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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비된 여행 Dec 05. 2017

뼈와 해골의 도시, 그러나 부유했던 도시

체코 쿠트나호라 여행기

세계적인 해골성당으로 알려진 세들레츠 납골당이 있는 작은 도시가 체코 쿠트나호라이다.

사실 세들레츠 성당은 따로 있고, 부속으로 지어진 납골당이 일명 '해골성당'으로 알려져 있는 세들레츠 납골당이다. 납골당 주변 공간엔 유럽의 흔한 묘 형태인 수많은 가족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보통 유럽엔 마을마다 (큰 도시엔 특정 장소에) 공동묘지 형태의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가족 공동묘가 일반적인 형태로 교회 주변에 만들어진 묘지도 있고, 규모가 큰 마을엔 별도 장소에 공동묘지가 있다. 

유럽의 공동묘지는 어느 마을에서나 흔하게 있는 것이라 혐오시설이라기보다 마을의 일부이다.

내가 체코 살던 시절에도 공동묘지가 집 가까이 있었는데, 전혀 어색할 것이 없었다. 오히려 주변에 주차공간이 더 많아 편리한 면도 있었다. 내가 살던 공동묘지 주변의 주택가는 그 도시에서도 고급 주택지구였다.

마을과 묘지, 또는 교회는 항상 주민의 삶과 함께 존재하는 공간이다.

죽음과 묘지를 생활 가까이 느끼고 살아가는 유럽의 마을이 우리나라의 신도시들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삶의 공간이라 느껴진다.

사람들이 쿠트나 호라를 찾는 이유가 세들레츠 납골당을 방문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내가 느낀 이 해골성당은 생각보다 훨씬 작았고, 해골과 뼈 장식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공간이었다. 목각공예 예술가가 만든 공간이라 예술적인 감흥이 많이 들어갔겠지만, 재료가 흔치 않은 죽은 인간의 일부로 만들어졌다는 생각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살면서 느끼기 힘든 색다른 느낌을 주는 공간이다.

무엇보다 나이가 들고 평균 수명만큼 살다가 죽은 사람들의 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에 좀 더 안타깝고 슬픈 감정이 느껴지는 곳이기도 하다.

이 곳을 장식하고 있는 뼈들은 체코에서 일어난 신교와 구교 간 종교전쟁 [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프라하 구시가 광장에 동상이 있음)의 이름을 딴 전쟁으로 불리기도 함]으로 숨진 사람들과 유럽을 휩쓸었던 대 전염병 페스트로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것이다.

이 납골당은 1511년 앞을 못 보는 수도사에 의해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계속 개조되었다. 지금의 모습은 1870년 체코의 목 공예가인 프란티섹 린트가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4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뼈로 장식된 이 공간은 상상을 초월하는 독특한 공간이다.

린트의 이름조차 뼈로 만들어져 있다.

쿠트나 호라는 해골성당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이 도시는 13세기 후반 은광맥의 발견으로 엄청나게 부유했던 도시였다. 14세기엔 매년 5톤 이상의 은을 채굴하면서 중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16세기부턴 은의 고갈로 지금은 작은 도시로 남게 되었다.

납골당 근처의 세들레츠 성당 외부
세들레츠 성당
세들레츠 성당 내부
실제 사제의 유골이 관에 모셔져 있다
해골 장식을 파는 기념품 가게
성 바바라 성당

부유했던 당시에 지은 화려한 건물이 바로 성 바바라 성당이다. 중부 유럽 어느 성당과 견주어도 밀리지 않을 규모와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 장식을 가지고 있다. 1380년에 짓기 시작했다는 이 곳은 해골성당에 못지않은 쿠트나 호라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은광 업자의 금전적 후원으로 지어진 교회답게 벽화나 조각이 은광 업과 관련된 것이 많다.

성 바바라 성당
성당 근처의 특이한 양식의 가옥

 별생각 없이 찾아갔던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성당에서 쿠트나호라에 대한 인식이 확 바뀌었다.

쿠트나호라는 해골과 뼈 만의 도시가 아니라 은의 반짝거림과 부유함을 간직하고 화려한 문화를 자랑했던 부유한 도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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