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농장_조지 오웰

돼지들은 노래하고, 초원은 춤을 춘다.

by LWB


처음엔 노래였다.
그것은 부드럽고, 이상에 닿은 선율이었다.

그러나 돼지들이 입을 열자
노래는 방향을 바꿨고,
초원은 그 박자에 맞춰 흔들렸다.

발굽이 리듬을 기억하는 사이,
진실은 땅 속으로 스며들었다.

노래는 멈추지 않았지만,
아무도 그 가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영국 시골의 매너 농장에서, 인간의 착취 아래 살아가던 동물들이 한 마리 늙은 수퇘지, 메이저의 연설을 듣고 각성한다. 그는 동물들이 인간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죽음 이후, 동물들 사이에서 혁명의 불씨가 번지고, 결국 인간 주인 존스를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동물들은 농장의 이름을 ‘동물 농장’으로 바꾸고, 7가지 계율을 벽에 새기며 새로운 체제를 수립한다. 그들은 모두가 평등하며, 인간과 같은 생활방식을 금지하고, 각자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살아가기로 다짐한다. 초기에는 돼지들이 똑똑하다는 이유로 리더가 되어 운영을 맡게 되며, 스노우볼과 나폴레옹이라는 두 돼지가 중심 인물이 된다.

처음에는 모든 동물들이 이상을 믿고 협력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돼지들은 점차 특권을 누리기 시작한다. 우유와 사과를 독점하며, 사람과의 교섭도 돼지들이 독단적으로 처리한다. 특히 나폴레옹은 몰래 강아지들을 데려다 자신의 사병으로 키우며, 권력 기반을 다져간다.

스노우볼이 풍차 건설을 통해 농장을 발전시키자고 주장하지만, 나폴레옹은 토론 도중 사병들을 풀어 스노우볼을 추방하고 독재체제를 수립한다. 이후 그는 모든 결정을 혼자 내리고, 스퀼러라는 돼지를 통해 거짓 정보를 퍼뜨려 동물들을 세뇌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돼지들의 생활은 인간을 닮아가고, 초기의 7계명은 슬그머니 바뀌거나 삭제된다. 그럼에도 동물들은 혼란을 감지하면서도 자신들의 기억을 의심하거나, 나폴레옹과 체제를 믿으려 애쓴다. 가장 충직하고 성실한 노동자였던 말 복서 역시 끝까지 나폴레옹을 신뢰하며 일하다가 다쳐 쓰러지고, 병원으로 이송된다는 말과 달리 사실은 도살장으로 보내진다.

점차 돼지들은 두 발로 걷기 시작하고, 인간처럼 옷을 입고 지팡이를 들며, 심지어 인간들과 연회를 벌인다. 다른 동물들이 그 모습을 창문 너머로 바라볼 때, 그들은 돼지와 인간의 얼굴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이상과 혁명은 무너졌고, 권력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셈이다. 다만, 그 권력의 주인이 인간에서 돼지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메이저


모든 혁명에는 누군가의 목소리로부터 비롯된 최초의 불꽃이 있다. '동물 농장'에서 그 시작을 연 존재는 돼지 메이저다. 그는 한밤중, 다른 동물들을 불러 모아 인간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세계, 모든 동물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미래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이상을 담은 노래, '영국의 짐승들'을 전하며 공통된 꿈과 연대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남긴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그의 말은 계율로, 계율은 곧 체제로, 체제는 독재로 바뀌는 길의 출발점이 된다.

메이저는 흔히 마르크스 혹은 레닌에 대응하는 인물로 해석된다. 그는 사상과 이상을 제공했지만, 그 사상이 실현되는 과정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했다. 그의 말은 도덕적 외침으로서 강력했지만,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나 권력에 대한 경계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유산은 이상과 독재 사이의 진공 상태에 놓이게 되고, 그 틈을 나폴레옹이 채워 넣는다.

문학적으로 볼 때, 메이저는 죽은 자이지만 동시에 가장 오래 살아 있는 목소리다. 그가 직접 말하지 않아도, 동물 농장의 모든 구호와 계율, 그리고 모든 조작과 왜곡의 출발에는 그의 말이 인용된다. 이는 이상이 실현되지 않을 때, 그 이상이 어떻게 악용되는지를 보여주는 문학적 아이러니다. 그의 이상은 점차 곡해되고, 노래는 금지되고, 계율은 지워진다. 하지만 그가 처음 불러낸 ‘꿈’이라는 단어만은 끝내 모든 것을 감싸는 명분으로 남는다.

결국, 메이저는 꿈을 말한 자였지만, 그 꿈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완성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은 자였다. 그는 혁명을 태동시켰지만, 혁명을 방치한 자, 이상주의의 순결함과 비극을 동시에 상징하는 존재다. 그의 목소리는 사라졌지만, 그 이름은 지워지지 않은 채 농장의 모든 거짓과 배반 위에 조용히 떠 있다.


나폴레옹


'동물 농장'의 가장 중심적인 인물은 단연 돼지 나폴레옹이다. 그는 혁명의 동지로 등장하지만, 권력을 장악한 이후 스스로 독재자가 되며 농장의 모든 시스템을 철저히 장악하고 조작한다. 스노우볼을 폭력으로 몰아내고, 강아지들을 사병으로 길러 공포를 조성하며, 스퀼러를 통해 거짓 선전을 퍼뜨리는 그는 ‘권력은 이상을 필요로 하지만, 결국 그것을 억압한다’는 진실을 몸소 보여주는 존재다.

