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은 왜, 우리가 가장 울고 있을 때 말이 없는가.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다만, 그림자만이 길어졌다.
누군가는 바닥에 얼굴을 묻고,
누군가는 성화 위로 발을 내딛는다.
모두가 조용히 무너진다.
기도는 메아리 없는 산허리에 부딪히고,
그분의 대답은 돌보다도 무거운 침묵이었다.
우리는 묻는다.
그분은 정말 거기 계셨는가.
아니면, 고개를 돌린 채,
우리의 울음을 외면하신 것인가.
그러나 문득, 발아래 닿은 얼굴이
우리의 떨리는 발끝을 먼저 용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말없는 사랑이
우리보다 먼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은 17세기 도쿠가와 막부 치하 일본에서 벌어진 가혹한 기독교 박해를 배경으로, 젊은 포르투갈 예수회 신부 세바스치앙 로드리게스의 신앙 여정을 그린 역사소설이다. 이야기는 그와 동료 프란시스코 가르페 신부가 일본에서 배교했다는 스승 크리스토방 페레이라 신부의 진위를 확인하고, 금교령 하에서도 신앙을 지키는 일본 기독교 신자들을 돌보기 위해 밀항하면서 시작된다.
그들은 일본인 안내인 기치지로의 도움으로 나가사키 인근 해안 마을에 잠입하고, 숨은 기독교 신자들을 비밀리에 신앙적으로 돌보게 된다. 하지만 곧 일본 당국의 박해는 그들에게 손을 뻗치고, 두 명의 신자(모키치와 이치조)는 “후미에”, 즉 예수 혹은 마리아의 형상이 새겨진 성화를 밟으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순교한다. 조수에 잠기게 하여 익사시키는 고통스러운 형벌 앞에서도 믿음을 지킨 이들을 보며, 로드리게스는 하나님의 침묵 앞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박해가 거세지자 두 신부는 흩어져 도피하고, 로드리게스는 다시 기치지로를 만나게 된다. 앞서 배교했던 기치지로는 뉘우친 듯 고해성사를 청하지만, 이내 다시 로드리게스를 밀고하며 배신한다. 결국 그는 체포되어 나가사키로 압송되고, 일본 관리들의 교묘한 심문과 심리적 압박에 직면한다.
특히 기독교 박해를 주도하는 책임자 이노우에는 온화한 태도로 접근하지만, 일본의 땅은 서양의 신앙을 받아들일 수 없는 “늪지”라며 로드리게스에게 배교를 종용한다. 그는 신자들을 직접 고문하기보다는, 로드리게스의 신념을 꺾기 위해 고문당하는 신자들의 비명을 들려준다. 고통받는 신도들의 목숨이 자신의 선택에 달린 상황에서, 로드리게스는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겪는다.
결국, 배교한 스승 페레이라 신부와의 대면이 이루어진다. 그는 이제 일본 이름을 갖고 살아가며, 자신의 배교는 비겁한 선택이 아니라 더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일본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서양의 하나님과 전혀 다르며, 그들의 신앙은 “거미줄에 걸린 나비” 같다고까지 말한다.
로드리게스는 마지막까지 고민한다. 신자들의 고통은 계속되고, 하늘은 여전히 침묵한다. 그리고 마침내, 성화 패를 밟기 직전, 그는 환청처럼 예수의 음성을 듣는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 음성은 그에게 하나님의 첫 응답처럼 들린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발로 예수의 형상이 새겨진 후미에를 밟는다. 멀리서 들려오는 닭 울음소리는 마치 베드로의 배신을 연상케 하며, 로드리게스의 결단을 상징한다. 그의 발 아래 성화는 찢기지 않았지만, 그 순간 무너진 것은 바로 그의 내면의 신앙과 자아였다.
로드리게스는 그 대가로 사랑하던 신자들의 목숨을 구한다. 이후 그는 일본식 이름과 가족을 부여받고, 감시 하에 살아가며 외적으로는 일본 정부의 협력자가 된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죄의식, 그리고 고통 속의 신자들을 향한 책임감이 남아 있다.
한편, 기치지로는 반복되는 배교와 회개 속에서 로드리게스를 다시 찾아오고, “천국에 갈 수 있을지 두렵다”며 고해성사를 청한다. 더 이상 공식적으로는 신부가 아닌 로드리게스는 그의 고해를 거절하지 못한다. 그는 속으로 고백한다
“나는 그들(교회)을 배반했을지 모르나, 결코 그분을 배반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 구절은 침묵에 대한 해석을 전복시키며 마무리된다.
