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변_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손에 쥔 것은 붓, 마주한 것은 죄.

by LWB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그는 타오르는 눈으로 병풍을 열었고,
그 안에는 말 없는 비명이 살고 있었다.

그는 진실을 보지 않았다.
다만 그렸다.
가장 고요한 손끝으로, 가장 끔찍한 광경을.

딸은 타올랐다.

병풍은 완성되었다.
그리고 지옥은, 그림이 되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일본 근대문학사에서 가장 날카롭고 냉정한 문체로 인간의 내면을 파헤친 작가였다. 그는 한 문장 안에서 신화와 인간, 광기와 이성, 고통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호흡시키는 드문 감각을 지녔다.
그의 작품 세계는 종종 고전 설화를 차용하여, 그 안에 당대 일본 사회의 도덕, 종교, 권위에 대한 질문을 담는다. 그의 단편들은 모두 한 가지 공통된 경향을 보인다. 진실은 존재하되, 말해지지 않는다. 그는 침묵의 윤곽을 따라 글을 썼고, 작품은 독자의 머리가 아니라 심장에 말을 걸었다.

그의 '지옥변'은 그러한 작풍이 가장 응축된 형상이다. 고전 설화인 '그림승려 요시히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이 작품에서, 아쿠타가와는 단순한 지옥의 풍경이 아니라, 지옥을 그리고 있는 인간의 초상을 보여준다. 화가 요시히데는 병풍에 지옥도를 그리는 임무를 수행하지만, 그 완성에는 상상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진짜 고통’이 필요하다. 그는 고통을 찾는다. 그는 고통을 만든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지옥을 창조한다.

'지옥변'은 예술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자,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진실 앞에서 침묵하는 병풍, 그 안의 고통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지옥변'은 한 하급 시종의 회고적 시점을 통해 전개된다. 그는 존경받는 귀족 영주를 섬기고 있으며, 이야기는 그 영주의 궁정에서 벌어진 한 천재 화가와 병풍 한 폭에 관한 기록으로 시작된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요시히데, “나라 안에서 으뜸가는 화공”이라 불리는 남자가 있다. 그는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괴팍하고 불경스러우며, 무엇보다도 추한 것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기이한 취향을 지닌 인물이다. 요시히데는 직접 보지 않고는 그릴 수 없다는 고집으로 유명했으며, 사람들은 그의 화풍을 두려워하고 경외했다. 그런 그에게, 영주는 불교의 지옥도를 그린 병풍, 일명 ‘지옥변상도(地獄變相圖)’를 주문한다.

요시히데는 이 주문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지옥을 상상으로는 그릴 수 없다고 말하며, 그림을 위한 ‘실제 지옥’을 찾기 시작한다. 그는 제자들을 쇠사슬에 묶고, 독사와 올빼미를 풀어 공포에 질린 얼굴을 스케치한다. 이윽고 요시히데는 영주에게 한 가지 더 요청한다.
“실제로 불에 타는 사람을 한 번만 보게 해 주십시오.”

영주는 그 요청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며칠 뒤, 그는 비단 수레에 한 여인을 태워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린다. 요시히데는 아무것도 모른 채 불타는 마차 앞에 서고, 불꽃 속에서 절규하며 타들어 가는 여인의 얼굴을 알아본다. 그것은, 요시히데의 외동딸이었다.

딸은 영주의 궁에 들어가 시녀로 섬기며 요시히데의 손을 벗어난 인물이었다. 단아하고 어진 그녀는 영주의 애정을 받았고, 동시에 수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한밤중 정체불명의 괴한이 침입하여 그녀를 덮치려 했던 사건도 있었지만, 그녀는 범인을 밝히지 않았고, 누구도 감히 의심하지 못했다. 그녀의 입은 침묵했지만, 그녀의 죽음은 병풍 속에서 불꽃으로 기록되었다.

그날 이후, 요시히데는 지옥변상도를 완성한다. 그 병풍은 압도적인 위용으로 궁정 사람들을 떨게 했고, 그 안에 담긴 불꽃과 비명의 아름다움은 보는 이로 하여금 죄의식과 경외심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그는 걸작을 남기고, 며칠 후 자살한다.

