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그라나다

스페인의 마지막 이슬람 왕국

by 준비된 여행

그라나다는 알람브라 궁전이란 거대한 볼거리를 가진 중요한 관광지이다. 알람브라는 크기도 거대하거니와 너무 많은 방문객으로 인해 사전 예약이 필수적인 관광지이다. 우리는 이런 사전 예약의 불편함과 안달루시아 여행의 가장 중요한 역사 유적지라는 생각에 한국인 가이드를 동반한 하루짜리 여행 상품을 미리 신청해 놓은 상태였다.


우리가 묶었던 아파트먼트는 관광목적으론 최적의 위치에 있었으나, 주차가 아주 큰 부담이었다. 건물에 주차장이 있는 것으로 예약시 안내가 되어 아파트먼트의 요청대로 차를 받자마자 차번호를 알려주고 조치를 취했으나, 막상 도착하니 건물에 주차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좀 늦게 도착해서인지 가장 가까운 공용주차 자리가 없어 걸어서 15분 정도 떨어져 있는 공용주차장(우리가 묶었던 아파트먼트와 전혀 관련이 없는)에 주차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하루 24 EUR정도의 가격에 말이다. 암튼 사전에 알려준 것과는 다른 태도에 실망을 하였으나, (주인이 아닌 젊은 관리자가 자기는 약속된 바는 잘 모르겠다는 식의 태도로 우리를 맞았다.) 울며 겨자먹기로 위치가 좋다는 것에 위안을 삼기로 했다. 스페인은 지난 두 번의 여행에서도 느꼈지만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처럼 뭔가 기대했던대로 시스템이 잘 돌아가진 않는다. 전엔 스페인 국내선이 2시간 정도 지연되는 상황을 경험했었는데, 스페인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자주 경험해 보았다는 듯이... 항공사 측의 자세한 설명이 없는 무성의한 태도도 문제였다.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들은 주로 영어를 사용하는 외국인일 뿐 현지인들은 그다지 큰 불만이 없어 보였다. 서로 계속 잡담을 하는 등 별로 기분 나빠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들이 원래 여유로운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완벽한 일처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딜가나 주인과 종업원의 서비스에 대한 태도도 많이 다르다. 이번 여행에서 정말 만족할만한 서비스를 경험한 적은 단 2번 뿐이었다. 미하스(Mijas)의 레스토랑 직원과 말라가 백화점의 잡화코너 점원, 딱 2번...


주차하고 숙소까지 걸어 돌아오는 길에 찍은 그라나다 시내 야경, 여기도 X-mas

그라나다는 스페인에서도 손꼽히는 세계적 관광지이다.

코르도바의 번영했던 우마이야 왕조도 11세기 들어 30년 동안 칼리프가 6명이나 바뀌는 혼란을 거듭하며 결국 1,031년 망하고 만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따파이스 시대로 불리는 북쪽 사라고사에서 포르투갈 지방까지 여러 영주가 난립하는 알 안달루시아의 전국시대 펼쳐진다. 기독교도들의 국토 재정복에 항복하거나 북아프리카 베르베르인 술탄 유세프(그는 세비야의 알 무타미드의 구원 요청에 의해 기독교도를 격파하기 위해 스페인에 들어왔으나, 1091년 이슬람 영주들의 영토를 도리어 점령해 버린다.)의 침입에 영토를 빼앗기게 된다. 역사에서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아 성공한 사례는 역시 많지 않다. 이렇듯 지속되는 혼란기에 무어인 모하멧 1세(보압딜 왕)는 살아남아 그라나다의 나사르 왕국을 1231년 선포한다. 그라나다 왕국은 1492년 1월 가톨릭의 왕들에게 항복할 때까지 문화국으로서 부와 풍요를 누렸다. 250년간 유지된 이 도시에서 13~14세기에 걸쳐 완성된 알람브라 궁전은 그 당시 풍요롭던 아랍문화의 진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라나다 여행의 첫 시작은 시내에 위치한 까테드랄과 아랍의 전통이 남아 있는 조그만 시장 골목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작년에 이스탄불에서 본 바자르(전통시장)의 초초미니 형태라고나 할까?

그라나다 까테드랄
그라나다 까테드랄
사크로몬테 언덕에서 바라 본 알람브라 궁전의 모습

우리는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사크로몬테 언덕으로 택시를 타고 올라갔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그라나다는 택시비가 바르셀로나 등 다른 대도시에 비해 비싸지 않아 택시를 이용하는 편이 관광에 편리하다고 한다. 편도로 시내에 돌아다니는데 6~10유로 정도가 들었다.

