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nojmo, Sudeten German의 역사
성 니콜라스 교회(St. Nicolas Church)는 즈노이모의 랜드마크이다. 이 교회는 1103년에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한다. 절벽 위에 세워진 이 교회는 체코 종교의 역사만큼이나 복잡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체코는 유럽 국가 중 무신론자가 가장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통계에 따르면 약 30% 정도의 사람만이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공산정권 시절 유럽 어느 사회주의 국가보다 종교를 억압하고 종교적 색채를 지워 체코슬로바키아를 가장 사회주의 이념에 부합하는 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소련과 집권 공산정권의 노력에 의한 이념적 결과물이란 해석이 많다. 인근 폴란드보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고, 도시 중심의 공업이 일찍부터 발달했던 이유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코에는 마르틴 루터에 의한 본격적 종교개혁이 시작하기 100년 전에 얀 후스란 걸출한 인물의 등장과 함께 종교개혁이 시작된다. 이 교회도 1226년 가톨릭 주요 교구로 인정된 이래 계속되다가, 16세기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신교의 통제하에 들어간다. 그러나 1628년 맥시밀리언 황제의 명령으로 다시 예수회에 의해 가톨릭화 된다. 그 후, 17세기와 18 세기 들어 바로크식으로 개조된다.
즈노이모 성에서 보는 성 니콜라스 교회의 풍경은 압도적이다. 이 풍경이 내가 7년 만에 다시 즈노이모를 찾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비가 오는 한적한 풍경은 지난 7년 전과는 또 다른 감흥을 준다.
우선 관광객이 없다. 지난번 줄지어 성곽을 따라 걷던 것과 달리 드문드문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오히려 반가울 정도이다.
나무 지붕에 톡톡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여유롭게 서두르지 않고 한껏 절경을 감상하는 즐거움이란... 비 오는 날에도 번거롭긴 하지만 여행을 할 이유는 충분히 많다. 그곳의 느낌을 좀 더 감성적으로 기억하게 해준다.
특히 나무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즈노이모의 풍경을 더욱 운치 있게 만들어 준다.
즈노이모는 포도와 오이로 유명한 지역이다. 즈노이모를 포함한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하고 있는 체코의 남부 모라비아 와인 재배 지역은 체코에서도 손꼽히는 질 좋은 와인을 생산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개인적으로 이 곳에서 나는 화이트 와인 중 Tramin Cerveny란 품종은 추천할 만하다. 체코 말로 dry를 뜻하는 suche란 말은 포도 품종과 함께 라벨에 쓰여 있어 선택에 도움을 준다. suche는 드라이한 와인이고 polo suche는 좀 덜 드라인 한 것, sladke는 단 맛이 강한 와인이다. polo는 half란 뜻으로 그 강도가 덜하단 뜻이다. pozdni sber는 늦게 수확한 포도로 만들었단 뜻이다. 체코산 와인엔 이런 맛의 강도를 단어뿐 아니라, 숫자로 표시한 와인도 종종 볼 수 있다. 가격 또한 체코에서 사는 체코 와인은 다른 나라 와인보다 훨씬 저렴하다. 와인가게에서도 100Kc(약 5,160원)을 넘지 않는 와인이 대부분이다. 아래 와인들은 250Kc 이상인 비교적 고급 와인이다. 체코 와인 페스티벌 Gold상을 받은 2015년 산 트라민 체르베니 화이트 와인과 프랑스 적포도주 품종인 카베르네 쇼비뇽 2013년 산 레드 와인이다. 남 모라비아 지방(발티체 근처)의 와인너리에서 생산되는 와인들이다. 오른쪽은 좀 더 저렴한 즈노이모 산 프란코프카 품종 레드와인.
즈노이모는 비엔나에서 83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방문하는 여행객에게 추천할 만한 곳이다. 또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아름다운 체코의 성인 레드니체(Lednice)와도 64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좋은 와인이 나는 레드니체 근처의 발티체(Valtice)성도 가볼만한 곳이다. 체코 남부지역(South Moravia)지역도 방문할 만한, 관광으로서의 충분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와인너리 방문 등과 시음을 위한 관광상품과 와인축제도 좋은 볼거리인데, 즈노이모에선 9월 말에 와인 페스티벌이 열린다고 광고를 하고 있었다.
남부 모라비아 지역에서 브르노(Brno) 다음으로 큰 도시인 즈노이모는 8세기부터 절벽에 성을 지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8~10세기 동안엔 보헤미아(채코 서부, 북부. 프라하가 중심인 지역) 지역에서부터 서 모라비아와 다뉴브강까지 이어지는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하였다. 1019년 체코 프레미슬왕조의 모라비아 점령 후, 즈노이모는 남 모라비아의 행정 중심지로 발전한다. 1222년엔 royal town으로 지정되어 요새와 성벽이 강화되었는데 지금까지도 일부가 남아 있다. 13세기에 이미 포장된 도로, 관개시설, 2개의 종합병원이 존재할 정도로 융성했던 도시였다. 1603년엔 스웨덴 Lennart Torstenson 장군에 의해 3일 동안 점령당하기도 한다.
