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_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초인을 꿈꾼 살인자, 죄에 굴복한 인간.

by LWB

인간 위에 있으려 했다. 그래서, 인간을 지웠다.

정의는 계산이 되었고, 피는 논리였다.

그러나 심장은 침묵하지 않았다.
벌은 법이 아니었고, 죄는 나였다.

나폴레옹의 그림자를 좇던 나는.

결국, 한 여인의 발등 앞에 무너졌다.




페테르부르크의 음습하고 좁은 하숙방에서, 가난한 법대생 로쟈(라스콜리니코프)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거창한 사명감과 함께, 어떤 사상 하나를 품기 시작한다. 그것은 '위대한 인간은 법을 초월할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그는 나폴레옹을 예로 들며, 평범한 인간과 비범한 인간은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 이론의 실험 대상으로, 그는 고리대금업자 알료나 이바노브나를 선택한다. 그녀는 사람들의 피를 빨아 생계를 이어가는 ‘쓸모없는 존재’로, 살해되어도 사회적으로 해가 없다고 판단한다. 그는 도끼를 들고 그녀의 집을 찾아가, 계획대로 살해를 감행한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그녀의 순진한 여동생 리자베타까지 목격자로 함께 죽이게 된다. 그 순간부터 라스콜리니코프의 이론은 균열을 맞기 시작한다.

살인 이후 그는 광기에 가까운 열병에 시달린다. 도망도, 자수도 하지 않은 채 며칠을 방 안에서 비몽사몽으로 지낸다. 몸은 살아 있으나 정신은 무너지고, 자의식은 죄책감과 공포에 휘청인다. 겉으로는 냉정한 척하지만, 내면은 점점 무너진다. 그는 스스로를 ‘선택받은 자’라 여겼으나, 피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인간적인 동요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러던 중, 라스콜리니코프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소냐 마르멜라도바. 그녀는 가난과 절망 속에서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몸을 파는 삶을 선택한, 고통의 화신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 안에는 흔들림 없는 믿음과, 말없는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에게 점점 끌리고,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구원의 가능성을 그녀에게서 느끼기 시작한다.

한편 경찰 측 인물인 포르피리 수사관은 라스콜리니코프를 의심하면서도 법의 테두리를 넘지 않으며, 철학적 대화를 통해 그의 내면을 찌르고 흔든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이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지만, 그의 말과 표정, 행동은 그 진실을 점점 흘려보낸다. 죄는 숨길 수 있지만, 벌은 이미 그의 내부에서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야기의 한 축으로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여동생 두냐와 그녀를 둘러싼 남성들, 교활한 루쥔과 도덕적 분열을 상징하는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등장한다. 이들은 인간의 타락과 이기심, 혹은 자기희생과 고결함을 각각 상징하며, 작품 속 ‘벌’의 다양한 얼굴들을 보여준다. 특히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또 다른 자아’처럼 그려지며, 자살이라는 형태로 그 자신의 벌을 끝맺는다.

결국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의 성경 읽기와 침묵 속의 동행을 통해 조금씩 무너진다. 그는 마침내 소냐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녀의 발등에 입을 맞춘다. 그것은 단지 사랑이 아니라, 무너진 초인이 인간이 되는 의식이었다.

그리고 그는 시베리아로 유배된다. 소냐는 그 뒤를 따르며 조용히 곁을 지킨다. 육체는 갇혔지만, 마음은 서서히 자유로워지는 과정이 시작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합리적 선택’으로 여기던 위치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죄를 ‘인간의 죄’로 받아들인다.

작품은 바로 그 지점에서 끝난다. 죄가 법에 의해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벌이 태어나고 스스로를 정화하는 과정을 통해 구원을 암시한다.




로디온 로마노비치


'죄와 벌'의 주인공 로디온 라스콜리니코프는 단지 살인을 저지른 인물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신이 되려다 실패한 인간’이다. 비범한 인간은 도덕을 초월할 수 있다는 사상을 품은 채, 그는 고리대금업자 알료나를 살해한다. 그것은 정의를 실현하려는 혁명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된 자’ 임을 증명하려는 실험이었다.

그러나 살인 후,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해방이 아니라 침묵이었다. 그의 논리는 완벽했지만, 손끝에 묻은 피는 밤마다 의식을 파고들었다. 그는 두려워했고, 열병에 시달렸으며, 자신이 만든 이론 앞에서 무너졌다. 이 무너짐은 단순한 죄책감이 아니라, ‘위대한 인간이 되지 못했다’는 자각에서 오는 존재론적 붕괴였다.

"인간은 사유만으로 죄를 초월할 수 있는가."
그의 이름 속에는 이미 그 해답이 숨겨져 있다. "라스콜(раскол)" — 러시아어로 '분열'을 뜻하는 이 이름은, 그의 내면을 정확히 투시한다. 그는 두 사람이다. 하나는 사상을 믿는 이성의 인간, 또 하나는 타인의 고통 앞에 떨고, 울고, 사랑하는 감정의 인간.

