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은 머금고 가는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뿐
우리 집에 놀러 온 친구가
자기 단발머리에 안성맞춤일 것 같다며
작은 집게핀을 달라고 했다.
그것은 헤어에센스를 사면
사은품으로 딸려 나오던 제품이었다.
머리숱 많은 긴머리인 나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어
늘 서랍 속에 있던 물건.
그런데 나는
그 질문에 너무나 당황해서
두 눈이 갈 길을 잃었고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친구가
“아, 선물 받은 거야?”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 찰나,
눌러두었던 감정이
목구멍까지
짜릿하게 치고 올라왔다.
엄마는 늘 그랬다.
어디를 다녀오거나,
사은품으로라도 집게핀이 딸려 오면
그걸 꼭 나에게 주었다.
공감 어린 말로
나를 대하지는 않았지만,
엄마는 자신의 방식으로
머리핀을 건네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두 가지를 알았다.
나는 지독하게도
내 방식으로는 사랑받지 못했지만,
엄마는 분명
자기 방식대로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받은 사랑이 넘쳐난다고
느끼지 못하는 나는
머리핀 하나도
선뜻 건네지 못하는
결핍투성이라는 것.
이제는
엄마가 엄마대로 해도 된다는 걸 알고,
이 부분에 대해서도
꽤 많은 감정 정화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핍의 딱지가
완전히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딱지를 붙이고 있는
나 자신이 이제는
창피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 딱지까지도
나라고 느꼈다.
언젠가 정말로
그 딱지가 떨어져 나간다 해도
그건
또 그때의 내가 될 뿐이겠지.
나는 그동안은
결핍을 빨리 지워내야 한다며
나를 보채왔고,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애써왔던 것 같다.
왜 그렇게
그 아이를 창피해하고,
수치스러워하고,
미워했는지 모르겠다.
내 상황과
내 기질과
내 성향이 맞물렸을 때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도 있었을 뿐인데.
충분히
아팠던 것의
자국일 뿐인데..
결핍을 부정하는 것이
내가 단단해 보이는 거라고
착각해왔던 것 같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도
비슷할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결핍의 딱지가
더 이상
수치스러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추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세상으로
조금씩 변해가길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