나폴레옹은 흔히 스탈린의 풍자적 인물로 해석되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다. 그는 인간의 흉내를 내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되풀이하는 권력 그 자체다. 두 발로 걷고, 옷을 입고, 지팡이를 든 그 모습은 진화가 아니라 퇴화이며, 인간성과 동물성의 경계를 지워버린 야만의 진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가 독자적인 괴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복서의 무조건적인 충성, 양들의 반복적인 구호, 벤저민의 냉소적인 침묵, 그리고 대중의 무지가 그를 가능하게 만든 토대였다. 나폴레옹은 한 명의 지배자가 아니라, 모두가 외면한 진실의 축적물이며, 침묵과 망각으로 빚어진 군주의 얼굴이다.

혁명은 그를 통해 완성되었지만, 이상은 그에게서 가장 먼저 파괴되었다. 그가 농장을 지배하는 장면은, 역사의 순환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지배자의 얼굴은 달라졌지만,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스노우볼


스노우볼은 메이저의 이상을 가장 열정적으로 실현하고자 했던 존재였다. 혁명 직후 그는 동물 농장의 교육을 조직하고, 글을 모르는 동물들에게 문해를 가르치며, 체계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려는 계획을 펼친다. 특히 농장의 장기적 발전을 위한 풍차 건설을 제안하고, 그 설계와 노동 계획까지 책임지며 이상과 실천의 중간 다리를 스스로 떠맡는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폭력에 의해 추방당한 후, 그는 체제 내에서 존재 자체가 삭제되며 모든 실패와 불만의 희생양으로 전락한다.

스노우볼은 흔히 트로츠키에 대응하는 인물로 읽히며, 혁명의 이론가이자 실천가로서 보다 진보적이고 능동적인 방향을 제시하려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추방은 단순한 정치적 숙청 그 이상을 상징한다. 그것은 곧 토론의 종식, 다원성의 붕괴, 그리고 절대 권력으로의 전환을 뜻한다.

스노우볼은 실현되지 못한 이상이자, 기억에서 지워지는 진실의 얼굴이다. 그는 살아 있지만, 체제는 그를 없던 것처럼 만든다. 그는 거짓된 과거 속에 삽입되고, 모든 실패와 불운의 원인으로 비난당하며, 결국 ‘기억의 조작’이 어떻게 이념을 다시 쓰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기능한다.

스노우볼의 존재는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만약 그가 남아 있었다면, 농장은 지금과 달라졌을까? 하지만 이 질문은 소설 속 동물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잊도록 훈련받고, 그의 흔적을 떠올리는 일조차 금기시된다. 그렇게 스노우볼은 패배한 것이 아니라, 말살된 이상으로 남는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그림자는 계속 왜곡된 언어 속에서 죽임을 당한다. 그의 진실은 침묵 속에 파묻히고, 그 침묵은 나폴레옹의 권력을 더욱 두텁게 만든다.


스퀼러


나폴레옹의 곁에서 언제나 진실을 ‘번역’하는 자로 등장한다. 그는 농장의 공식 대변자처럼 행동하며, 동물들이 혼란을 느낄 때마다 나타나 부드럽고 논리적인 말투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정당화한다. 돼지들이 우유와 사과를 독점하는 이유, 계명이 슬그머니 바뀐 이유, 스노우볼이 사실은 반역자였다는 주장, 그 모든 거짓은 스퀼러의 말이라는 껍질 속에서 진실처럼 포장된다.

그는 역사적으로 소련의 선전기관, 특히 '프라우다'나 국가 선전 기구에 대응하며, 정치적 목적을 위해 언어와 정보를 조작하는 권력의 입이다. 하지만 스퀼러는 단순한 선전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는 '동물 농장' 전체에서 진실이 어떻게 왜곡되고, 기억이 어떻게 재구성되며, 말이 어떻게 행동보다 우위에 놓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인물이다.

스퀼러의 말은 언제나 완곡하고 논리적이지만, 그 논리는 비틀리고 조작된 기억 위에 세워져 있다. 동물들이 막연히 불편함이나 의심을 느낄 때, 그는 그 불편을 ‘설명’함으로써 의심 대신 죄책감을 심어준다. 이때 스퀼러는 단순히 거짓을 말하는 자가 아니라, 진실을 말하지 못하도록 길들이는 자다.

그는 말의 부패, 언어의 타락을 구현한 인물이다. 그의 존재는 단지 지배자의 도구가 아니라, 지배 그 자체의 핵심 메커니즘이 언어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권력이 유지되는 건 무력이 아니라, 그 무력을 ‘정당화하는 말’이 있기 때문이라는 진실. 그리하여 스퀼러는, 진실이 아닌 말이 진실처럼 받아들여질 때 어떤 세계가 도래하는지를 경고하는 존재다.

스퀼러는 자신이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 알면서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진실이 침묵할 때 말이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말하는 얼굴이다.