그가 결국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춘 곳은 소냐의 발등이었다. 그 행위는 단지 용서를 구하는 몸짓이 아니라, ‘초인의 자격’을 내려놓고 인간으로 돌아오겠다는 비언어적 선언이었다. 진정한 구원은 죄를 피하는 데서가 아니라, 그 죄를 껴안고 살아가는 데서 시작된다.


소냐 마르멜라도바


소냐는 '죄와 벌'에서 가장 조용한 인물이지만, 가장 깊은 대답을 품고 있는 존재다. 그녀는 말하지 않는다. 설명하지 않고, 설득하지 않으며, 라스콜리니코프를 고발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묵묵히 그의 곁에 서 있다. 침묵으로 사랑하고, 고통 속에서 동행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그녀가 선택한 삶은 자기희생의 미화가 아니라 생존의 절규라는 점이다. 병든 계모와 어린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매춘을 택한 그녀는, 도덕적으로 ‘타락’했지만 영혼은 누구보다 투명하다.

그녀는 단순한 ‘성녀’가 아니다. 소냐는 신앙과 고통, 사랑과 절망이 뒤섞인 존재다. 그녀가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성경을 건네는 장면은 단순한 종교적 상징을 넘어, 죽음과 죄를 넘어서는 방식은 이성도 초월도 아닌 ‘인간됨’ 그 자체라는 진실을 전한다.
그녀는 가르치지 않고, 다만 함께 걷는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마침내 그녀 앞에 무릎 꿇고 발등에 입을 맞출 때, 그것은 소냐의 위대함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작음’이 품은 거대한 인간성 때문이다. 그녀는 처벌하지 않고, 고백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는 그녀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이 죄를 지은 인간임을 받아들인다. 구원이란, 죄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안고 함께 살아가는 일이다.


스비드리가일로프


'죄와 벌' 속 스비드리가일로프는 흔히 ‘타락한 귀족’, ‘방탕한 인물’로 소개되지만, 단지 악인의 전형이라 보기에는 그의 존재가 너무나 낯설고 기이하다. 그는 두냐를 향한 욕망으로 작품에 등장하지만, 갈수록 그의 위치는 라스콜리니코프의 거울이자, 가능했던 또 다른 결말로 비치기 시작한다.

그는 어떤 윤리도 신앙도 갖지 않은 인간이다. 죄책감은 일시적 감흥처럼 소비되며, 타인의 고통은 일종의 놀이처럼 소비된다. 그는 냉담하고, 허무하고, 자신의 내면조차 믿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이 타락했다는 것을 누구보다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그는 라스콜리니코프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죄의식에 고통받으며 끝내 무릎을 꿇었지만,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고통이 닿기도 전에 스스로를 밀어내고 만다. 그가 마지막에 자살하는 장면은 단순한 파멸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 없는 죄인의 최후’이며, “벌을 선택하지 않은 죄의 끝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대한 차가운 해답이다.

그는 삶을 믿지 못했고, 사랑은 소유로 오해했으며, 죄는 자신을 더럽힐 만큼 깊지 않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그는 구원 앞에서 눈을 감고 외면하며, 살인보다 더 무서운 공허 속에 침잠한 존재로 남는다.

라스콜리니코프가 결국 인간의 길을 택했다면,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그 모든 가능성을 비웃으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떠나는 자다. 죄를 직면하지 않는 자에게, 구원은 과연 찾아올 수 있는가.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


두냐는 '죄와 벌'의 격렬한 사상적 격투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인물이다. 그녀는 빈곤 속에서도 자기 존엄을 지키며, 타인의 시선을 견디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의 고요함은 수동적인 인내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어떤 남성보다 강한 결단력과 자기 통제에서 비롯된다.

작품 초반, 두냐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루쥔과의 약혼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자발적인 희생처럼 보이지만, 실은 철저히 계산된 현실적 선택이다. 그녀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되, 결코 자신을 도구로 전락시키지 않는다. 루쥔이 그녀를 지배하려는 순간, 두냐는 단호히 등을 돌리고 떠난다.

가장 극적인 장면은 스비드리가일로프와의 대면이다. 욕망과 위협 앞에서, 그녀는 총을 든다. 그 손은 떨렸지만, 방아쇠를 당기지 않은 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끝까지 지키려는 절제된 품위였다. 그녀는 자신의 육체로 사랑을 증명하지 않으며, 침묵으로 복종하지 않는다. 두냐는 말로, 눈빛으로, 결단으로 자신의 가치를 끝까지 증명해 낸다.

