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 좋아하던 수첩에 서른이 된 내 모습을 상상해 그린 적이 있다.
그림 속 나는 쫙 빠진 슬랙스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그땐 쓰지도 않던 안경을 쓰고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린 나에게 서른은 내게 가장 가까운 어른의 나이이자,
막연하고 달콤한 기대감이었다.
하고 싶은 건 많지만, 꿈을 꾸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이십 대에도 늘 내겐 서른이라는 찬스가 있었다.
'지금 못하는 것들도 서른엔 잘하게 될 거야'
'지금 내게 없는 것들도 서른의 난 이미 갖고 있을 테니까 괜찮아'
서른의 나에게 끊임없이 바톤을 떠넘겼다.
서른이 끝나가는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에게 조금 머쓱하다.
서른의 나는 안경을 끼고 슬랙스를 입지만,
내 수첩 속 서른의 나는 분명 "넵"과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사는 어른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중학생의 나를 만나게 된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미안하게도 지금의 나는 이뤄놓은 것도, 가진 것도 별로 없지만
그런 것 없이도 괜찮은 어른이 되었다고.
꽤 많은 것들이 괜찮아졌다고.
아주 오래전부터 암묵적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했던 서른의 막바지.
점점 결승선이 선명해진다.
그런데 이 달리기, 정말 12월 31일이 마지막 골인 인걸까?
마지막 스퍼트를 내고 있는 내 앞에
팔을 쭉 뻗고 부산스런 잔걸음으로 뛸 준비를 하고 있는 서른한 살의 내가 기다리고 있다.
왕언니처럼 '나만 믿어'라고 말하고 있는 표정이 조금 귀엽고 대견한 마음.
나는 바톤을 흔들며 그녀에게 달려가고 있다.
막 서른이 되었을 때, 나는 다시 중학생이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생전 처음 커다란 교복을 입었을 때처럼 하루아침에 어른이 되어버린 느낌.
서른한 살의 나도 처음은 분명 어색하고 서툴겠지.
그런데 왠지 내 앞에 있는 저 언니, 쭉 뻗은 손 군데군데 굳은살이 보인다.
그녀라면 자주 넘어져도 지금보다 조금 덜 아플 것이다.
지금보다 더 빨리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날들도 있겠지만, 괜찮을 것이다.
금방 괜찮아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 달리기는 마라톤이 아닌 이어달리기니까.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