복서


'동물 농장'에서 가장 성실하고 가장 강한 존재다. 그는 단 한 번도 체제를 의심하지 않으며, 농장이 힘들고 상황이 나빠질수록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조용히 믿는다. 그의 좌우명은 두 가지다. “나는 더 열심히 일하겠다” “나폴레옹은 언제나 옳다.” 이 짧은 두 문장은 복서라는 존재의 전부를 요약하며, 동시에 그가 왜 희망이 아니라 비극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복서는 단순한 근육 덩어리가 아니다. 그는 동물들 사이에서도 가장 신뢰받는 존재이며, 진심으로 농장을 위하고, 다른 이들을 걱정하고, 자신의 육체를 바쳐 공동체를 지탱한다. 그러나 바로 그 무조건적인 헌신과 맹목적인 믿음이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그가 다쳐 쓰러진 뒤, 스퀼러는 그를 병원에 보낸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를 실어간 수레는 도살장의 마차였고, 동물들은 그를 위한 작별의 말조차 할 수 없었다. 며칠 뒤, 돼지들은 복서를 기념하며 술을 마신다. 그 술이 복서의 몸에서 사라진 피의 대가로 구매되었음은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복서는 흔히 러시아 혁명 당시의 노동자 계급 또는 권력에 의해 착취당하는 무지한 다수를 상징한다고 해석된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계급이 아니다. 그는 이상주의가 왜 실패하는지를 가장 비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이상은 믿음 없이는 실현될 수 없지만, 비판 없는 믿음은 언제나 체제의 도구로 전락한다.

복서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느끼지만,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 그는 말을 하지 못한 게 아니라, 믿음을 저버리는 것을 두려워했던 존재였다. 그 침묵은 고결하지만, 그 침묵이 자신을 파멸시킨다. 그리고 그 침묵은, 모든 체제가 가장 원하고 가장 쉽게 소비하는 미덕이 된다.

복서는 '동물 농장' 전체에서 가장 도덕적인 존재였지만, 결국 도덕은 기억되지 않고, 체제만이 술을 따른다. 그는 영웅이 아니었고, 순교자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말하지 않은 자의 말없는 죽음으로 사라졌다.


양들


양들은 개별적인 이름이나 목소리를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자주 소리를 내는 존재이며,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말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단순한 구호를 반복한다. 혁명 초기에는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 혁명 후반, 돼지들이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 곧바로 구호는 바뀐다.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더 좋다.”

양들은 자신들이 말하고 있는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기억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소리의 리듬을 따라 말하며, 체제의 논리가 아닌 체제의 음성을 제공한다. 이때 양들은 단지 어리석은 존재가 아니라, 권력 구조 안에서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된다.

토론이 시작되려 하면, 양들의 합창이 그것을 묻는다. 의심이 싹트려 하면, 그들의 반복은 공기를 메운다. 스퀼러가 말을 조작하고, 나폴레옹이 행동을 왜곡할 때, 양들은 그 왜곡에 음악을 붙여주는 존재다.

양들은 대중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들은 무조건적으로 대중을 비하하는 상징이 아니다. 양들의 반복은 고의가 없는 폭력이며, 바로 그 무의식적 반복이 가장 견고한 독재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더욱 무섭다.

양들은 말을 흘리면서도 말의 본질에 도달하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말’의 껍데기를 가지고 있지만, ‘의미’를 담지 못한 채 구호로 움직이고, 구호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구호가 바뀔 때, 그들은 질문하지 않는다. 그저 리듬을 다시 외울 뿐이다. 그 점에서 양들은 언어의 타락을 가장 순수하게 구현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말이 진실보다 더 크고 더 자주 들린다.


클로버


클로버는 복서와 함께 일하는 암말로, 폭력적인 체제 안에서도 가장 따뜻한 감정과 연민을 간직한 존재다. 복서가 ‘일’을 신념으로 삼았다면, 클로버는 ‘돌봄’과 ‘기억’을 신념 삼아 살아간다. 그녀는 모든 것을 의심하면서도, 그 의심을 말로 꺼내지 못하고 가슴 안에 접어 넣는 인물이다.

계명이 하나씩 바뀌어도, 돼지들이 옷을 입고 술을 마셔도, 복서가 수레에 실려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도, 클로버는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낀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직접적으로 체제를 부정하거나 나폴레옹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녀는 다만 침묵 속에서 눈을 돌리고, 다시 일어나는 방법을 찾으려 애쓴다.

이 침묵은 복서의 침묵과는 결이 다르다. 복서는 의심하지 않는 침묵이지만, 클로버는 의심하지만 말하지 못하는 침묵이다. 그녀의 말없음은 체제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그 체제를 어떻게 부정해야 할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복서의 파괴적인 노동성 대신, 관찰하고 보살피는 존재로서 농장의 슬픔을 감당한다. 그녀의 시선은 말하지 않아도 모든 변화를 목격하며, 그 시선은 우리에게 체제 내부의 균열과 고통을 느끼게 하는 창이 된다.

클로버는 말을 잃은 자들의 내부에서 마지막까지 살아 있는 감각을 상징한다. 그녀는 이데올로기의 언어를 믿지 않지만, 그 언어의 바깥에서 살아갈 말도 가지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무력한 정서와 감각의 저항자로 남는다. 몸으로는 여전히 일하지만, 마음으로는 더 이상 동의하지 않는 상태. 이중적인 이 침묵은, 복서보다 오래 남아 체제를 지켜보는 자의 고통을 대변한다. 그녀는 침묵하지만, 그 침묵은 의심과 눈물의 침묵이다. 그리고 그 침묵은, 소리보다 오래 기억된다.


벤저민


가장 오래 살고, 가장 지혜로운 동물인 회색빛 당나귀다. 그는 절대 감정적으로 흥분하지 않고, 농장의 변화에 대해서도 언제나 무덤덤하고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혁명 전에도, 혁명 후에도, 나폴레옹의 독재가 진행되는 순간에도 그는 단 한 번도 감탄하거나 분노하거나 기대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것이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 역시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자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도, 계명이 바뀌고, 복서가 도살장에 끌려갈 때도 그는 침묵한다. 그리고 그 침묵은 양들의 반복보다 더 무섭고, 스퀼러의 말보다 더 깊은 절망을 품고 있다.