화자는 이 이야기의 전말을 전하며, 마지막까지도 영주를 옹호하려 한다. 그는 요시히데가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을 뿐이며, 영주는 그저 관대한 후원자였다고 믿고 싶어 한다.



요시히데


'지옥변'의 중심인물 요시히데는 “나라 안에서 으뜸 가는 화가”로 불릴 만큼 명성과 재능을 겸비한 예술가이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극도로 왜곡된 세계 인식과 광기로 채워져 있다. 그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그 아름다움의 원천을 고통과 파괴의 현실 속에서만 찾으려는 예술지상주의자다. 그의 손에 쥐어진 붓은 단순한 창작의 도구가 아니라, 타인의 생명을 무대로 삼는 창조의 칼날이 된다.

요시히데는 스스로 “눈으로 본 것만을 그릴 수 있다”라고 말하며, 제자들에게 고문에 가까운 체험을 강요하고, 끝내 영주에게 “아름다운 여인을 산 채로 불태우는 광경”을 보여 달라고 청하는 데 이른다. 이 청원은 단순한 예술적 열망이라기보다는, 도덕과 윤리를 유기한 채 예술의 진실만을 좇는 병적인 집착의 결정판이다. 그리고 그 요청이 이루어진 순간, 희생된 이는 다름 아닌 그의 딸이다.

요시히데가 이 요청을 할 때 이미 그 희생자가 딸이 될 것임을 무의식적으로 예감했거나, 혹은 예술을 위해 딸까지 바치려는 암묵적 결단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가 이성적으로 그것을 부정했는지, 혹은 내면 깊숙이 받아들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존재를 스스로의 예술 앞에 제물로 바쳤으며, 그 사실이 지닌 비극성과 파괴력은 '지옥변' 전체의 도덕적 구조를 송두리째 흔든다.

요시히데는 딸을 향한 애정을 여러 번 드러내지만, 그 애정은 부성의 고결한 헌신이라기보다는 소유에 가까운 열광과 숭배로 묘사된다. 그가 딸을 돌본 것이 아니라, 딸을 감상하고, 지배하며, 궁극적으로 ‘그림 속 대상으로 응시’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사랑과 창작의 경계를 허물며, 사랑하는 이를 그림의 재료로 삼는다.

그가 병풍을 완성한 후 자살을 선택하는 장면 또한 이중적이다. 그 죽음은 단순한 죄의식의 발로라기보다는, 절대예술을 완성한 후 예술가가 느끼는 허무, 즉 “완성 이후의 공허”에 대한 자발적 해체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예술을 다 이루고 나서, 삶이라는 붓을 내려놓는다.

문학비평가 우에다 마코토는 “예술가가 예술을 삶보다 앞세우면, 그 삶은 반드시 파괴된다”라고 말했다. 요시히데는 바로 그런 길을 걸은 인물이다. 그는 현실의 윤리를 버리고 예술의 윤리를 따랐고, 그 결과는 걸작과 함께 완성된 자멸이었다. 그 병풍은 지옥을 그렸고, 그는 스스로 그 지옥에 들어가 버렸다.

요시히데는 그렇게 예술의 절대성과 그 속에 도사린 파괴적 위험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으며, 동시에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끝까지 밀어붙였다는 점에서 인간적 한계를 넘어선 예술의 화신이자 예술의 제단 위에 누운 희생자로 우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요시히데의 딸


요시히데의 딸은 '지옥변'에서 이름 없이 존재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아름답고 온순한 시녀”, “효성 깊은 딸”이라는 타인의 묘사를 통해서만 등장한다. 화자인 하급 무사는 그녀를 연민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그녀의 내면은 단 한 번도 직접 서술되지 않는다. 이는 단지 이야기의 구성이 아니라, 그녀가 작품 속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요시히데의 딸은 이 작품에서 모든 남성의 욕망이 교차하며 겹쳐지는 점에 위치한다. 그녀는 아버지 요시히데에게는 유일한 가족이자 사랑의 대상이며, 영주에게는 탐욕의 대상이자 정치적 장식물이고, 화자에게는 연민과 아름다움의 대상이다. 그러나 정작 그녀 스스로의 욕망, 고통, 선택은 말해지지 않는다. 그녀는 침묵 속에 강요된 희생자다.