두냐는 라스콜리니코프와 깊이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그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이다. 오빠가 이상과 죄 사이에서 흔들릴 때, 두냐는 늘 현실의 윤리와 감정의 책임을 붙들고 선다. 그녀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잃어버린 균형, ‘정상성의 윤리’를 체현하는 존재다.

그녀의 선택이 결국 라주미힌이라는 선한 인간과의 결합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두냐는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는 방식으로 오빠의 광기와 세계의 폭력을 거부하고, 결국엔 삶을 선택한다.


드미트리 프로코피치


'죄와 벌'의 세계는 무겁고 절망적이다. 죄는 피를 흘리고, 구원조차 침묵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세계. 그런 가운데, 라주미힌은 거의 유일하게 건강한 이성과 정서, 그리고 밝은 생기를 잃지 않고 서 있는 인물이다.

그는 가난하고 어수룩하며 때로는 수다스럽기까지 하지만, 그 안에는 무너지지 않는 선의와 끈기가 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자기 이론 속에서 점점 무너지고 있을 때, 라주미힌은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킨다. 오해받고 무시당해도, 그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마음만은 꺾이지 않는다.

라주미힌은 지적인 허세나 위선이 아닌, 단순하고 따뜻한 인간성의 가능성을 말한다. 그는 이상도 초인도 되지 않으려 한다. 대신 한 인간의 곁에 머무는 법, 누군가의 고통을 같이 들어주는 법, 사랑을 억지로 말하지 않는 법을 알고 있다.

그는 두냐를 사랑하지만, 그 감정조차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다룬다. 무언가를 소유하려 들지 않고, 상대를 지키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죄와 사상 사이에서 몸부림칠 때, 라주미힌은 오히려 현실을 견디는 윤리와 정직함으로 존재를 지킨다.

그는 이 소설이 펼치는 거대한 도덕적 실험에서 벗어난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무탈함은 ‘가장 작고 확실한 구원의 형태’ 인지도 모른다. 라스콜리니코프가 고통을 통해 인간이 되어가는 동안, 라주미힌은 고통 없이도 끝까지 인간으로 남는 자다.


포르피리 페트로비치


'죄와 벌' 속 포르피리 수사관은 흔한 경찰의 모습이 아니다. 그는 감정을 자극하거나 증거를 들이대며 몰아세우지 않는다. 대신, 그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사상을 이해하려 하고, 그의 ‘논리’의 균열을 지적한다.

처음 등장할 때부터 포르피리는 지적이고, 유머러스하며, 명백하게 ‘무언가를 알고 있는 자’로 묘사된다. 그는 무리한 추궁 대신, 끈질기게 사상에 대해 묻고,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죄의 정당화가 갖는 위험성을 꼬집는다.
그의 질문은 종종 철학적이다. "비범한 인간이란 누구이며, 누가 그 판단을 할 수 있는가?" 그 질문은 사실 라스콜리니코프보다 한발 더 앞서 있다.

그는 ‘법과 윤리’의 균형을 묻는다. 그는 법을 대표하지만, 죄인을 다그치기보다 스스로의 자백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포르피리는 단지 라스콜리니코프를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언제 인간이 될 수 있을지"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 기다림은 심문이 아니라 회심의 가능성을 향한 믿음이다.

이 점에서 포르피리는 단지 수사관이 아니다, 그는 "죄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파열이며, 그 벌은 법정 이전에 이미 시작된다"는 것을 꿰뚫고 있다. 그의 말투는 조용하고, 행동은 유쾌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인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시선’이 있다.

포르피리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말한다. “자수하라. 그래야 네 벌이 시작될 수 있다.” 그 말은 단순한 체포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회복하기 위한 첫걸음을 권유하는 것이다.


마르멜라도프


마르멜라도프는 '죄와 벌'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중 가장 파탄난 인물이다. 그는 알코올중독자이며,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저버렸고, 가족을 궁지로 몰고 가는 인물이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그를 비난의 대상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죄를 누구보다 깊이 자각하고 있는 인간이다.

마르멜라도프는 말한다. “인간은 때로 너무 괴로워서, 자신을 더럽게 만들며 살아가게 된다.” 그의 죄는 방탕이 아니라 절망에서 비롯된 자기 포기이다. 그는 자신이 벌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 벌이 이미 자신 안에서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음을 느낀다.

그는 구원을 거부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추락을 온몸으로 증명함으로써 ‘그래도 용서받을 수 있는가’를 묻는 자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죄를 합리화하려 애썼다면, 마르멜라도프는 죄를 스스로 끌어안고 구걸하듯 말한다. “나는 더럽다. 나는 타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불쌍히 여겨질 수 있을까?”

그의 존재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초인사상과 정반대의 좌표를 제공한다. 이성도 사상도 없이, 인간은 이렇게까지 무너질 수 있다는 참혹한 증거. 그러나 동시에, 그 무너짐 속에서조차 자기 비하가 아닌, 이해받고자 하는 간절함이 살아 있다.