사크라몬테(스페인어로 신성한 산이란 의미) 언덕은 지금도 집시가 많이 사는 지역이라고 하는데 동굴을 이용해 집을 지어 놓은 형태가 특이했다.

사크라몬테 언덕위의 집들
동굴 플라멩코로 유명한 사크라몬테 언덕의 집

예전 레콩끼스따 이후 이 지역에 집시촌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집시들의 한이 서린 춤이었던 플라멩코는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광상품이다. 세비야에서 보았던 플라멩코 공연은 매일 열렸는데 12세까지는 10유로, 어른은 17유로 정도였고, 19:30분과 21:00 두 차례에 걸쳐 공연이 이루어졌다. 보통 따블라오(판자를 깐다는 tablado에서 유래한 말)란 극장식 레스토랑에서 밤부터 새벽까지 공연한다. 공연은 미리 예약을 하는 것이 좋다. 마드리드에서 플라멩코로 가장 유명하다는 따블라오에서 새벽 1시까지 공연을 본 적이 있었는데, 새벽 2시가 넘어서야 모든 공연이 끝났다. 여긴 예약을 무려 6개월 전에 했던 기억이 있다. 문제는 관객들이 좁은 공간에서 담배를 계속해서 많이 피우므로 담배 냄새가 옷과 몸에 밴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겐 그다지 좋지 못한 환경이다. 너무 늦은 밤에 공연하므로 어른들끼리 가는 편이 좋다.


플라멩코 음악과 춤은 풍요롭고 다양한 문화의 결과물이다. 안달루시아 지역을 점령했던 무어인들은 아랍 음악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안달루시아에 남겨 놓았다. 물론 15세기 중엽부터 인더스강 상류의 펀잡 지역과 그 주변에서 스페인으로 넘어온 집시들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집시들은 인도 기원의 예술적인 요소를 가지고 왔고(난 인도의 발리우드 영화를 보면, 인도인들에게 춤과 음악이 얼마나 중요한 삶의 요소인지 느끼곤 한다.) 그들의 타고난 방랑 문화와 음악적 재능으로 플라멩코가 생겨났다. 우선 노래를 만들고 여기에 손과 발로 만들어내는 리듬을 더했다. 화려하고 즉흥적이며 기교적 성향의 집시음악은 무어족의 문화에 유태, 가톨릭 문화, 토착 음악이 융합하며 수백 년에 걸쳐 안달루시아의 음악으로 정착된다.


내가 경험한 체코인이나 슬로박인들은 ROMA PEOPLE(집시의 official한 명칭)을 극도로 혐오했다. 교육을 거부하며 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많이 낳아 사회보장의 혜택을 무료로 누리려는 사람들이란 인식을 가지고 있다. 체코 살 때 그들을 주변에서 자주 본 적이 있다. 왜냐면 우리 집 앞 쓰레기통을 거의 매일 뒤졌기 때문이다. 항상 같은 같은 사람이 온다. 어쩌다는 두 집시들 간에 다투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영역 같은 것이 정해져 있는 듯했다. 암튼 그를 위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봉지에 싸서 쓰레기통에 넣어둔 적도 많았다. 내가 살았던 지역이 그 당시엔 언덕 위의 고급 주택가였으나, 수십여 년 전엔 집시의 거주지였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도 집시들은 언덕에 거주하는 것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주거지를 빼았았다는 미안함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라나다의 집시들은 풀 같은 것을 들고 돌아다니며 복을 빌어주고 돈을 받는다고 했는데, 실제로 아주 예전(가톨릭 왕들의 시기나 그 이후)엔 집시들이 영적인 능력이 있어 이를 이용해 점을 쳐주고 돈을 벌었다고 한다.

가이드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으나, 내가 읽었던 역사책에서 나온 이야기론 가톨릭 왕들이 그라나다를 공략하려 했을 때 집시들이 군마를 조달하고 정찰의 역할을 맡아 왕의 환심을 샀다고 한다. 그라나다를 함락시킨 이사벨 여왕이 집시들에게 사크라몬테에 그들의 주거지를 인정하고 세습적인 면세 특권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정착하게 된 집시들이 이 언덕에 횡혈식 주거지를 형성하고 살기작했다는 것이다.