벤저민은 흔히 지식인 계층 또는 냉소적인 지식층의 상징으로 읽힌다. 그는 진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극소수이며, 그 능력을 가졌기에 더욱 절망에 가까운 자다. 그는 희망을 믿지 않고, 혁명도, 체제도, 구호도, 모든 언어와 변화가 결국 같은 자리로 돌아올 뿐임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선택한 자다.

비판적 사고가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할 때, 그 통찰은 오히려 체제를 강화시킬 수 있다는 위험을 드러낸다. 그는 무지가 아니라, 행동하지 않는 앎의 상징이며, 지식이 윤리가 되지 못할 때, 그 지식은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진실을 체현한다.

복서가 순진하게 죽을 때, 벤저민은 그 죽음의 의미를 안다. 그는 수레에 적힌 글을 읽고도, 너무 늦게 말한다. 그리고 그 늦음은 단순한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부재, 혹은 의지의 상실을 말해준다.

벤저민은 거짓을 믿지 않은 유일한 존재였을지 모르지만, 그의 진실은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점에서 그는 가장 비극적인 공범자이기도 하다. 그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침묵은 무지보다 더 깊은 책임을 남겼다.


멜리


혁명이 일어나기 전, 존스 씨로부터 당근과 설탕, 예쁜 리본, 칭찬과 쓰다듬음을 받으며 살아가던 젊은 암말이다. 그녀는 혁명에 참여하긴 하지만, 곧 불편함을 느낀다. 설탕이 사라지고, 리본을 금지당하며, 모든 동물이 똑같이 일해야 하는 환경은 그녀가 원하던 삶과 전혀 다르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웃 농장에서 인간 옆에서 다시 예쁜 리본을 달고, 달콤한 음식을 먹으며 살아가는 모습이 목격된다. '동물 농장'에서 멜리는 유일하게 농장을 떠난 인물, 즉 체제의 바깥으로 나간 존재다.

멜리는 흔히 부르주아 계급, 혹은 혁명 이전의 기득권에 연연하는 존재로 해석된다. 그녀는 평등보다 쾌락과 안락, 연대보다 개인의 기호와 감각을 중시하는 인물이며, 혁명 이후의 이상적인 삶이 자신이 원하는 삶과 일치하지 않음을 직감하고 떠난다.

그러나 멜리는 단순히 허영과 나약함의 상징만은 아니다. 그녀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가장 솔직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녀는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그 체제를 전복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단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세계로부터 조용히 떠났을 뿐이다.

멜리는 복서처럼 죽지 않았고, 클로버처럼 괴로워하지도 않았으며, 벤저민처럼 침묵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찾아 떠났고, 그 선택이 옳았는지 그르렀는지를 작품은 판단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멜리는 다른 모든 동물과는 전혀 다른 존재다. 그녀는 농장의 이상도, 권력도, 고통도 공유하지 않는다.


존스 씨


매너 농장의 주인이자, 동물들이 혁명을 통해 몰아내는 인간 지배의 상징이다. 그는 게으르고 무책임하며, 동물들을 노동력으로만 취급하며 착취한다. 먹이는 제대로 주지 않고, 스스로의 안락과 쾌락에만 빠져 있으며, 그 결과 동물들은 굶주림과 분노 속에서 혁명의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는 '동물 농장'에서 타도되어야 할 최초의 권력자이며, 역사적으로는 러시아 혁명 전의 황제, 니콜라이 2세, 혹은 구체제 전체를 상징한다. 그는 강압적이진 않지만, 무능하고 무책임하며, 그 무능이 결국 체제의 붕괴를 초래한다.

그러나 존스 씨의 진짜 의미는 그가 몰락한 이후에 더 선명해진다. 동물들은 그를 몰아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와 닮아가는 존재들을 다시 목격하게 된다. 특히 돼지들이 점차 인간처럼 옷을 입고, 침대에 눕고, 술을 마시고, 거래를 하며, 결국 존스 씨가 했던 모든 일을 반복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점에서 존스 씨는 단순히 ‘이전 체제’가 아니라, 권력이 타락할 때 반복되는 본질적 형태의 상징이 된다. 즉, 문제는 인물이 아니라 구조이며, 존스 씨는 지배자의 ‘첫 얼굴’일 뿐, 그의 자리는 언제나 비어 있지 않다.

존스 씨는 몰락한 권력의 부재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권력의 탄생을 예언하는 인물이다. 그가 쫓겨난 자리에 등장한 나폴레옹은 그보다 더 교묘하고, 더 전략적이며, 무엇보다 대중의 열망과 신념을 자양분 삼아 성장한 권력자다. 끝까지 농장을 되찾으려 하지만 실패하고, 그 실패는 혁명이 승리했다는 외형을 만들어준다.

혁명은 성공했을지 모르나, 이상은 실패했고, 권력은 교체되었을 뿐이며, 존스 씨는 단지 얼굴을 바꾼 채 돌아왔다는 사실을. 그의 이름은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권력의 자리는 여전히 살아 있다.