작품 중반, 딸은 밤에 누군가에게 습격당한다. 화자는 이를 언급하며 그 범인을 “궁에서 힘 있는 자”일 가능성으로 암시하지만, 딸은 끝내 입을 열지 않는다. 이는 단지 수동적인 침묵이 아니다. 그녀의 침묵은 체념이자, 동시에 권력에 대항할 수 없는 처지에 대한 절박한 자기 방어다. 그녀가 자신을 희롱한 이가 영주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침묵한 것은, 말하는 순간 파국이 닥칠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가장 큰 비극은, 마침내 불길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조차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그녀는 영주의 탐욕에 끌려갔고, 요시히데의 예술 욕망의 결과로 불태워졌으며, 단지 존재한다는 이유로 두 남성의 욕망이 교차하는 제물이 되었다. 이는 문학 속 여성 희생의 오래된 모티프를 따르는 듯 보이지만, '지옥변'에서는 더욱 참혹하다. 그녀는 죄가 없었고, 욕망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바로 그 순결함이 비극의 조건이 되었다.

그녀는 ‘산 채로 불타는 여인’을 그리기 위한 실제 모델이 된다. 그 병풍은 요시히데가 혼을 갈아 넣어 완성한 걸작이었고, 많은 이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무시무시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그녀의 고통 위에 세워진 것이며, 작품은 이 역설적 아름다움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요시히데는 그림을 완성한 직후 자살한다. 일부 해석은 이것이 딸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라 보지만, 다른 해석은 완성된 예술이 모든 것을 삼켜버렸기에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예술가의 허무로 이해한다. 딸의 죽음은 그 어떤 윤리도, 가족애도, 신의도 지켜주지 못한 시대의 초상을 보여주며, 한 인격체가 타인의 욕망을 위해 어떻게 소비되고 사라지는가를 상징한다.

요시히데의 딸은 결국 침묵 속에서 사라진 순결, 혹은 예술과 권력 사이에서 갈기갈기 찢긴 윤리의 유령이다. 그녀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지만, 그 침묵은 지금껏 살아남은 자들, 예술을 소비한 자들, 권력을 따르던 자들, 그리고 이를 바라본 우리에게, 무언의 고발로 남는다. '지옥변'의 병풍 한복판, 불에 타는 마차 속에서 울부짖는 여인의 실루엣은 그녀다. 그녀는 더는 말하지 않지만, 그 고통의 이미지는 영원히 말하고 있다.


영주


'지옥변'에 등장하는 영주(호리카와 대인)는 겉으로는 자비롭고 교양 있는 군주로 비치지만, 작품이 전개됨에 따라 그 이면에 숨겨진 잔혹성과 권력 중독의 실체가 드러난다. 그는 작품 속에서 요시히데의 예술광기와 서로 다른 극을 이루는 존재로, 절대 권력이 낳은 윤리의 붕괴와 도덕의 실종을 구현한다.

처음 등장할 때 영주는 “자비로운 나리”라는 평가 속에서 군림한다. 하인들은 그를 신처럼 떠받들며, 화자인 하급 무사조차도 그의 자애를 칭송하기 바쁘다. 이처럼 모든 권력이 집중된 이상화된 군주의 초상은, 이야기가 진행되며 점차 그 본질을 드러낸다. 그는 요시히데에게 지옥도를 명하는 동시에, 그 지옥을 실제로 ‘연출’할 권력을 가진 존재로서 점점 사악한 예술의 공동연출자로 변모한다.

특히 요시히데가 “산 채로 불태우는 여인의 장면”을 요청하자, 그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이를 수락하며, 자신을 흠모하던 시녀—요시히데의 딸—를 직접 제물로 삼는다. 이 장면에서 영주는 인간 생명을 일회용처럼 사용하는 절대권력자의 전형으로 부상한다. 그는 한 명의 여성에게 사랑을 가장하고, 이어 그녀를 살해하고, 그 희생을 “예술적 연출”로 포장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그의 권력은 단순한 명령의 힘이 아니라, 현실의 도덕질서를 변형시키고, 타인의 생사를 창작 도구처럼 사용하는 폭력 그 자체다.