마르멜라도프는 결국 거리에 쓰러져 죽는다. 죽음은 그에게 벌이 아니며, 오히려 고통을 끝낼 하나의 출구였다.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딸 소냐의 사랑이다. 그의 비극은 소냐의 침묵 속에서 이어지고, 라스콜리니코프는 바로 그 사랑에 이끌려 구원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마르멜라도프는 도스토옙스키가 보여주는 인간의 가장 밑바닥이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서조차, “사랑받고 싶다”는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폐결핵에 걸린 병약한 여성이자, 몰락한 귀족 출신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자녀들을 교육시키려 하고, 항상 말투는 고상하다. 그러나 그녀가 마주한 현실은 너무나도 비참하다. 알코올 중독자인 남편 마르멜라도프, 거리로 내몰린 딸 소냐, 먹을 것조차 없는 어린아이들. 그녀는 체면과 존엄 사이에서 천천히 무너져간다.

이 인물은, *“귀족성은 물려받을 수 있는가, 아니면 끝까지 지켜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끝까지 품위를 잃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 지키려는 존엄이 오히려 그녀를 찢어 놓는다.

그녀는 자주 격렬하게 말하고, 감정적으로 폭발한다. 그건 단순한 성격이 아니라, 절망을 고상하게 감내하려는 인간의 비루한 발버둥이다. 사랑받고 싶지만 그럴 수 없고, 도와달라고 외치지만 그 소리는 모욕으로 되돌아온다.

마지막 장면은 비극적이다. 카테리나는 길거리로 나가, 아이들에게 춤과 노래를 시키며, 결국 피를 토하고 쓰러진다. 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육체의 쇠약이 아니라, 자존의 절멸이다.

소냐가 침묵으로 고통을 견디는 인물이라면, 카테리나는 존엄이라는 칼날로 스스로를 긋는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몰락했다는 사실’을 끝까지 인정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가장 불쌍하고, 가장 비극적인 인간이다.

그녀의 광기는, “존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을 지킬 때 죽음에 이르는가”를 묻는다. 카테리나는 외친다.
“나를 기억하라. 나는 한때 고귀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바로 그 외침이, '죄와 벌'의 세계에서 가장 처절한 인간의 자기 증명이 된다.


풀헤리아 알렉산드로브나


풀헤리아 알렉산드로브나는 '죄와 벌' 속 라스콜리니코프의 어머니이자, 시들고 무력한 사랑의 상징이다. 그녀는 언제나 아들을 걱정하고, 믿고, 기대한다. 그녀의 편지는 애정과 기대, 그리고 무지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 사랑은 단 한 번도 아들의 내면에 정확히 도달하지 못한다.

그녀는 아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애초에 그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감지하지 못한다. 외면에서 보이는 것만을 보며, ‘내 아들은 위대한 일을 할 사람’이라는 과거의 기억 속 환상을 붙잡고 살아간다. 그 사랑은 따뜻하지만, 동시에 무력하고, 시대에 뒤처져 있으며, 아들의 고통을 심화시키는 요소이기도 하다.

풀헤리아는 우리에게, 부모 세대가 자식을 향한 사랑으로 죄를 덜어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결국, 그 사랑은 실패한다. 풀헤리아는 끝까지 아들을 믿고 기다리지만, 아들의 진짜 얼굴은 끝내 알지 못한 채 죽는다.

그녀는 세상과 단절된 사랑을 지녔고, 그 사랑은 소통 없는 기도처럼 허공에 머문다. 라스콜리니코프에게 풀헤리아는 짐이자 죄책감이며, 동시에 버릴 수 없는 마지막 연줄이다. 그는 그녀를 위해 희생할 수는 없지만, 그녀를 향한 고통을 끝까지 끌어안고 살아간다. 풀헤리아 알렉산드로브나는 죄를 지은 자의 어머니로서, 벌을 받는 자의 어머니로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너져가는 존재다.


표트르 페트로비치 루쥔


루쥔은 '죄와 벌' 속에서 누구보다도 도덕적인 척 하지만, 실제로는 도덕을 자신의 지배 도구로 이용하는 인물이다. 그는 가난한 두냐와의 결혼을 통해 자신의 우월함을 공고히 하려는 속셈을 품고 접근한다. 동정하는 척하지만, 그 동정은 결코 상대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아래에 두기 위한 계산된 자세일 뿐이다.

루쥔은 도스토옙스키가 그려낸 현대적 위선자다. 그는 감정을 이성으로 가장하고, 욕망을 ‘도움’이라는 명분으로 위장한다. 그의 언어는 언제나 예의 바르고 논리적이지만, 그 속에는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과 자기 보존만이 숨겨져 있다.