프레더릭과 필킹턴


'동물 농장' 후반부, 외부 세계와의 접점으로 등장하는 프레더릭과 필킹턴은 이 작품이 단순히 농장 내부의 독재를 넘어서, 권력의 보편성과 구조적 반복성까지 꿰뚫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드러내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각각 인접한 두 농장의 주인으로, 표면상으로는 서로 다른 성격과 정치적 입장을 지닌 듯 보인다. 하지만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 그들 모두가 나폴레옹과 동일한 자리에서 웃고 마시는 장면은 지배자들의 얼굴이 결국 하나의 얼굴로 수렴되고 있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프레더릭은 농장과 거래를 맺는 듯하면서도 위조된 지폐로 나폴레옹을 속이고, 풍차를 폭파하며 농장을 전쟁의 폐허로 만든다. 그는 냉소적이며 폭력적인 현실 정치의 얼굴이며, 파괴를 통해 협상력을 강화하는 지배자의 전형이다.

반면 필킹턴은 더 온건하고 교양 있는 얼굴을 하고 등장한다. 그는 농장을 칭찬하며, 나폴레옹과 외교적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그의 환대는 순수한 지지라기보다는, 자기 이익을 위한 위선과 계산의 정제된 표현이다. 그의 칭찬은 혁명이 자본의 언어로 길들여졌다는 신호이며, 결국엔 그 자신도 나폴레옹과 같은 게임 테이블에 앉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강렬하다. 동물들이 창문 너머를 들여다볼 때, 그들은 더 이상 돼지와 인간을 구분할 수 없다. 웃음소리와 건배의 소리, 카드 게임의 농담 속에서 이상은 사라졌고, 남은 것은 서로를 닮아가는 권력의 얼굴들뿐이다.

프레더릭과 필킹턴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인물이라기보다, 혁명 체제조차 기존 체제와 손을 잡고 유사한 구조로 회귀하는 과정을 반사적으로 드러내는 거울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동물 농장'의 결말을 잊히지 않는 장면으로 만드는 동시에, 혁명이 얼마나 쉽게 자본, 외교, 권력이라는 외부 구조와 결탁해 타락할 수 있는가를 드러낸다. 그들의 존재는 우리에게 묻는다. 이 체제는 정말 바뀐 것인가? 아니면, 그저 다른 이름의 권력이 다시 자리를 차지했을 뿐인가?




왜 하필 돼지였을까.


'동물 농장'에서 돼지가 권력의 중심에 선 것은 단순한 설정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축소이자 풍자이다. 돼지는 전통적으로 더럽고 탐욕스럽다는 이유로 멸시받아온 동물이며, 종교적·문화적 문맥 속에서도 혐오의 상징처럼 다뤄져 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돼지는 지능이 높고 학습 능력이 뛰어난 동물이다. 조지 오웰은 바로 이 모순에 주목했다. 인간 사회에서 가장 멸시받지만 동시에 가장 닮은 존재. 돼지는 권력자의 자리에 놓이기에 가장 적절한 짐승이었다.

소설 속에서 돼지는 언어를 해독하고, 문장을 만들고, 기억을 조작하며, 계명을 고쳐 쓰는 존재다. 혁명을 주도했던 그들은 자신이 만든 계율을 무기로 바꾸고, 기억을 지배하며 동물들의 사고를 교묘히 틀어낸다. 처음에는 노동을 분담하고 공동체의 미래를 설계하는 듯 보이지만, 어느 순간 그들의 언어는 정당화의 수단이 되며, 사유는 명령이 되고, 지식은 착취의 언어로 전락한다. 이는 곧 ‘지식인 권력’에 대한 비판이자, 언어를 통해 지배 구조를 형성하는 모든 독재 체제의 축소 모형이다.

돼지는 또한 가장 현실적인 지배자의 모습이다. 직접 노동하지 않고, 물질을 가장 많이 소비하며, 권력을 당연한 듯 이어받는다. 그들의 특권은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욕망은 질서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그리고 그 정당화는 말과 기록, 규율이라는 기호 속에 숨는다. 오웰은 돼지를 통해 권력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것은 누군가의 폭력적 강압이 아니라, 구조 속에 은폐된 교묘한 반복이며, 침묵과 수긍을 요구하는 감정 없는 권위이다.

결국 돼지는 인간 그 자체이다. 욕망을 품고, 권력을 탐하며, 기억을 조작하고, 진실을 바꾸는 존재. 오웰은 돼지를 통해 인간이 만들어낸 권력의 가장 비열한 얼굴을 그려낸다. 마지막 장면에서 동물들이 창밖을 들여다보며 인간과 돼지를 구별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이 모든 풍자가 가리키는 대상이 멀리 있는 어떤 독재자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임을 깨닫게 된다. 돼지는 선택된 것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서서히 만들어진 인간의 또 다른 그림자였던 것이다.


스노우볼이 남아 있었다면, '동물 농장'은 과연 달라졌을까.


이 질문은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 혁명과 이상, 권력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묻는 사유이다. 스노볼은 이상주의자였고, 이상주의자이기에 쫓겨났다. 그가 농장에 남아 있었다면, 농장의 풍경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본질은 과연 바뀌었을까.

스노볼은 나폴레온과 달리 말과 글에 능했고, 정치적 비전도 분명했다. 그는 풍차를 통해 농장의 근대화를 도모하고, 교육을 통한 평등을 구상했으며, 모든 동물이 문자를 배우고 의사소통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설계하려 했다. 그가 추진했던 건 기술적 진보와 지적 해방이었다. 그가 성공했다면, 농장은 ‘더 효율적인 농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효율이 과연 ‘정의로운 구조’를 보장했을지는 미지수다.

