말이다. 일을 하다가 쉬게 되니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더욱 소중하고 내게도 쉼이 되었다. 유모차를 끌고 공원을 산책하고 호수 길을 거닐며 뉴욕의 가을과 겨울, 봄이 오고 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영주권이 나왔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는 크게 감사했으며, 국민연금을 수령한 돈으로 중고차도 한 대 구매하며 아이와 함께 이곳저곳 다닐 수 있는 기동력도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영어에 대한 부담감을 덜고자 퀸즈 칼리지에서 일반인 대상으로 하는 영어 과목 중 Writing 수업을 수강할 수 있었고, 다른 교회에서 하는 '마미 앤 미'(mommy & me)도 등록하여 아이와 더 시간을 보내며 아이를 양육하는 내 태도도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시아버님이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에도 두 달간 다녀오게 되었다. 시댁과 친정을 오가며 부모님을 위로해 드리고, 가족의 따뜻한 울타리 속에 나 또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뉴욕. 내게 뜻하지 않게 취직 제안이 찾아왔다. 처음 근무했던 여행사에서 함께 동고동락했던 친구가 내게 다른 여행사를 추천해 준 것이었다. 그 여행사는 이곳에서 이름이 알려진, 비교적 큰 규모의 여행사였고, 투어 버스도 구비하여 현지 뉴욕 투어 등도 활발히 진행하고 있는 곳이었다. 신생 여행사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하던 시절과는 또 다를 것 같았고, 배울 수 있는 든든한 상사가 있다는 점에도 끌려서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게 찾아도 구해지지 않던 직장이, 이번엔 제 발로 나를 찾아왔다. 처음 어설프나마 배운 업무가 어느덧 경력직이 되어 더 쉽게 옮길 수 있는 발판이 된 것이었다. 이래서 정말 처음 종사한 업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싶기도 했다. 그래도 감사한 마음이 앞섰다. 나를 추천해 주고 또 나를 받아주는 곳이 있다는 것에. 근 6개월간을 푹 쉬고 새로운 에너지로 충전하고 난 기분이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여행사를 향해, 또 한 걸음 내딛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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