그가 두냐와 결혼하려는 이유는 사랑이 아니다. 그는 말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빚을 져야 한다.” 그 말 한마디에 루쥔이라는 인간의 철학과 욕망이 모두 담겨 있다. 그는 구조적으로 여성 위에 서는 관계를 원하는 인간이며, 작품은 이를 통해 사회적 ‘합리성’이 도덕을 어떻게 악용할 수 있는가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위대한 인간’이 되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면, 루쥔은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고 타인을 짓밟는 비열한 방식의 초인을 꿈꾼다. 그는 죄를 짓지 않지만, 그의 행위와 사고는 죄보다 더 차가운 무관심과 자기애로 가득 차 있다.

결국 두냐는 그를 거절하고, 라스콜리니코프조차 그의 천박함에 격렬히 반응한다. 루쥔은 실패한다. 그의 실패는 계획의 실패가 아니라, ‘인간됨’의 결핍이 드러난 순간의 파산이다.

루쥔은 '죄와 벌'이 그려내는 ‘도덕적 타락’의 또 다른 얼굴이다. 그는 칼을 들지 않지만, 말로, 구조로, 지위로 타인을 찌른다. 누가 죄인인가?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자는, 과연 죄로부터 자유로운가.


알료나 이바노브나


알료나 이바노브나는 '죄와 벌'에서 가장 먼저 죽는 인물이지만, 가장 오랫동안 살아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녀는 극도로 탐욕스럽고, 차갑고, 고리대금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숨통을 조이는 인물로 묘사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녀를 “인류에게 해가 되는 존재”, “사회에 제거되어야 할 기생충”으로 규정한다.

알료나는 '죽어 마땅한 존재'로 그려지지만, 동시에 ‘살아 있는 인간’이다. 그녀의 존재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사상을 시험하는 도구로 기능하지만, 그 사상이 실제 살인으로 이어지는 순간, 그는 이론의 정당성보다도 피비린내와 떨림에 압도된다.

알료나는 죄 없는 순수한 존재는 아니다. 그러나 그녀를 죽일 자격을 가진 자도 이 세상에는 없다.
그녀의 죽음은 '도덕적 우월감이 범죄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이 세상에서 누구를 죽여도 된다면, 그건 이런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그는 살인의 철학적 타락에 발을 들인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녀가 죽고 나서도 작품의 중심에 계속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죽음 이후, 라스콜리니코프는 ‘도대체 그녀가 진짜 죽어도 되는 인간이었는가?’를 반복해서 묻는다. 그 질문은 곧 ‘나는 누구를 심판할 자격이 있었는가?’로 바뀐다.

알료나 이바노브나는 인간의 ‘쓸모’를 재단하려는 위험한 이성의 희생자다. 그녀는 단지 죽은 노파가 아니라, ‘무가치함’이라는 이름으로 제거된 존재이며, 바로 그 순간 라스콜리니코프 자신이 도덕의 바깥으로 추락했음을 선언하게 된 계기다. 정의란 무엇인가. 누가 무가치한 인간을 결정할 수 있는가. 우리가 만든 이론 앞에서, 인간의 생명은 정말로 가벼워져도 되는가.


리자베타 이바노브나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죄와 벌'에서 고리대금업자 알료나 이바노브나의 여동생으로, 지극히 순하고 조용한 여성이다. 그녀는 말을 거의 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늘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소냐와 친구였고,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으며, 누군가의 ‘문제’가 된 적도 없다.

그러나 라스콜리니코프의 도끼는, 바로 그런 그녀를 겨눈다. 그녀는 단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죽는다. 예정되지 않았고, 의도하지 않았으며, 계획에도 없던 살인. 그 순간 라스콜리니코프가 믿었던 모든 사상의 토대가 무너진다.

그는 고리대금업자인 알료나를 ‘해악을 끼치는 쓸모없는 존재’로 판단했다. 그러나 리자베타는 그 어떤 해악도 끼치지 않은 존재다. 그녀의 죽음은 어떠한 이론으로도, 윤리로도, 역사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희생이다.

리자베타는 죽은 이후에도 지워지지 않는 죄의 상징으로 남는다. 알료나의 피는 논리의 오류를 묻고, 리자베타의 피는 존재론적 질문을 묻는다. “나는 왜, 무엇을 위해, 누구를 죽인 것인가?”

그녀는 단 한 줄의 대사도 없이, 그러나 작품 전체를 가로지르는 침묵의 심판자로 존재한다. 그녀는 말하지 않았고, 저항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 무저항의 존재를 죽였다는 사실은 라스콜리니코프가 스스로를 더 이상 인간이라 말할 수 없게 만드는 핵심이 된다. 리자베타는 '죄와 벌'에서 가장 조용한 인물이지만, 그 조용함은 라스콜리니코프의 논리를 부숴버린 절대적 침묵이었다.




누군가를 ‘쓸모없는 인간’이라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은 누구에게 있는가.