영주는 또한 예술에 대한 소비자적 욕망을 품고 있다. 그는 요시히데의 작품을 후원하고, 그 병풍을 완성하기 위해 딸의 생명까지 묵살한다. 이는 예술을 소비하고자 하는 자본 권력이 어떻게 예술 자체를 지배하고, 전유하며, 왜곡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예술을 사랑하는 듯 보이나, 실상은 예술조차 자신의 권력 장식물로 삼으려는 전형적인 권력자의 욕망을 드러낸다. 요시히데가 예술을 위해 생명을 바쳤다면, 영주는 예술을 위해 타인의 생명을 불태운 것이다.

더 나아가, 이야기 전반에 걸쳐 암시되는 딸의 ‘겁탈’ 사건의 범인이 사실상 영주일 가능성 역시 무겁다. 하인들이 이를 추측하면서도 말로 꺼내지 못하고, “나리라면 말 한마디면 되지, 몰래 들어갈 이유가 없다”라고 말하는 부분은, 영주의 권력이 공공연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구조임을 드러낸다. 권력이란 타인의 인격과 몸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대할 수 있다는 무서운 환상을 부여하며, 그 세계에선 아무도 그를 제어하지 못한다.

결국 영주는 요시히데의 예술처럼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권력을 상징한다. 그러나 요시히데는 그 대가로 자멸했지만, 영주는 끝까지 살아남아 죄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권력의 정상에 앉아 있다. 이 아이러니는 '지옥변'이라는 작품이 단지 예술의 광기를 다룬 것이 아니라, 예술과 권력이 어떻게 인간성을 파괴할 수 있는가에 대한 냉혹한 성찰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영주는 단순한 악인이나 조연이 아니다. 그는 요시히데의 병풍 속 지옥을 현실로 구현한 신적인 권력자, 그리고 예술이라는 거울에 자신의 악을 반사시키고도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가학적인 관객이다. 그의 존재는 우리에게 묻는다. 예술이 인간의 고통 위에 세워졌다면, 그 예술을 즐기는 관객은 과연 무죄한가?


화자


'지옥변'의 화자는 단지 이야기의 전달자가 아니다. 그는 권력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는 목격자로서, 보는 동시에 외면하고, 말하는 동시에 침묵하는 자이다. 작품은 철저하게 그의 시점을 통해 서술되며, 모든 인물에 대한 정보, 사건의 진상, 감정의 온도까지도 화자의 시선과 언어를 통해 필터링되어 들어온다.

겉으로 보기엔 그는 한 발짝 떨어진 위치에서 “들은 대로”, “본 대로” 전하려는 객관적 관찰자를 자처한다. 그러나 그의 서술에는 끊임없이 편향이 깃든다. 그는 요시히데를 “괴짜 늙은 화공”이라 부르며 비웃고, 요시히데의 말이나 행동을 곡해하거나 확대하여 전한다. 반면 영주에 대해서는 극도의 존칭과 미화된 묘사로 일관한다. 영주가 내리는 잔혹한 명령조차 “그분께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변명하며, 마치 그의 결정이 정의롭기라도 한 것처럼 둘러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편향된 서술은 독자에게 반어의 힘으로 작용한다. 화자가 아무리 영주를 칭송하고 요시히데를 폄하해도, 실제 사건의 전개는 그 말과 어긋나면서 오히려 영주의 잔혹함과 요시히데의 비극적 내면을 부각한다. 이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즐겨 쓰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 기법의 전형이며, 우리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추적하도록 유도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화자의 정체성이 단순한 “하급 무사”가 아니라 권력에 의해 길들여진 인간의 표본이라는 점이다. 그는 권력을 향한 충성과 무비판적인 숭배를 통해, 영주의 악행조차 정의로 감싸려 한다. 이는 현실에서 흔히 목격되는, 권력의 언어를 내면화한 자들의 모습을 투사한다. 그는 주군의 명령에 저항할 수 없고, 딸이 죽음으로 내몰린 이유조차 명확히 말하지 못한 채 애써 침묵으로 덮는다.