집시촌 사크라몬테에서 보이는 알람브라 궁전


플라멩코의 춤은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기교를 가진다고 하는데 다른 춤과 다른 점이 땅과 무용수가 연결되어 있음을 발구르기를 통해 확인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땅과의 연결과 동시에 팔과 다리의 격정적인 움직임은 항상 몸 중심으로 돌아간다. 춤사위엔 어떤 양식이 정혀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용수들의 기교와 자유재량으로 표현한다고 한다. (하지만 내 생각엔 현대의 플라멩코 학교에서는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가르치진 않을 것 같다.) 다만 기타나 깐따오르(노래)엔 그런 자유는 없다고 한다.

플라멩코를 제대로 하려면 혼 내림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이 혼은 안달루시아 대지의 혼이며 스페인어로 '두엔데'라고 부른다. 이런 열정적인 춤과 노래는 아무래도 영적인 부분과 조금은 연결이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언덕에서 내려온 우리는 가이드의 추천을 받은 몇 곳의 음식점 중 한 곳으로 향했다. 우리 아파트먼트 바로 앞에 있는 식당이기도 했다. 라 마누엘레스란 식당이었는데 '삐데오스 꼬스따도스 꼰 랑고스띠노스 이 알리오스 데 띤따 이 데 삐미엔또스 델 삐끼요'란 아주 긴 이름의 메뉴를 주문했다. 먹물을 가미한 가늘고 짧은 구운 누들과 해산물을 곁들인 음식의 일종이었는데 양도 많고 맛도 훌륭했다.


그라나다 '라 마누엘레스' 식당의 메뉴판(이렇게 올리면 안될 것 같긴 한데..), 메뉴 이름이 너무 길어서

저녁에 테이크 아웃으로 아주 맛있게 먹었던 해산물 튀김(모듬 튀김 시키면 다양하게 먹어볼 수 있음)집, 로스 디아만떼스도 훌륭했다. (20유로 정도면 어른 두 명이 배부르게 먹음.) 두 음식점 모두 누에바광장쪽에 위치해 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성공한 메뉴가 여행 전부터 작정하고 갔던 빠에야와 해산물 튀김이었다. 빠에야에 대한 이야기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빠에야 집(내가 생각해 본...)이 있는 네르하(Nerja)와 프리힐리아나(Frigiliana)편에서 소개할 예정...


그라나다 시내의 로스 디아만떼스란 해산물 튀김 전문점


본격적인 알람브라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알람브라는 왕궁, 카를로스 5세의 궁전, 알카사바, 헤네랄리페 등 4개의 부분으로 구성된 거대한 관광지이다. 그 어마어마한 규모가 그간 유럽에서 다녀본 많은 관광지 중 수위에 꼽을 정도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위대한 세계 문화유산도 '알람브라 이야기'를 쓴 미국인 워싱턴 어빙(1783~1859)이 그 아름다움과 가치를 재발견하기 전까지 집시들이 사는 흉한 곳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테지만, 혼돈의 스페인 기독교 역사에서 그 가치가 빛을 발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어빙이 이 궁전을 알리기 전 상황은 (스페인은 기독교 국가였으므로) 이슬람의 궁전은 관리도 안되었을 뿐 아니라, 사고이후 복원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의 소설을 계기로 이 위대한 문화유산의 보호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복구를 거듭하게 되어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워싱턴 어빙이 실제 머물렀던 알람브라 궁전의 한 방

그라나다는 나사리 왕국의 수도였다. 해발 3,400가 넘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 등 높은 산에 둘러싸인 그라나다 왕국은 그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기독교 세력이 쉽사리 침략하지 못한 스페인의 마지막 이슬람 왕국이었다.

알람브라 궁전에서 본 까떼드랄
알람브라 궁전에서 저멀리 눈에 덮인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보인다

기독교 세력에 함락되어 가던 이슬람교도들이 최후까지 살아가던 그라나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이슬람의 최후를 목전에 두고 비장한 손길로 이슬람이 빚어낸 이슬람 문화의 결정체가 바로 알람브라이다. 그래서 이 궁전은 퇴폐적(이슬람 사원과 완전 대조적으로 이슬람 궁전을 가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이며 세기말적 느낌이 감돈다. 알람브라는 아랍어로 '붉은 성'이란 뜻이다. 횃불을 비치면 붉게 빛나는 성벽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아라야네스 중정