이 물음의 비극은, 이미 그 질문을 던지는 순간 시작된다. 이 질문은 곧바로 가치의 기준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그 질문 자체가 함정이다. 우리가 그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이미 인간을 어떤 기준에 따라 ‘쓸모 있음’과 ‘없음’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게 된다.

즉, “누가 판단할 수 있는가?”라는 외적 윤리의 문제인 동시에, “그런 판단이 가능한가?”라는 근원적 오류의 문제이기도 하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이 그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그는 지적이었고, 정의로웠고, 사회적 이상을 품고 있었으며, ‘더 나은 세상’을 꿈꿨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파멸을 통해 보여준다.

인간을 ‘쓸모’로 판단하는 순간, 그 사람을 판단하는 자 또한 인간으로서의 윤리를 잃는다. 죄는 살해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그가 '이 인간은 죽어도 된다'라고 믿는 순간 시작되었다.

현대 사회는 이 질문에 더 익숙하다. 우리는 생산성과 효율성, 능력, 외모, 연봉, 역할, 심지어 팔로워 수로 사람의 존재 가치를 평가하곤 한다. 그러나 인간은 ‘할 수 있는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존재다.

도스토옙스키는 알료나를 통해 묻는다. “설령 그녀가 탐욕스럽고, 타인을 착취하며 살아간다 하더라도, 그녀를 제거할 수 있는 자격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그 대답은 작품 전체를 통해, 그러나 침묵으로 반복된다. 그 누구도 그 질문을 끝까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도 ‘쓸모없다’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말을 입에 담는 순간, 우리 자신이 타인의 도구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기 때문이다. ‘쓸모’를 기준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자신이 그 기준에 따라 버려질 수 있다는 공포 속에 살아가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이 질문은 단지 도덕의 경계를 묻는 게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를 묻는 것이다. '죄와 벌'은 이 질문 앞에서 아무도 완전하지 않음을 말한다.


벌은 언제 시작되는가. 법적 선고 이후인가, 아니면 죄책감이 시작된 순간부터인가.


죄는 도끼로 시작됐지만, 벌은 침묵으로 시작됐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알료나를 살해하고도 바로 잡히지 않는다. 법은 그를 아직 모르고, 세상은 여전히 그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잡혀 있다. 누구에게? 그 자신에게.

'죄와 벌'은 단순히 '범죄와 처벌'을 다루는 이야기가 아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법적 선고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벌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을 저지른 직후 열병에 시달리고, 정신은 흐려지고, 자신의 이론이 지탱하던 '나는 비범한 인간이다'라는 정체성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 순간, 그는 형무소에 있지 않지만, 이미 ‘형벌’ 안에 있다.

벌이란 무엇인가? 도스토옙스키에게 벌은 죄를 자백한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이 나를 심판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의 사유가 더 이상 자신을 감싸지 못하고, 양심이라는 내부 법정이 나를 고개 들지 못하게 만들 때 바로 그 순간에, 벌은 시작된다.

책은 말한다. 법은 죄를 판단하지만, 벌은 인간을 깨운다. 그리고 진짜 벌은 “내가 더 이상 나 자신과 함께 있을 수 없는 상태”에서 온다. 즉, 벌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내부에서 부서지는 경험이다.

이 해석에서 보면, 라스콜리니코프가 유배를 떠나는 것은 벌의 시작이 아니라, 벌을 견디기 위한 공간에 들어가는 것이다. 벌은 이미 그가 알료나의 시신 앞에 멍하니 서 있던 순간부터, 소냐 앞에 무릎을 꿇던 바로 그 순간부터 한참 전에 시작되고 있었다.

고통은 인간을 구원하는가.


고통은 벌이 아니라, 인간이 다시 인간이 되는 감각이다. 도스토옙스키에게 고통은 단지 인생의 부작용이 아니다. 그는 고통을 인간 존재의 핵심적인 조건이자, 진실에 도달하는 통로로 본다. '죄와 벌' 속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 그러나 그에게 진짜 변화는, 법의 형벌이 아니라 고통 속에 머무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고통은 그를 부순 것이 아니라, 그를 깨어 있게 만든 것이었다.

그는 열병을 앓고, 자책하며, 죄책감에 휘청인다. 이성은 논리를 대지만, 그의 몸과 감정은 반응한다. 그 반응은 인간으로서의 감각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죄는 사상으로 시작되지만, 회심은 고통 속에서만 태어난다. 하지만, 고통은 무조건 구원의 조건인가? 아니, 도스토옙스키는 그렇게 단순히 말하지 않는다. 고통은 '조건'이 될 수 없다. 고통은 가능성일 뿐이다. 그것은 인간을 절망으로도, 회심으로도 이끌 수 있는 양면적인 문이다.