하지만 이 화자는 단순히 어리석은 인물로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침묵과 편향이 작품 전체의 서사 구조를 만들어내는 핵심 장치로 작동한다. 우리는 그의 의도된 누락, 왜곡된 묘사, 감정 없는 전달 속에서 진실의 실루엣을 조심스레 그려내게 된다. 요시히데의 고뇌, 딸의 공포, 영주의 광기, 이 모든 것은 화자가 말하지 않은 틈에서 더 강렬히 떠오른다.

그는 또한 일종의 제2의 화가다. 요시히데가 지옥의 풍경을 병풍에 담았다면, 화자는 지옥이 일어난 세속의 궁정을 말로 그린다. 그는 말의 붓으로 사람들의 내면을 그리고, 동시에 그 그림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우리에게 은연중에 보여준다. 이로써 아쿠타가와는 “누가 진실을 말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작품 안에 심는다.

결과적으로 화자는 권력의 복제자이자, 그 모순의 가장 가까운 관찰자이며, 우리가 진실과 거짓, 정의와 욕망, 예술과 침묵 사이를 탐색하게 만드는 미로의 안내자다. 그는 말한다. 그러나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인물이다.


원숭이


'지옥변'의 이야기 속에서 딸이 돌보던 작은 원숭이는 단순한 애완동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상징적 정서를 지닌 서사의 핵심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 원숭이는 인간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요시히데의 딸의 편에 서서 행동하는 존재로, 그녀의 선의와 순결함을 반영하는 살아 있는 거울이다.

작품 초반, 딸이 괴한에게 습격당했을 때도, 화자를 재빨리 끌어와 도움을 청한 것은 바로 이 원숭이다. 또한 이야기의 절정, 비단 수레에 태운 채 불에 타들어가는 딸의 참혹한 죽음의 순간에도, 원숭이는 불길 속으로 함께 뛰어들어 끝내 그녀와 함께 타 죽는다. 아무런 언어도, 설명도 없이 행동으로 사랑을 증명한 것이다. 이 장면은 인간의 침묵, 예술가의 광기, 권력자의 무관심으로 채워진 세계에서 유일하게 진실된 애정을 보여주는 순간이며, 작중 유일한 윤리적 행위이자 무언의 고발로 작용한다.

이러한 원숭이의 희생과 충직함은 요시히데의 왜곡된 부정, 영주의 위선적 애정과는 뚜렷이 대비된다. 요시히데는 딸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결국 딸을 ‘재현’을 위한 수단으로 몰아넣는 독백적인 집착이었다. 영주는 딸에게 애정을 품고 있는 듯 보였지만, 결국은 그녀를 산 채로 병풍의 ‘재료’로 제공한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원숭이는 어떤 이해타산도 없이, 어떤 말도 없이, 오직 주인을 위하여, 끝까지 함께한다.

이 원숭이는 그 자체로 자연적 순수성과 무구한 헌신의 표상이며, '지옥변'이라는 지옥도 안에서 오직 한 줄기 의로움과 애정이 깃든 존재로 남는다. 그는 딸의 인격과 순결함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짐승’의 충성으로 증명하고, 동시에 인간이 되기를 포기한 이들이 무너뜨린 세상에,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의리를 보여주는 침묵의 증인이다.


요시히데의 제자들


요시히데의 제자들은 개별 이름도 없이 “무리”로만 불리며 등장한다. 이들은 뛰어난 화공 요시히데의 문하생으로, 예술을 배우기 위해 그의 곁에 있지만, 그 과정에서 경험하는 것은 아름다움이나 감동이 아니라 공포와 고통의 현장이다.