스노볼 역시 돼지였고, 돼지는 언어를 독점하고 구조를 설계하는 자였다. 그의 말은 나폴레온보다 부드럽고 열정적이지만, 그것이 완전히 다르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 또한 ‘대표’의 자리에 있었고, 다른 동물들에게는 결정을 위임받은 ‘지도자’였다. 그의 말은 지시가 되었고, 그의 사상은 규범이 되었으며, 결국 그의 권위는 설득이 아닌 체계로 기능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농장의 동물들이 언제나 수동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지도자를 갈망했고, 스스로 생각하는 훈련이 없었으며, 계명은 언제나 외워야 할 노래였지, 바꿔야 할 원칙이 아니었다. 스노볼이 남아 있었더라도, 양들은 여전히 외치고, 말 못하는 동물들은 여전히 침묵했을 것이다. 지도자가 바뀐다고 해도,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권력의 질감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스노볼의 추방은 단지 정권 교체가 아닌, 이상주의의 퇴장이고, 권력 내부에서의 유일한 자정 가능성의 붕괴다. 그는 실패했기에 순수하게 남을 수 있었고, 쫓겨났기에 이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남아 있었다면, 그는 조금 더 세련되고 복잡한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아주 조금 더 늦게, 같은 자리에서 같은 풍경을 바라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스노볼이 남아 있었다면, 농장은 더 늦게 타락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권력의 속성이 바뀌었을 것이라 말하긴 어렵다. 결국 혁명이 실패한 이유는 지도자의 성격보다, 구조에 저항하지 못한 대중의 침묵과 망각, 그리고 권력을 허용하는 집단적 습성 때문이다. 스노볼이 남았더라도, 동물들은 여전히 사료통 앞에서 줄을 섰을 것이고, 그들의 기억은 누군가의 말에 의해 조용히 수정되었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처음부터 악했는가.

'동물 농장'의 나폴레옹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는 처음부터 선봉에 서지 않는다. 열변을 토하지도 않고, 사상을 외치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조용히 관찰하고, 주시하고, 구조를 장악한다.

처음부터 악했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선, 오웰이 악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살펴야 한다. 오웰에게서 악이란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익숙한 명분 아래, 아주 점진적으로 누적되는 행위의 결과다. 나폴레옹은 처음부터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스노볼이 열정적으로 동물들을 선동하고, 계획을 펼치고, 이상을 외칠 때에도 조용했다. 그러나 그 침묵은 무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냉정한 계산이었다. 그는 말 대신 개들을 키웠고, 교육 대신 통제를 준비했으며, 혁명의 열기 속에서 권력의 방향을 천천히 틀어갔다.

그가 처음부터 악했는가를 묻는 것은, 마치 어느 날 악마가 태어났느냐를 묻는 것과 같다. 나폴레옹은 악한 본성을 지닌 인물이기보다는, 구조 속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권력을 쌓아올릴 줄 알았던 자이다. 그는 자신이 맡은 책임을 ‘통치’로 해석했고, 통치를 위해선 두려움과 정보 통제가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동물들의 신뢰를 얻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믿음의 구조를 해체했고, 그 자리에 ‘복종’을 세웠다.

오웰은 나폴레옹을 통해 인간 사회의 독재자가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압축해 보여준다. 처음에는 명분과 목적이 있었고, 그다음엔 통제와 감시가 필요해졌으며, 마지막엔 자신 외의 모든 가능성을 배제해야만 했다. 그런 점에서 나폴레옹은 본질적으로 악한 인물이기보다는, 권력의 순리를 가장 잘 이해했던 존재였다.

만약 그에게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그는 자신을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효율적이었고, 질서를 유지했고, 반대파를 제거했으며, 생산량을 안정시켰다. 동물들이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 세계, 모든 해답이 사전에 정해져 있는 세계, 그것이 그의 이상이었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처음부터 ‘악한 자’였던 것이 아니다. 그는 점진적으로 타락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권력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은 존재였다. 악은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부산물일 뿐이다. 그의 침묵은 본성의 증거가 아니라 계산의 증거였고, 그 웃음 없는 얼굴은 감정의 부재가 아니라 목적의 농도였다. 그는 악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가장 인간에 가까웠다. 오웰은 그 점을, 조용히, 그러나 날카롭게 짚고 있었던 것이다.


복서는 끝까지 왜 저항하지 않았는가.

그의 침묵은 무지였을까, 신념이었을까. 아니면 절망을 모른 척한 순종이었을까. 복서는 '동물 농장'에서 가장 성실하고, 가장 무해하며, 가장 비극적인 존재다. 그의 좌우명은 두 가지였다. “나는 더 열심히 일하겠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언제나 옳다.” 이 두 문장은 곧 그의 삶 전부를 압축한다. 성실, 순종, 그리고 침묵. 그러나 그 모든 덕목이, 결국은 그를 도살장으로 이끌었다.

복서는 지적으로 앞서지 못한다. 그는 읽고 쓰는 데 서툴고, 현실을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능력도 부족하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비극의 전부는 아니다. 그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으며, 때때로 스노볼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저항하지 않았다. 왜일까.

복서의 침묵은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책임감의 왜곡된 형태에서 나온다. 그는 공동체를 위해, 다른 동물들을 위해 자신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믿었다. 농장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의심이 들면서도, 그가 선택한 방식은 ‘질문’이 아니라 ‘노동’이었다.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몸을 움직였고, 잘못을 고치기 위해 더 무거운 짐을 짊어졌다. 이는 마치 현실의 어느 착한 사람들처럼, 구조의 악을 인식하면서도 자기 자신만을 탓하고, 시스템을 고치기보다 더 헌신하는 방식으로 대처해버리는 모습과 닮아 있다.

