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다!
원래 비 오는 날 별로 안 좋아하는데 백수가 되고 난 후론 조금 좋아졌어.
비 오는 날은 집에 있는 게 최고거든.
남들 다 출근하고도 남았을 시간에 불 꺼진 방에서 창문을 바라보면 아무것도 안 하고 이긴 기분이 들어.
가만히 앉아서 빗소리 듣는 것도 좋고.
요즘은 내가 이미 갖고 있는 것들이 자꾸 눈에 보여.
건강한 몸뚱아리, 자유로운 시간, 지난 주말에는 미세먼지가 없어서 개천을 달리는데
파란 하늘과 적당한 날씨까지 다 감사해지더라니까?
구멍 났던 마음에 새살이 차오르고 있나 봐.
최근에 드라마도 다시 보기 시작했고 (드라마 없이 못 사는 나인데 우울하면 아무것도 보기 싫더라고)
지난주엔 일본여행도 다녀왔어. 그 주엔 평소랑 다르게 재밌는 일이 많이 생겼다?
하도 집이랑 도서관만 왔다 갔다 하니까 누구라도 붙잡고 목 아플 때까지 수다 떨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진짜 하루도 빠짐없이 질리도록 수다를 떨게 됐어.
귀국한 날엔 갑자기 초등학교 때 동창이 연락 와서 한참 떠들고, 그다음 날엔 볼 일이 있어 나갔다가
우연히 지인을 만나서 떠들고, 그다음 날엔 전 회사 팀원들이랑 페이스북으로 떠들고 이제 당분간은 수다 떨고 싶다는 말을 안 나올 것처럼 원 없이 떠들었지 뭐야.
하나도 계획한 일이 아니었는데, 나에게 필요한 것들은 내게 꼭 필요할 때 온다더니 그 말이 맞나 싶었어.
그동안 글을 진짜 안 썼지?
4월부터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했어. 불안이 너무 커져서 이걸 잘 관리하고 싶은 마음에 시작했는데
모호했던 부분을 정확하게 긁어주셔서 좋아. 무엇보다 50분 동안 부담 없이 내 얘기만 떠들 수 있다는 게 좋더라. 퇴사하고 나 자신과 많이 대화하고 싶다, 나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 줄곧 생각했었는데
화요일 저녁엔 스님과 화상으로 알아차림 수업을 하고, 수요일 점심엔 상담을 가는 일상에 익숙해지고 보니
이제야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 같은 마음이 들어.
여러 가지 심리검사를 했는데 웃긴 건 내가 알고 있는 내 모습과 거의 일치하더라고?
나는 정말 날 디테일한 부분까지 알고 있더라.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불안도가 높게 나왔고, 특정 항목에서 0이나 99에 가까운 극단적인 성향이 나왔는데
자세한 그래프랑 표로 보니까 나를 한 발짝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 좋았어.
뭐라 설명할 수 없이 느낌으로만 긴가민가하던 부분을 선생님이 잘 설명해 주시기도 하고.
난 위험회피 성향이 99에 가깝게 높고 극도로 갈등을 싫어하는 성향인데 성장을 추구하는 사람이라
아마 속에서 나 자신과의 싸움이 항상 일어날거래.
그동안 성장하고 싶은 마음이 이기면서 성장했을 거다라는 말을 들었을 땐
이미 내가 겪은 일이고 당사자인데도 그동안 성장을 선택했던 순간들이 떠오르면서 스스로를 다독여주게 되더라.
진짜 나를 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정말로 그냥 머리로 알기만 하는 것이 아는 것일까?
나를 이해하는 수준의 앎이 진짜 앎일까, 스스로를 인정하는 수준까지일까.
모르긴 몰라도 상담 선생님과 상담하다 보면 선생님이 말씀해 주시는 나라는 사람을 마치 내 친구의 이야기인 것처럼 듣게 돼. 그러면 과거의 나를 이해할 수 있게 돼. 난 나에겐 모질게 굴어도 친구들한텐 한없이 친절한 사람이니까. 나라는 친구가 왜 그랬는지, 어땠는지, 지금은 어떤지 알게 되는 시간이 귀하고 좋은 것 같아.
올해는 일기를 정말 열심히 쓰고 있어.
제때 쓰지 못해도 메모해 둔 사건들을 떠올리면서 쓰니까 금방 페이지를 채울 수 있게 되더라고.
그리고 일기장에 감정에 대한 표현이 늘었다는 걸 느껴.
전에는 뭘 했다는 사건의 서술들이 많았는데 요 근래는 마주하는 상황들과 사건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어떤 감정이 내 안에서 일어났는지에 대한 문장이 많더라고.
작년 이맘때부터 이직준비를 시작해서 도서관을 걷던 길에 다시 꽃이 폈을 때
사계절이 지났다는 생각에 울적해질 뻔했는데 그래도 역시 봄은 봄인가 봐.
눈 내렸던 곳에도 새싹이 움트고, 꽃바람이 무거운 코트를 벗겨주는 계절인가 봐.
곧 봄이랑 가을은 사라질지도 모른다던데 그래도 내 이름이 아깝지 않게 4월, 5월엔 이따금씩 나를 떠올려주라 친구야.
또 소식 전할게!
봄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