요시히데는 지옥도를 그리는 데 필요한 ‘진짜 고통’을 얻고자, 제자들을 대상으로 실험적이고 잔혹한 행위를 저지른다. 직접 불을 지르거나 매다는 등의 행위는 단순한 수단이 아닌, 예술적 완성도를 위한 ‘증명된 고통’의 재현이다. 제자들은 때로 비명을 지르고 부상을 입으며 반발하지만, 끝내는 아무도 스승의 명령을 거스르지 못한다. 이들은 요시히데의 광기와 예술지상주의가 구체적으로 구현되는 무명의 희생자들이다.

이들은 예술을 배우기 위해 모였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인권이나 존엄을 주장하지 못한다. 이는 절대적인 예술 권위 앞에 인간이 얼마나 쉽게 도구로 전락할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요시히데의 예술은 숭고하지만, 그 토대는 타인의 고통 위에 세워진 피의 성전이다. 이 구조는 영주가 권력을 위해 신하들을 희생시키는 구조와 거울처럼 대응된다. 예술과 권력, 두 절대적 가치 모두가 인간을 수단화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자들을 통해 드러난다.

이들은 작품 내내 개별적인 이름이나 감정, 배경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당시 사회에서 약자의 존재가 얼마나 쉽게 익명화되고 지워지는가를 보여준다. 제자들의 침묵은 그저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라, 구조적 복종과 사회적 무력감의 산물이다. 아쿠타가와는 이 익명성을 통해, 희생자란 항상 주변에 있었지만 이름조차 남지 않은 존재였음을 역설적으로 부각한다.

문학적으로, 제자들은 광기 어린 요시히데의 중심을 더욱 극명하게 떠오르게 하는 어두운 프레임이다. 한 명 한 명이 아니라, 무명의 군상으로 제시된 이들은 마치 지옥도의 배경을 이루는 망자들처럼, 예술이라는 지옥의 열기에 타들어가는 또 다른 불꽃이다. 제자들의 고통은 감정의 주체가 아닌 대상화된 표정이며, 요시히데의 병풍에 그려진 지옥의 고통을 이차적으로 연상시킨다.

결국 제자들은 요시히데의 예술혼이 어떻게 타인의 생명을 집어삼키며 탄생했는가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다. 그들의 고통과 침묵은, 화려한 예술의 그림자에 도사린 어둠을 폭로하고 있다. '지옥변'에서 제자들은 “화가가 되기 위해 배웠지만, 결국 고통의 얼굴이 되었다.” 예술에 담긴 고통이 실제 인간의 고통일 때, 우리는 그것을 여전히 숭고하다고 부를 수 있는가?




예술은 인간의 생명을 초월할 수 있는가.


"불길 속에서 남은 것은, 인간인가 예술인가"

'지옥변'은 이 질문 자체를 실험의 형식으로 서사화한 작품이다. 요시히데는 예술을 위해 실재의 고통을 요구하고, 영주는 권력을 통해 그것을 제공한다. 그리고 딸은 아무 말도 남기지 못한 채 불타오르고, 병풍은 완성된다. 그 병풍 앞에서 모두는 숨을 죽이고, 어떤 누구도 그림의 완성도를 부정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 불길이 삼킨 것은 무엇인가?

예술은 생명을 초월할 수는 있지만, 생명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요시히데는 “본 것을 그려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결국 지옥도를 실제로 연출한다. 그의 광기는 다분히 현대 예술가의 존재론적 딜레마를 투영한다. ‘진실한 예술’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생명조차 수단화할 수 있는가? 그는 완벽한 예술을 얻지만, 그것은 딸의 순결함, 말없는 저항, 짐승의 충성과 함께 불타버린 생명 위에 서 있다.

그림은 남지만, 그림이 생명을 복원하지는 못한다. 요시히데는 작품을 남겼지만, 예술을 통해 죄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오히려 예술은 그를 더 깊은 죄의식 혹은 무의식적 자각으로 이끌었고, 결국 예술은 그의 생도, 그의 삶도 삼켜버린다. 예술은 불사의 기록이 될 수 있지만, 윤리적 정당성이 될 수는 없다.

예술이 초월하는 것은 ‘생명’이 아니라, ‘감각의 경계’다.