“그분은 침묵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다. 설령 침묵하고 계셨더라도, 나의 온 삶이 그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마지막 문장은, 신의 침묵이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 함께 걸어간 동행이었음을 드러낸다.
로드리게스 신부
로드리게스 신부는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로, 실종된 스승 페레이라의 배교 소식을 확인하고, 박해받는 일본의 숨은 기독교 신자들을 돕기 위해 자원해 일본에 밀입국한다. 깊은 신앙심과 순교에의 이상을 품고 있던 그는, 에도 막부 치하의 혹독한 금교령 아래에서 고통받는 농민 신자들과 은밀히 접촉하며 그들의 신앙을 지켜내려 애쓴다.
그러나 곧 그는 체포되고, 가혹한 현실과 맞닥뜨리며 신앙의 근본을 송두리째 흔드는 시련에 빠진다. 특히 고문당하는 신자들의 비명을 들으며, 배교만이 그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 앞에 무력해진다. 끝내 그는 후미에를 밟는다. 겉보기에는 배신의 행위이지만, 그 순간 그는 예수의 목소리를 환청처럼 듣는다. “밟아라. 나는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침묵하던 신은 고통받는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서, 그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선택은 기존의 순교 서사를 뒤흔든다. 그는 외적으로는 배교했지만, 내면적으로는 더 깊은 사랑과 연민으로 예수와 동행하는 삶을 택한다. 그는 고백한다. “나는 교회를 배반했을지 모르나, 그분을 배반한 것은 아니다.” 이 말은 형식의 파괴를 넘어, 본질로 가닿은 신앙의 목소리이자, 약자를 위해 스스로를 꺾은 자의 고백이다.
로드리게스는 이상과 현실, 순교와 자비, 침묵과 응답 사이에서 끝없이 갈등하는 존재로, 인간의 신앙이 단순한 영광의 길이 아니라 끊임없는 고뇌와 선택의 연속임을 보여준다. 그의 꺾임은 패배가 아니라, 도달이었으며, 그가 밟은 것은 성화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가르페 신부
가르페 신부는 로드리게스와 함께 일본에 밀입국한 또 다른 젊은 선교사이다. 둘은 같은 신념을 품고 같은 배를 타고 왔지만, 이후 흩어져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가르페는 로드리게스와 달리,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순교한다. 그 죽음은 극적이면서도 고요하다. 바다 위에서 신자들이 포승줄에 묶여 물속에 던져질 때, 그는 망설임 없이 그 바다로 뛰어들며 함께 생을 마감한다.
그의 순교는 소설 속에서 거의 유일하게 ‘전통적’ 형태의 신앙의 완성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이 장면조차 단순한 숭고함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바다에 몸을 던지는 그의 행위는, 거룩함과 동시에 절망의 그림자를 동반한다. 그것은 신앙에 대한 확신이라기보다는, 그 어떤 절충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결연함이자, 로드리게스가 끝내 선택하지 못한 길의 극단이다.
가르페는 침묵하는 신 앞에서 ‘죽음으로 답한 자’다. 그는 하늘의 응답 없이도, 믿음을 놓지 않는다. 그의 죽음은 침묵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침묵 속의 순종이다. 그 모습은 로드리게스에게 영원한 질문으로 남는다. 만약 자신도 그처럼 죽었다면, 구원은 더 확실했을까? 배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자들은 더 고통받지 않았을까?
결국 가르페는 살아남은 로드리게스의 신앙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둘은 같은 곳에서 출발했지만, 전혀 다른 종착지에 도달했다. 그의 죽음은 신앙의 승리로도, 패배로도 규정되지 않는다. 침묵의 시대에, 어떤 믿음은 살아남기 위해 변형되고, 어떤 믿음은 사라지며 순결을 지킨다. 가르페는 그 순결의 형상을 마지막까지 간직한 인물로, 침묵에 맞선 ‘몸의 기도’ 그 자체였다.
페레이라 신부
페레이라 신부는 로드리게스와 가르페가 일본에 오게 된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한 인물이다. 그는 20년 전 일본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중 박해를 받아 체포되었고, 이후 후미에를 밟고 배교했다는 소문이 전해진다. 로드리게스와 가르페는 그 소문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으로 향한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배교한 뒤 일본식 이름을 받아 불교 서적을 번역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로드리게스는 직접 마주하게 된다.