고통이 구원을 낳으려면, 그 고통을 자신의 내면을 마주할 용기와 감각으로 견뎌야 한다. 도망치지 않고, 자기 연민으로 빠지지 않고, 그 안에서 타인을 다시 보고, 자기 자신을 똑바로 직면할 때 고통은 정화로 바뀌기 시작한다.

소냐는 고통 속에서 신을 놓지 않았고, 라스콜리니코프는 고통 속에서 인간을 다시 배운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고통을 피해 도망치다가, 끝내 삶을 포기한다. 그 차이는 ‘고통’의 유무가 아니라, 그 고통을 어떤 시선으로 통과했는가에 있다. 고통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고통 없이는, 인간은 아무것도 진심으로 알지 못한다.”

그는 신이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끝내 자신을 외면하지 못하도록 고통을 남겨둔 것이라 본다. 고통은 신의 벌이 아니라, 인간됨을 되찾기 위한 마지막 감각이다.

작가는 고통을 미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을 견뎌낸 자만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자격을 얻는다는 것, 그 진실을 '죄와 벌'로 우리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선한 목적을 위한 악한 수단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을 결심하며 스스로를 신의 자리에 세운다. 그는 말한다. “쓸모없는 인간 하나를 없애고, 그 돈으로 수많은 생을 구할 수 있다면 그건 죄가 아닌 선이다.” 선한 목적을 위한 악한 수단, 그는 그 유혹에 넘어간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붕괴를 통해 묻는다.
“당신은 누구의 삶을, 누구의 죽음을 판단할 권리가 있는가?”

라스콜리니코프가 말한 ‘선’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 그것은 오직 그 개인의 관념 속 정의였다. 그는 자신이 본 알료나 이바노브나의 악을 근거로 그녀를 제거하지만, 그 판단은 타인의 삶을 철저히 수단화한 폭력이다. 결국 그는 선을 위한 살인을 저질렀지만, 더 이상 누구도 돕지 못하는 인간이 된다. ‘선’이라는 목적은 ‘악’한 수단을 택한 순간, 그 정당성을 잃는다.

도스토옙스키는 우리에게 ‘목적’이 아닌 ‘수단’에서 인간의 윤리를 본다. 목적은 타인을 도구로 전락시킬 수 있지만, 수단은 그가 인간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드러낸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사람을 심판할 수 있다고 믿는 스스로의 오만을 드러냈고, 그 오만은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

결국 '죄와 벌'은 묻는다. “선한 목적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인간을 죽이는 자는 과연 선한가?” 그는 살인을 통해 타인을 구하고자 했지만, 도스토옙스키는 말한다. “그 누구도, 인간을 수단으로 삼을 권리는 없다.”

'죄와 벌'의 윤리는 이 한 문장으로 귀결된다. 수단이 인간을 증명한다.


초인사상은 인간의 존엄을 확장하는가, 파괴하는가.


니체의 초인사상은 인간을 극복하라 말한다. 기존 도덕과 제약을 넘어, 스스로 규범을 세우는 존재, 법과 신의 질서를 초월한 자.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을 그 ‘초인’의 길목에 세운다. 그는 말한다. “나폴레옹은 수많은 피를 흘리고도 영웅이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안 되는가?”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신이 되려는 자였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냉혹하게 되묻는다. “그 초월은 누구의 존엄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는가?”

라스콜리니코프는 타인의 생을 도구로 여긴다. 그가 죽인 것은 한 인간의 생명만이 아니다. 그 행위 속엔 인간을 판단 가능한 존재로 전락시킨 철학적 폭력이 있었다. 초인이 되려는 자는 먼저 ‘평범한 인간’을 규정짓고, 그 위에 자신을 세운다. 그러나 바로 그 구분 자체가 인간의 존엄을 훼손한다. 누군가를 하등한 존재로 구분하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동등한 존재가 아니다.

초인사상이 인간의 존엄을 확장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할 때뿐이다. 스스로를 넘어선다는 의미에서의 초인은 고통과 절망을 견디며 책임지는 인간의 형상이지만, 타인을 넘어서는 순간 그것은 폭력과 우월의 언어로 바뀐다.

'죄와 벌'은 그 붕괴의 기록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신이 되려다, 결국 인간의 고통 앞에 무너진다. 초인은 인간을 초월했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을 버렸다. 진짜 인간은, 신이 되려 하지 않는다. 인간임을 견디는 자가 초인이다.


구원은 누구에게 허락되는가.


심판은 위에서 오는가, 아니면 안에서 시작되는가. 구원이란 무엇인가. 신의 자비인가, 사회의 용서인가, 아니면 자신과의 화해인가.