'지옥변'의 병풍은 ‘보는 사람’의 감각을 완전히 전복시킨다. 단순히 아름답거나 기술적인 묘사를 넘어서, 그 안에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공포와 진실이 녹아 있다. 예술은 ‘현실’보다 ‘진실’에 닿으려는 시도이며, 그 과정에서 감각과 이성의 한계를 초월한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 초월은 윤리적 가치를 전제하지 않는다. 즉, 감각을 뛰어넘었다는 사실이 곧 선(善)은 아니라는 것이다. 요시히데는 인간으로서 아버지의 위치를 내려놓고, 화가로서 지옥을 현실화했다. 그 그림이 아무리 위대해도, 그는 “아버지로서 실패한 자”로 남는다. 그의 초월은 감각의 한계를 넘었을지언정, 인간됨의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예술은 생명을 초월하지 않는다. 다만 생명의 '부재'를 통해 예술은 완성된다. 요시히데의 그림은 딸의 생명이 사라짐으로써 완성되었다.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그는 끝내 그 병풍을 완성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예술은 ‘살아 있는 존재’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 죽음, 상실, 고통, 침묵, 그 부재들이 오히려 예술의 불을 지핀다. 이는 아주 역설적이지만, 예술이 무언가가 없어지는 순간 가장 강렬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 강렬함이 반드시 옳음은 아니다.

딸의 죽음은 예술의 완성을 위한 ‘제물’이었는가, 아니면 인간의 타락을 고발하는 ‘거울’이었는가?

이 질문의 핵심은 바로 여기다. '예술은 생명을 초월하는가',라는 질문은 곧 '그 초월이 정당한가?'로 이어진다. 요시히데의 병풍은 단지 예술가의 광기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것을 허락한 사회 전체의 침묵과 방조를 담고 있다. 화자는 말하지 않았고, 영주는 실행했고, 제자들은 외면했다. 그렇게 완성된 예술은 생명을 초월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집단적으로 유기한 결과물이다.

이 예술은 숭고한가? 아니면, 그것이 아름답다는 이유로 모두가 공범이 된 순간을 기록한 지옥의 거울인가?

예술은 생명을 초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초월이 인간을 무너뜨릴 때, 그 예술은 예술이기 이전에 죄의 기록이 된다.


요시히데는 작품을 완성한 순간, 구원받았는가, 파멸했는가.


예술의 궁극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구원’이다. 그는 생전 “눈으로 본 것만 그릴 수 있다”라고 말하며 철저히 ‘진실한 지옥’을 찾아 헤맸다. 결국 그는 자신의 딸이 불타 죽는 현세의 지옥을 직접 목격했고, 이를 바탕으로 역대 누구도 그리지 못한 완벽한 지옥도를 남긴다. 이 지옥도는 보는 이들조차 숨이 멎을 만큼 압도적인 힘을 지닌 작품이다. 이 순간, 그는 예술가로서의 사명을 완수했고, 한 생애의 목적을 달성했다. 요시히데는 그제야 예술로써 ‘진실’을 잡아냈고, 인간으로서 고통의 절정을 목도했으며, 예술가로서 가장 높은 산에 올랐다.

이 점에서 요시히데는, 고통 속에서 진실을 보았고, 죽음을 통해 자신을 완성한 존재, 즉 구원받은 예술가로 해석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죄의 산물이다. 요시히데는 딸의 죽음을 통해 예술을 완성했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그는 지옥도를 원했고, 영주에게 “산 사람을 태우는 광경을 보여 달라”라고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이 사랑한 존재를 제물로 삼아, 그 진실을 그렸으며, 그 대가로 삶을 버렸다. 예술은 완성되었지만,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완전한 몰락의 대가였다. 그는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지옥에 자기를 봉헌한 희생자였다.

그의 자살은 속죄나 회한이 아니라, 예술이 끝났을 때, 더는 살아갈 이유가 없어진 자의 허무의 증명일 수도 있다.

구원과 파멸은 동시에 일어났다.