그 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거쳐 20세기 들어 즈노이모는 가장 큰 변화들을 겪게 된다. 원래 즈노이모는 독일인의 주거지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1918년경 즈노이모의 인구 구조는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탄생으로 많은 체코인이 이주하여, 독일인과 체코인인의 비중이 거의 같아졌다고 한다. 두 민족은 서로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였지만, 비교적 조화롭게 합스부르크의 통치 아래 오랜 시간 동안 잘 살아왔다. 하지만, 1차 대전을 거치면서 민족주의가 부상하고, 체코 내 소수 민족이 된 독일인들은 오스트리아에 병합을 원하게 되지만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일부가 되고 만다.
이러한 상황은 체코 서부지역인 주데텐 독일인(Sudeten Germans)과 같은 운명을 가진다. 이들은 후에 모라비아, 실레시아, 보헤미아 지역의 독일인이 통합한 사회민주당을 만들기도 한다. 이 당은 주데텐 독일당의 뿌리가 되며, 후에 히틀러의 등장으로 Nazi당과 동질화되고 만다. 잘 알려져 있지만 2차 세계대전 직전 히틀러는 뮌헨조약(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간)을 통해 체코슬로바키아의 동의 없이 주데텐지방과 플젠지역의 슈코다 공장 등 주요 지역을 독일에 강제 편입시킨다. 이때 합의된 체코슬로바키아의 땅이 공화국 전체 면적의 38%나 되었으며, 365만의 인구에 달하였다고 한다. 약소국의 설움은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등 서방측은 히틀러의 말만 믿고 2차 세계대전을 막고자 체코를 독일에 양보했지만, 히틀러는 이듬해 폴란드를 침공하여 본격적인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11세기부터 조상들이 살던 땅에 뿌리내리게 된 독일인들은 정체성을 유지하며 보헤미아, 즈노이모 등 지역에 오랫동안 살아왔다. 원래 그들은 이방인이 아니었다.
단적인 예가 프라하에서 살았던 유명한 작가 카프카이다. Franz Kafka는 프라하 출신으로 독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유태인이었으며, 가족의 성은 체코의 성을 따르고 있다.
특히 주데텐 지역은 화학공업의 발달로 유리, 도자기, 섬유산업이 발달된 공업지역이었다. 1921년 경, 체코슬로바키아의 인구 분포는 체코인 660만 명, 독일인 320만 명, 슬로박인 2백만 명, 헝가리인 70만 명이었다고 하며, 당시 전체 인구의 약 23.4%의 인구가 독일어를 사용하는 독일계였던 것이다.
이런 인구분포였지만, 신생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토지관리법을 통해 독일인 지주의 땅을 체코인 농부들에게 나누어 주는 정책을 취한다. 이때 많은 독일인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도 하지만, 독일계를 대표하여 장관이 체코 정부에 등용되기도 하고, 정부를 구성하는 주요한 당으로 정치에 참여하기도 한다. 이들은 체코 슬로박 시민으로 점차 느끼고 살게 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의 광풍 속에 독일계 주민이 다수인 지역에서 체코인이 추방당하고 독일인이 그곳에 들어오게 되지만, 2차 대전의 종료와 함께 약 160만 명이 미국 지역(서독)에, 80만 명의 독일계 주민이 동독(소련 점령지)으로 추방당한다. 이 중에서 2만~20만 명에 달하는 독일계 주민이 폭력, 병, 굶주림, 자살 등으로 생을 마감한다.
2001년 조사에 따르면 39,106명에 달하는 사람이 체코 내 독일에 뿌리를 둔 사람들로 분류된다고 한다.
체코 정부는 전후에 체코의 독일인들이 독일 나치의 적극적 협력자들이며 당원인 이유로 추방한다고 했지만, 적극적으로 나치에 항거한 주데텐 독일인도 많았다고 확인되었다. 체코 정부는 2005년 이들에 대한 사과의 입장을 밝히기도 했지만, 현재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 거주하는 주데텐, 즈노이모 출신 독일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과 피해보상엔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11세기부터 살던 선조의 땅을 떠나야 했던 정치의 희생양이 된 독일계 주민이나 무력으로 자신의 땅을 침략한 나치에 동조했던 대다수 독일인들을 자기 땅에서 모두 몰아내고자 했던 체코인들이나 이념과 정치의 희생자일 뿐일지도 모른다. 과거 800년 넘게 조화롭게 살던 이웃들을 순식간에 등을 돌리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 시간 주요 뉴스에도 미얀마 소수민족 로힝야족 난민 문제가 계속 나오고 있다. 이런 소수민족에 대한 갈등과 반목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본성일까? 이념과 종교의 산물일까?
오히려, 정복했지만 피정복민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융화시킨 알렉산더대왕이나 칭기즈칸이 (때론 잔인했지만) 후세를 위해선 현명했던 위인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