14세기 중반 건설된 이슬람 왕궁으로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메수아르의 방에선 기하학적 도안과 나무, 화초를 상징하는 추상적인 도안과 함께 '알라만이 승리한다'는 알라의 위대함을 써 놓았다. (이슬람교 건축물엔 사람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을 금기시한다.) 옆의 궁으로 들어서면 50m 정도의 인공 연못이 나타나는데 네바다 산맥의 수압을 이용해 물을 끌어오고 연못 주변에 허리까지 오는 나무들을 정갈하게 배치했다. 이 나무에서 나는 특유의 향은 정신을 몽롱하게 하는 성분이 있어서, 외국에서 온 사신들을 정신 못 차리게 하는 목적으로 사용했다고도 한다.

이슬람 사람들에겐 물을 다스리는 것이 부의 상징이므로 이슬람 궁전엔 연못이 자주 등장한다. 술탄들은 사막에서 온 사신들에게 연못을 보여주며 자신의 부를 과시했다고도 한다.


사자의 중정

사자의 중정은 오직 왕과 왕의 첩들만이 출입했던 궁의 가장 내밀한 곳이었다고 한다. 정원은 아주 섬세한 레이스 장식을 보는 듯하다. 가운데 12마리의 사자상이 돌 분수를 떠받치고 있는데 입을 통해 물을 뿜어 낸다고 한다. 유태인이 만들어 술탄에게 바친 이 사자상은 당시 그라나다에 살던 유태인 12 부족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술탄은 정원 주위를 둘러싼 수많은 방에 32명의 첩을 거느리고 살았다.

벌집모양의 천장

기이한 벌집 모양을 한 석고 천장이 있었는데 이 벌집 속에 들어찬 방의 수가 모두 4,400개라고 한다. 이 천장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반사되어 자수정의 색을 연출해 내면 종유석 동굴 천장을 쳐다보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다고 한다. 내궁의 밖은 '천국의 정원'이란 뜻을 가진 왕의 휴식처인 헤네랄리페 정원이다. 수로처럼 가늘게 난 연못 가운데로 분수가 줄지어 있고, 이 물의 미로 사이로 갖가지 나무와 꽃이 들어차 있다. 겨울이라 아름다운 꽃의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게 안타까웠다. 이 공간엔 나사리인들이 알람브라를 너무 천국에 가깝게 만들자 알라가 이들을 이곳에서 쫓아내기로 결정했다는 전설이 있다. 1492년 가톨릭 왕들이 알람브라를 공격하겠다고 전하자, 마지막 왕인 보압딜왕은 싸우기를 포기하고 궁을 떠났다고 한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넘었다는 알람블라궁 맞은 편의 작은 언덕을 '무어인의 한숨'이라고 부른다.

헤네랄리페의 아세끼아 중정
왕의 여름별궁 헤네랄리페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 아름다운 헤네랄리페 별궁의 중정 분수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는 타레가의 '알라블라 궁전의 추억'이란 유명한 기타곡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물과 이슬람 문화는 어딜 가나 항상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왕의 물을 대던 수로
자연스런 경사를 이용해 시에라네바다 산의 물을 흐르게 하던 수로

알람블라 궁전 안에는 의외로 가톨릭 왕인 카를로스 5세의 궁전이 있다. 카를로스 5세 시절 네덜란드가 고향이었던 왕은 스페인의 왕이기도하였으나, 다스리던 영토가 워낙 넓었으므로 그다지 스페인에 머무르지 않았다고 한다. 스페인의 권력직들도 대부분 네덜란드 등 외국인이 점유를 하게 되고, 스페인의 귀족들은 왕을 스페인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 궁전을 지어서 바쳤는데 그것이 바로 알람브라의 르네상스식 건축물인 카를로스 5세의 궁전이다. 정사각형의 건물에 원형 중정을 만들었는데 이슬람의 건축물안에 있는 기독교의 궁전이다.

카를로스 5세 궁전
카를로스 5세 궁전, 건물 구조상 정가운데 말을 하면 소리가 메아리 쳐 울려 퍼진다.

안달루시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두종교의 혼합이긴 하지만, 알람브라에선 훨씬 더 이질적인 느낌이 든다.


다음 목적지는 이번 여행의 목적 중 하나였던 기막힌 빠에야와 숨 막히는 경관을 만끽할 수 있는 곳,

바닷가 마을 유럽의 발코니(Balcon de Europa) 네르하와 spctacular view를 선사한 하얀 마을 프리힐리아나....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