요시히데는 예술가로서 완성되었고, 인간으로서 파괴되었다. 그가 그린 병풍은 완벽했고, 그가 견딘 대가는 절대적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존재 전체를 예술로 연소시키는 방식으로 구원과 파멸을 맞은 인물이다. 요시히데의 죽음은 예술이라는 불꽃 속으로 자기를 던진 최후의 점화, 그는 불타오름으로써 영원해졌고, 동시에 소멸했다. 요시히데는 예술가로서 구원받았고, 인간으로서 파멸했다.

이 두 진실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는 '지옥변'이라는 한 폭의 병풍 속에서 빛나는 지옥처럼, 완성과 파멸의 순간을 동시에 안은 존재였다.




불꽃 속에서 예술은 무엇을 남겼는가.

단순한 단편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과 권력, 인간성과 광기, 그리고 ‘진실’이라는 이름의 맹목 사이에서,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리는지를 집요하게 묻는 고통스러운 기록이다. 이 작품은 마치 하나의 병풍처럼, 각기 다른 층위의 도덕과 욕망, 감정과 침묵을 병렬적으로 펼쳐 보인다.

화가 요시히데는 예술을 통해 지옥을 재현하려 했고, 그 ‘지옥’은 결국 자신의 현실이 되어 되돌아왔다. 그는 예술의 진실을 위해 살아 있는 인간을 '그중에서도 사랑하는 딸'을 불태웠고, 그 과정에서 예술이 인간을 초월할 수 있다는 신념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을 소모하는 방식으로만 실현되었다. 이 예술은 위대하지만, 동시에 피로 물든 것이며, 아무리 아름답게 완성되었더라도, 그것이 만든 지옥은 감상자가 아닌 피해자에게는 오직 ‘참극’으로만 남는다.

영주는 이 지옥도를 가능케 한 또 다른 손이다. 그는 자비로운 군주로 보이기를 원하면서도, 타인의 생명을 지배하는 권력을 자각하고, 그 힘으로 예술마저 조종하려 한다. 그는 요시히데의 청을 승인하면서도, 그것이 딸을 죽음으로 몰아간다는 사실 앞에서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권력자의 광기와 냉혈은 요시히데의 예술 속에 남아 영원히 기록되었고,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목격자이자 증거로 그 예술은 존재하게 된다.

화자는 그 중간에 선 목격자로서 이야기의 서사를 이끈다. 그는 “본 대로, 들은 대로”만을 전한다고 말하지만, 그 시선은 철저히 권력에 길들여진 자의 눈이다. 그의 말은 진실을 전달하려 하기보다는 권력자의 이미지를 유지하려는 언어로 가득하고, 그로 인해 우리는 오히려 그 언어의 빈틈 사이에서 더욱 큰 진실을 읽게 된다. 화자는 믿을 수 없는 화자이면서도, 역설적으로 가장 진실된 증언자다. 그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고, 감싸려 함으로써 고발한다.

그리고 딸, 이름 없이 죽어간 한 사람은 작품 내내 말이 없다. 그녀는 침묵 속에서 순결을 잃고, 목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불 속에 사라진다. 그러나 그녀의 침묵은 권력과 예술이라는 거대한 남성적 욕망에 희생된 여성의 전형적 자리를 보여주며, 작품의 도덕적 중심이자 비극의 정점이 된다. 그녀 곁을 끝까지 지킨 원숭이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사랑을 보여주고, 반대로 인간들은 짐승보다 더 야만적이었다.

'지옥변'은 결국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만든 예술은, 인간을 태워야만 완성되는가?”
“예술은 구원인가, 아니면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파멸인가?”

요시히데는 자신의 병풍을 완성했을 때, 완성 그 자체를 '예술적 ‘구원’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병풍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결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그 병풍 뒤에서 타올랐던 피 묻은 진실과, 말하지 못한 자들의 침묵, 그리고 죽음을 넘어서 존재하게 된 예술의 아이러니를 보게 된다.

'지옥변'은 짧지만, 우리를 한참 동안 침묵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 침묵은, 언어가 닿을 수 없는 지옥의 가장자리에 우리가 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무거운 체험이다.


병풍의 묘사는 잊을 수 없다.

My Body Is A Cage - Peter Gabriel

Way Down We Go – Kaleo

Karma Police – Radiohead

Take Me to Church - Hoz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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