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는 매일 안 껴도 향수는 매일 뿌립니다
한 때 여행 가면 꼭 사 오는 것 중 하나가 향수였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주변의 사람들보다 향수가 좀 많은 편이라는 걸 깨달은 후로는 좀 자제하고 있고, 또 향수도 옷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많아도 결국 손 가는 건 정해져 있는 것 같아서 취향이 크게 변하지 않는 한 일단 한 병이라도 다 뿌릴 때까지 기다리자, 고 스스로 인내심 테스트 중이다. 나는 정말 왜 이렇게 사고 싶은 게 많을까... 향수 칸을 가만히 보다가 내 향수 취향에 대해서 써볼까 싶어졌다.
일단 취향을 얘기하기에 앞서 나의 첫 향수에 대한 기억부터 적어본다. 나의 첫 향수는, 유학 갈 학교 견학을 끝내고 귀국하던 비행기에서 아빠께서 선물로 구매해 주신 Dior - I love Dior이었다.
Top Notes : Magnolia, Freesia, Madarin Orange, Bitter Orange, Orange
Heart Notes : Lily of the Valley, Honeysuckle, Black Currant, Raspberry, Lily, Rose, Pear
Base Notes : Musk, Cedar, Amber
새삼스레 노트를 찾아보니 확실히 내가 좋아하는 향수의 상징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노트에 은방울꽃, 백합, 네롤리, 오렌지 블라썸, 머스크가 들어가는 향수는 지금도 굉장히 좋아해서 한 번 씩이라도 시향을 꼭 하는 편이다. 후에 떠난 유학길에도 이 향수는 챙겨갔고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너무 오래되어 변색/변향이 되어 결국 버릴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니 병이라도 갖고 있을걸 그랬나 싶다. 2002년 출시될 때부터 한정판으로 나왔던지라 단종된 지가 오래.
아이러브디올 다음에 아빠께서 사주신 또 다른 향수로는 DKNY - Be Delicious 가 있었다.
Top Notes : Cucumber, Grapefruit, Magnolia
Heart Notes : Green Apple, Lily of the Valley, Tuberose, Rose, Violet
Base Notes : Sandal Wood, Amber
내가 한창 DKNY라는 브랜드를 좋아해서 사 오셨던 향수였는데 (핑크색인 Fresh Blossom 이 같이 들어있는 세트였다) 시원 상쾌한 향이라 더운 날에 가끔 뿌렸던 기억이 있다. 이후 오이 들어간 노트를 볼 때면 어느 정도 시원함은 보장된 향이겠구나 하는 감이 생기게 해 준 향수이기도 하다. 놀랍게도 이 오리지널 그린애플은 현재까지도 판매된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DKNY 향수 시향해볼 수 있는 곳이 있기나 한가... 다시 한번 향 맡아보고 싶은데 말이지.
미국 생활을 하며 처음으로 내가 직접 산 향수는 그 당시 정말 너무나도 유명했던 (찾아보니 2025년에 전 세계적으로 단종 됐다는데 생각보다 꽤 오래 유지됐구나 싶다) Bvlgari - Petits et Mamans이었다.
Top Notes : Brazilian Rosewood, Sicilian Orange, Bergamot
Heart Notes : Chamomile, Sunflower, Rose
Base Notes : Vanilla, Iris, White Peach
음... 파우더리 향수들도 안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으로서는 '저건 꼭 사야 돼'는 아닌 것 같다. 아무튼 당시 기숙사 옆방을 쓰던 언니가 이 향수를 가지고 있었는데, 시향 해봤다가 너무 좋아서 언니에게 물어보고 손민수 했던 기억이 있다. 언니는 사진의 40ml를 가지고 있었고 나는 10ml였나 12ml였나 미니어처 사이즈로 구매했던 기억이... 향 못지않게 패키지도 귀여워서 참 좋아했더랬다. 지금도 로즈우드가 들어간 향 제품은 좋아하는 편인데, 향수로는 잘 구입하지 않는 것 같다. 다만 룸 스프레이나 핸드크림으로는 곧잘 사는 편 (ex. 플르부아 - 로즈우드 핸드크림 좋아함)
이후로도 구매한 유명한 향수들이 몇 있었지만 (디올 - 쟈도르, 미스 디올 블루밍 부케, 샤넬 - 샹스 등)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취향이라기보다는 대세를 따라 산 느낌이 든다. 이들 중 대다수는 지인들에게 나눔 하게 되었고 어느 정도 나도 내 취향이란 게 생기면서 눈앞에 족히 20병은 되어 보이는 향수들 중 꽤 오랜 시간 많이 애정하는 향수들 몇 개만 나열해 본다.
한 5년 사이에 벌써 3병째 구매한 최애 향수는 바로 Hermes - Le Jardin de Monsieur Li이다.
이 향수는 에르메스 뷰티 매장 우연히 지나가다가 향수들이 있어서 몇 가지 시향 해보고 므슈리가 너무나도 내 취향이라 처음엔 50ml로 두 번 구매했다가 흔치 않게 관통하는 향수라는 생각에 세 번째는 100ml 구매했고 최근에 개시했다. (몇 년 전 그리스 여행에서 귀국하면서 튀르키예를 경유했는데, 해당 공항 면세에서 한국에서보다 저렴하게 팔고 있길래 구매) 아쉽게도 에르메스 향수는 노트를 제대로 나눠서 설명해 주는 사이트를 찾기가 힘들어 공홈에서의 내용을 가져왔다.