라스콜리니코프는 법적으로는 유죄지만, 그보다 앞서 마음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를 벌한 것은 법정이 아니라 죄책감, 즉 내면의 법정이다. 그는 자백 전부터 무기력하고 병들었으며, 자신을 정당화하던 초인사상이 무너지자 ‘살아남은 자’로서의 벌을 견디지 못하고 흔들린다. 구원은 이 지점에서 가능성을 가진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 스스로의 심판을 회피하지 않는 자.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또 하나의 조건을 제시한다. 그것은 ‘사랑’이다. 이때의 사랑은 감정적 애착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함께 지는 행위로써의 사랑이다. 소냐는 그 상징이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와 죄를 묻지 않는다. 다만 “같이 가자”고 말할 뿐이다. 구원은 자기혐오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다시 ‘인간’으로 복귀하려는 몸짓에서 시작된다.

결국, 도스토옙스키는 구원의 조건을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의 죄를 살아낼 용기가 있는가?” 구원은 죄가 없는 자가 받는 것이 아니라, 죄를 부인하지 않는 자에게만 허락된다. 스스로 무너진 자가 다시 일어설 때, 거기엔 신보다 더 인간적인 구원이 있다.


타인을 용서하는 것과, 스스로를 용서하는 것, 무엇이 더 어려운가.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이자, 끊임없이 자신을 심판하는 재판관이기도 하다. 그는 법의 판결 이전에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되묻는다. “나는 누구를 죽였는가?”에서 시작된 질문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의 심연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이때 용서란 단지 ‘사건’을 덮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전체를 다시 직면하는 고통을 포함한다.

타인을 용서하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은 외부로 향한 것이다. 잘못을 던진 상대와의 관계 안에서 끝난다. 그러나 스스로를 용서하는 일은 전혀 다르다. 그것은 과거의 ‘행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저질렀던 자신의 본질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그런 나도 나였다”는 고백 앞에 서는 일. 이건 심판보다 더 잔인한 감정의 노동이며,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을 미워하면서도 자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모순은, 타인을 향한 분노보다 훨씬 더 깊고 오래 남는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의 눈물 앞에서 무너진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이해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눈을 통해 자기 자신을 처음으로 마주한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처음으로 '용서받고 싶다'고 느꼈다. 결국, 타인을 용서하는 것은 인간관계의 회복이지만, 스스로를 용서하는 일은 무너진 자아의 회복이다. 더 어렵고,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용서, 그것이 바로 ‘구원’의 시작점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단순한 범죄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범죄를 둘러싼 윤리적 고발이자, 존재의 밑바닥에서 다시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이야기다. 작가는 질문한다. “죄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벌은 어디서 끝나는가?” 그리고 그 물음은 단지 법과 도덕의 경계선이 아니라, 존엄과 절망의 가장 내밀한 틈에서 피어난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초인사상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선택받은 인간'이라 믿고, ‘쓸모없는 인간’을 제거함으로써 세상을 정화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알료나 이바노브나를 죽인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죽인 것이 한 인간이 아니라, 자기 안의 윤리, 연민, 자기 존재의 근거였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죄와 벌'은 인간이란 무엇인지, 누가 누구를 심판할 수 있는지, 죄와 벌은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끝나는지를 강박적으로 묻고, 끝까지 추적하는 이야기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단순히 처벌을 받는 인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의 무너진 신을 다시 일으키려는 인간이다. 그의 방황은 사상의 파산이며, 그의 침묵은 죄책감이라는 감정의 무게다. 그는 끝내 무릎 꿇지만, 그 무릎은 두려움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고백이다.

우리가 '죄와 벌'을 읽는다는 것은, 라스콜리니코프의 내면을 따라 스스로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은 언제 죄인이 되는가? 살인을 저질렀을 때? 아니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때? 그리고 인간은 언제 구원받는가? 판결을 받았을 때? 아니면,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 때?

도스토옙스키는 어떤 해답도 쉽게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야기 전체를 하나의 질문으로 만든다. ‘선한 목적을 위한 악한 수단’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고통’은 인간을 정화할 수 있는가? ‘타인을 용서하는 것과 스스로를 용서하는 것’ 중, 무엇이 더 어려운가? 이 질문들 속에서 우리는 라스콜리니코프가 된다. 혹은 그를 심판하는 포르피리가 된다. 아니면, 그의 구원을 조용히 기다리는 소냐가 된다.

'죄와 벌'은 말한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기에, 죄를 짓는다. 그러나 인간은 동시에, 완전히 망가진 자기 자신을 끝까지 껴안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 순간, 인간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비록 모든 것을 잃었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도.

이 책은 단지 "죄를 지은 자가 벌을 받는다"는 도식이 아니라, "벌을 통과하며 죄의 깊이를 인식하고, 끝내 그 죄를 감싸 안을 수 있는 자가 진정한 인간"이라는 선언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범죄와 형벌의 이야기이기 전에, 사랑과 회복, 그리고 존재의 재건에 대한 깊은 기도다.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Skyfall - Adele

All of Me - John Legend

Use Somebody - Kings of Leon

Stay With Me - Sam Smith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