그는 혁명의 실패를 나폴레옹의 책임으로 돌리는 대신, 자기 자신의 나약함 탓으로 돌렸다. 그것이 바로 가장 교묘한 지배의 성공이다. 피지배자가 지배자에게 분노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실망하게 만드는 것. 복서는 그 함정에 빠졌다. 그는 악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악에 대항할 줄도 몰랐다.

또한 그는 ‘언어’를 갖지 못했다. 복서에게 언어는 슬로건이었고, 믿음은 구호였다. 그는 질문하지 않는 존재였고, 그저 명령을 따르는 존재였다.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반항은 더 오래 일하는 것이었고, 그것조차도 체제 유지에 흡수되었다.

결국 복서는 ‘선량함’이 어떻게 체제의 윤활유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 선량함은 체제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체제의 정당성을 보완하고, 타인에게 “그도 저렇게 참고 있는데 너는 왜 불평하냐”는 암묵적 압박을 형성한다.

복서는 착한 사람이었고, 동시에 위험한 사람이었다. 그는 누구도 해치지 않았지만, 모두가 해쳐지는 구조에 침묵으로 복무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눈치채지 못한 게 아니다. 그는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냈고, 마지막까지 그 책임을 자기 어깨에만 올려두었다.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는 믿음을 가진 채 죽은 것이 아니라, 믿음 대신 책임을 짊어지고, 그 책임 속에서 천천히, 조용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비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안의 가장 오래된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무지와 순종은 죄가 되는가.

죄는 언제 시작되는가. 피를 흘렸을 때인가, 아니면 피가 흐르도록 외면했을 때인가. 이 작품에서 진짜 비극은 칼을 든 자가 아니라, 칼이 향하는 것을 보았음에도 고개를 돌린 수많은 눈들 속에 있다.

무지와 순종은 처음엔 죄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상태이며, 때로는 생존의 방식이다. '동물 농장'의 동물들 역시 그랬다. 그들은 지배당하는 데 익숙했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럴 필요를 느껴본 적도 없었다. ‘생존’만이 삶의 유일한 목표였던 그들에게, ‘의심’은 사치였고, ‘질문’은 위험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무지와 순종은 단순한 상태를 넘어, 체제 유지의 도구가 된다. 무지는 더 이상 ‘아는 것’의 반대가 아니라, ‘알려고 하지 않음’이 되고, 순종은 ‘두려움’이 아니라 ‘관성’이 된다. 그 순간부터, 그것은 구조적 악의 일부가 된다. 이런 변화는 서서히, 조용히 일어난다. 칠판의 계명이 조금씩 지워질 때, 양들이 같은 구호를 반복할 때, 복서가 “나폴레옹은 언제나 옳다”고 말할 때.

아무도 총을 들지 않았지만, 혁명은 이미 배신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지와 순종이 죄가 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이 반복될 때, 구조가 될 때, 타인의 고통을 외면할 수 있는 능력이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 죄란 본래 행동이 아니라, 태도이며, 거절된 가능성이다.

오웰은 '동물 농장'을 통해 말한다. 악은 항상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잔인한 악은 내 안에 존재하되, 스스로를 선하다고 믿는 무지에서 자란다.

그리고 순종은 그 악을 물 흐르듯 농장 전체에 퍼뜨리는 손이다. 그렇다. 무지와 순종은 죄가 된다. 단지 그것이 의도된 악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악이 자라기에 너무나 좋은 토양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총을 쏘지 않았지만, 총알이 지나갈 길을 열어주었고, 그 모든 침묵은 결국 가장 큰 소리로 그 악을 방조했다.


혁명은 왜 실패하는가.


혁명은 언제나 거창하게 시작된다. 피억압자의 분노, 이상을 향한 열망,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이 모여 ‘새로운 세계’를 외친다. '동물 농장'에서 그 시작은 참으로 순수하고 뜨거웠다. 메이저의 연설은 고통을 공유하게 했고, 동물들은 스스로의 자유를 처음으로 꿈꾸었다. 그러나 그 꿈은 곧 균열되었고, 그 균열은 다시 권력으로 메워졌으며, 끝내 혁명은 제 손으로 자기 이상을 질식시켰다. 왜일까. 왜 혁명은 반복해서 실패하는가.

그 이유는 단 하나가 아니다. 첫째, 혁명은 구조를 바꾸지 않고 권력자만 바꾸는 데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동물 농장'의 동물들은 존스 씨를 몰아냈지만, 권력의 구조는 해체되지 않았다. 감시, 정보의 독점, 노동의 착취, 복종의 강요는 그대로였다. 단지 인간이 사라졌을 뿐, 그 자리에 돼지가 앉았을 뿐이었다.

둘째, 혁명은 종종 지도자의 인격보다 구조의 힘에 끌려간다. 스노볼과 나폴레옹의 대립은 개인적 성격 차이가 아니라 권력의 방향에 대한 충돌이었다. 나폴레옹은 대중의 열망을 수렴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제 가능한 형태로 변형시켰다. 혁명은 사람을 바꾸지만, 권력은 사람을 바꾸어낸다.

셋째, 혁명은 대중이 ‘참여자’가 아닌 ‘청중’으로 남을 때 실패한다. 동물들은 혁명의 설계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명령을 기다렸고, 해석을 받았고, 구호를 외웠다. 질문하지 않는 자유는 오래가지 못한다. 초원의 구호가 반복될수록, 혁명은 한 줌의 목소리로 수렴되었고, 그 수렴이 곧 독재가 되었다.