Notes : Sambac Jasmine, Kumquat, Bergamot
참 신기하게도 난 신맛은 전혀 즐기지 못하는데 (오렌지 주스도 셔서 못 마시는... 레모나나 비타민C 메가도스는 말할 것도 없다) 향은 시트러스 계열을 참 좋아한다. 므슈리에 금귤이 들어가는지는 몰랐네..! 확실히 내가 좋아라 하는 오렌지 블라썸과 비슷한 결이라는 생각은 든다. 아무튼, 기분 전환에 이만한 향이 없다 싶을 정도로 현재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향수. 그리고 에르메스임에도 불구하고 브랜드 향수들 중 저렴한 편인 것도 구매하는 데에 부담도 덜하다.
다음으로는, 언젠가 면세점에서 구매한 뒤 너무 취향저격이라 잘 뿌리고 지내며 슬슬 재구매를 하고 싶은데 단종인 건지 뭔지 도저히 찾을 수 없어 직구를 해야 하나 고민하게 만드는 Jo Malone - Basil & Neroli 가 있다.
Top Note : Basil / Heart Note : Neroli / Basae Note : White Musk
일단 언제부턴가 네롤리가 들어갔다 하면 무조건 시향부터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조 말론의 바질 앤 네롤리는 기분 좋은 시원함과 과하지 않은 달달함의 조화가 정말 환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름 그대로 살짝 가벼운 향이라 봄 - 여름에 주로 뿌리고 저녁보단 낮 향수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크게 구분 지어가며 뿌리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저녁/밤에 어울리는 향수들이 취향이 아니기도 해서 그런 향수들이 없다는 게 제일 큰 이유.
그리고 사실 므슈리보다 먼저 최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마찬가지로 재구매까지 이어진 (어쩌면 20대의 내가 가장 좋아했던) 향수는 YSL - Parisienne이다.
Top Notes : Blackberry, Cranberry, Vinyl
Heart Notes : Damask Rose, Peony, Violet
Base Notes : Sandal Wood, Patchouli, Vetyver, Musk
파리지엔은 현재 내 취향에 비교하면 단향이 조금 과한 느낌이 있어 어느 순간부터는 잘 뿌리지 않게 되었는데 얄팍한 보틀이 마음에 들어서 버릴 생각은 딱히 없다. 이후 몽 파리까진 참 괜찮았는데 리브르 한 번 출시하더니 계속 리브르 스핀오프만 내는 입생로랑... 리브르 시리즈 개인적으로 너무 강해서 쉽게 정이 안간다.
아무튼 말이 최애지 사실 좋아하는 향수들에 대한 애정도는 비슷비슷한데, 일단 위 향수들은 재구매를 하거나 할 정도로 좋아하는 향들이라 특별 대우 해주었고, 그 외 언급을 안 하고 넘어가기 아쉬운, 굉장히 좋아라 하는 다른 향수들도 몇 개 리스트업 해본다.
Etat Libre d'Orange - You or Someone Like You
Ex Nihilo - Lust in Paradise
Diptyque - Olene
Aqua di Parma - Osmanthus
이 외에도 나쁘지 않게 뿌리고 있는 향수들이 꽤나 많고, 원데이 클래스로 내가 직접 만든 향수도 있다. 그리고 음 한 때 최애였지만 조금 순위 밖으로 밀려난 향수들로는 Tom Ford - Neroli Portofino / Dior - Dioramour / Buly - Fleur d'Orange, Heliotrope du Peru 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저 향수들이 싫다는 건 아니고, 좀 질렸다거나 현재 상황에서 재구매까진 아닌. 물론 선물을 해준다면 당연히 거절을 하지는 않을 향수들이고 언젠가 다시 마음이 바뀌어 내가 다시 구매 할 수도 있는, 말 그대로 순위권에서만 조금 밀려난 친구들이다.
반대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극찬하지만 내 취향과는 영 아니올시다인 향수 브랜드는 Frederic Malle, Le Labo, Aesop이다. 사실 나는 프레데릭 말의 Une Rose를 시향하고 샀었는데, 그날 꽤 여러 향수들을 시향 했지만 탁 와닿는게 윈 로즈와 엉 빠썽 (Un Passion) 뿐이었다. 후자는 선물하려고 샀고, 장미는 곧잘 종종 뿌리고 있다. 하지만 내가 프레데릭 말이 취향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알게 된 순간은 언젠가 포오레를 선물 받았을 때였다. 프레데릭 말의 시그니처라고도 할 수 있는 Portrait of Lady. 향수 좀 좋아한다 하는 사람들 중 이 향수 찬양하지 않는 사람 잘 못 봤는데, 나는 향알못이 맞는지 정말 취향이 아니었다... 받았을 땐 몰랐다가 나중에 개시했을 때 선물 주신 분께 좀 죄송했던 기억이 있다. 진짜 그래도 받았으니 열심히 뿌려야지, 하며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반 강제로 뿌리고 살던 중 언젠가 향 좋다고 자기도 사야겠다며 무슨 향수인지 물어본 지인에게 쓰라고 주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내 체취와 포오레가 잘 어우러지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싶고. 사람마다 맡는 향이 있으니 - 르라보와 이솝도 몇 가지 유명한 제품들 아무리 시향 해봐도 와닿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솝의 경우 선물하기 좋아서 종종 구매하는 브랜드이긴 하다.
셀프 탐구일지에도 썼듯이,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느 정도 허영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게 구매로 이어질 때도 있어서 늘 항상 경계하고 이게 정말 내가 갖고 싶은 게 맞는지에 대해 심사숙고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일단 현재 향수칸으로 지정한 선반은 꽉 찼기 때문에 뭐라도 다 뿌리고 비워지지 않는 이상 더 이상의 향수 쇼핑은 제-발 자제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