넷째, 가장 잔인한 실패는 ‘기억’의 실패다. 계명은 조금씩 지워졌고, 과거의 이상은 모호해졌으며, 심지어 과거를 기억하는 자는 조롱받았다. 벤저민이 눈치채고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던 것도, 클로버가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해석하지 못했던 것도, 모두 기억의 무력화가 만든 결과다. 혁명이 실패하는 이유는 종종 배신이나 탄압이 아니라, 망각이다.

결국 '동물 농장'은 혁명의 실패를 ‘의도된 배신’이 아닌, 구조적 숙명으로 그려낸다. 이상은 있었지만, 그 이상을 유지할 교육과 언어, 비판과 참여의 구조가 없었다. 그래서 혁명은 실패했다. 돼지들이 타락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동물들이 침묵했기 때문이고, 질문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위임해버렸기 때문이다. 혁명은 이상에서 시작되지만, 그 이상을 지킬 수 있는 ‘일상의 윤리’가 없다면 언제든 다른 이름의 독재로 귀결된다.




'동물 농장'은 혁명의 이야기이자, 배신의 역사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침묵의 서사이다. 오웰은 목청 높여 외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보여준다. 혁명이 시작되는 장면에서부터 끝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는 과정까지,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 않고, 아무도 의문을 묻지 않으며,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는 단순하다. 한 농장에서 동물들이 인간의 착취에 저항하여 혁명을 일으키고, 스스로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다. 처음에는 모든 동물이 평등하다는 이상이 있었다. 하지만 점점 돼지들은 권력을 독점하고, 언어를 조작하며, 기억을 통제하고, 거짓된 구호와 진실을 바꿔치기한다. 그리하여 끝내,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더 평등하다”는 문장이 진실이 되고, 인간과 돼지를 구분할 수 없는 밤이 도래한다.

우리가 분석한 등장인물들은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다. 메이저는 불붙는 사상의 입구였고, 스노볼은 실행되기 전에 제거된 이상이었다. 나폴레옹은 조용히 웃는 독재자였으며, 복서는 가장 선한 자였지만 동시에 가장 위험한 자였다. 그는 자신의 죽음조차 의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하겠다는 구호를 되뇌었다. 벤저민은 모든 것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던 자였고, 양들은 아무 생각 없이 가장 크게 외쳤다. 말보다 소리가 더 커졌을 때, 진실은 무너졌다.

왜 돼지였을까. 그 질문은 단순한 생물학적 은유가 아니다. 돼지는 인간의 거울이다. 탐욕과 이성, 계산과 생존, 냉정한 선택과 본능적 포식이 공존하는 동물. 오웰은 돼지를 통해 인간이 권력을 가졌을 때 얼마나 쉽게 그 권력에 의해 변형되는지를, 얼마나 빠르게 '우리'였던 존재가 '그들'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가장 인간다운 짐승이, 가장 짐승다운 인간으로 변해가는 장면은, 이 작품의 모든 아이러니를 응축한다.

우리는 또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스노볼이 남아 있었다면. 하지만 그는 남아있을 수 없었다. 이상은 언제나 실현보다 앞서며, 실현되지 못한 이상은 망각되거나 왜곡된다. 스노볼은 살아 있었다면 실패했을 것이다. 그가 떠났기에, 우리는 ‘그때 무엇이 가능했는가’를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나폴레옹은 악했는가? 아니다. 그는 단지 권력의 구조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던 자다. 그는 이상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침묵하고, 조율하고, 허용하고, 제거했다. 그는 싸우지 않고 이겼으며, 누구보다 빠르게 돼지가 되어갔다. 결국 그는 싸우지 않아도 모두가 그를 따르리라는 것을 알았다. 구호만 있다면, 진실은 언제든 다시 쓰일 수 있다는 걸.

복서는 왜 저항하지 않았는가? 그는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착한 자는 언제나 가장 먼저 배신당한다. 그리고 그 배신은, 그의 순수함으로부터 비롯된다. 무지는 죄가 아니지만, 누군가에겐 가장 유용한 도구가 된다.

우리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무지와 순종은 죄인가. 혁명은 왜 실패하는가. 그리고 결론에 다다른다. 혁명은 이상에서 시작되지만, 일상의 윤리로 지켜지지 않으면 결국 스스로를 삼킨다. 구호는 자주 외칠수록 내용이 사라지고, 동의는 많을수록 진심은 흐려진다. '동물 농장'의 동물들은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죄를 지었다. 그 침묵이, 그 방관이, 그 ‘몰랐다’는 말이, 바로 그들이 이상을 배신한 방식이었다.

'동물 농장'은 그래서, 과거의 정치에 대한 풍자가 아니라, 오늘의 우리를 향한 예언이다. 우리가 말하지 않을 때, 누군가는 말의 구조를 바꾼다. 우리가 질문하지 않을 때, 누군가는 진실을 편집한다. 그리고 우리가 두 눈으로 보면서도 모른 척할 때, 역사는 다시 짐승의 걸음으로 돌아간다.

돼지들은 노래하고, 초원은 춤을 춘다. 그러나 그 노래는 누구의 목소리였는가. 그 춤은 자유였는가, 아니면 복종이었는가. 우리는 지금, 그 구분을 할 수 있는가. 이 작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그 초원 위에 서 있으니까.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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