그는 더 이상 성직자가 아니며, 예전의 스승도 아니다. 로드리게스와의 대면에서 그는 더 많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 배교를 택했다고 말한다. 선교는 실패했고, 일본이라는 “늪”은 그 어떤 씨앗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서양의 신은 일본 땅에 뿌리내릴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의 존재는 배교한 자의 초상이라기보다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완전히 침몰한 인간의 얼굴이다. 그는 무너진 신앙의 상징이 아니라, 무너진 이후에도 존재를 이어가는 자의 얼굴이다. 그는 죽지 않고 살아남은 순교자이며, 조용히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도 견뎌낸 자다. 이는 로드리게스에게 두려움과 혐오, 연민과 복잡한 감정을 안겨준다.
페레이라는 외적으로는 일본 권력에 순응한 협력자로 보이지만, 그의 침묵 속에는 오래된 고통이 숨어 있다. 그는 하나님의 침묵에 가장 먼저 부딪힌 자였고, 그 침묵을 감당하지 못한 채 ‘말을 버리고, 살아남은 자’다. 로드리게스는 결국 그가 서 있는 자리까지 도달하게 되며, 그의 길을 따라 걷게 된다. 그렇기에 페레이라는 단순한 배교자의 초상을 넘어, 신앙의 파탄이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미래의 자화상 같은 인물이다.
그는 질문이다. 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인가? 끝까지 신을 부정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타인의 생명을 위해 신과의 관계를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인가? 그 답은 소설 전체에 걸쳐 누구에게도 확정되지 않는다. 다만 페레이라는 인물을 통해, ‘믿음의 형태’는 결코 하나가 아니며, 때로는 침묵 속에서, 굴복처럼 보이는 선택 속에서도 신의 흔적은 남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기치지로
기치지로는 일본인 하층민으로, 처음에는 로드리게스와 가르페가 일본으로 밀입국할 수 있도록 돕는 안내자 역할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는 이미 과거 박해 속에서 배교한 전력이 있으며,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배신과 회개를 되풀이하는 인물이다. 로드리게스는 처음에 그를 비겁하고 신의 없는 자로 여긴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기치지로는 단순한 조연을 넘어, 작품의 가장 인간적인 고통과 신앙의 실존적 질문을 담아내는 상징이 된다.
기치지로는 계속해서 배신한다. 신자들을 밀고하고, 로드리게스를 넘기고, 자기 살길만을 택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는 언제나 고해성사를 청한다. 죄책감에 몸부림치며, 끊임없이 용서를 구한다. 그는 “왜 나만 이렇게 나약한가”라는 말을 반복하며, 자신의 나약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 모습은 로드리게스에게는 신앙의 반대편처럼 보이지만, 점차 그는 기치지로의 진심 앞에서 흔들리게 된다.
기치지로는 인간의 원초적 취약함과 그 안에서조차 지속되는 신을 향한 갈망을 상징한다. 그는 모범적 신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처럼 넘어지고 무너져도 다시 신 앞에 서려는 존재야말로, 가장 실존적인 신자일 수 있다는 점에서 작품은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기치지로는 연약함 그 자체이면서도, 신을 끝까지 놓지 못하는 인간의 그림자다.
그의 반복된 배신과 회개는 역설적으로 그 자체가 하나의 기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끝까지 신을 떠나지도 못한다. 작품 후반, 로드리게스가 더 이상 공식적인 사제가 아닌 상황에서도 기치지로는 그에게 고해성사를 청하고, 그는 거절하지 못한다. 이 장면은 신과 인간의 관계가 제도나 형식이 아니라, 고통과 회개의 반복 속에서도 유지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기치지로는 신앙이 승리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신을 위해 죽지는 못하지만, 그 죄책감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그 삶은 부끄럽고 비루하지만, 그 안에는 진심이 있다. 그는 로드리게스와 우리, 모두에게 거울 같은 존재가 되며, "신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가장 원초적으로 상기시키는 인물이다.
이노우에
이노우에는 일본 막부의 고위 관리이자, 기독교 박해를 주도하는 책임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폭력적 악인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논리와 온화한 언어로 로드리게스를 압박하는 지적인 인물이며, 기독교의 보편성을 철저히 해체하는 전략가다. 겉으로는 공손하고 유쾌한 태도를 보이지만, 그 말에는 일본이라는 토양에서 서양의 신앙은 “뿌리내릴 수 없는 식물”이며, “늪지에 심겨진 나무”라는 철저한 거부의 철학이 배어 있다.
그는 순교자를 늘리는 방식의 박해가 아니라, 서양 선교사들을 배교자로 만들고 그들을 통해 기독교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방식을 택한다. 이는 단지 육체적 고문이 아니라 신념의 해체와 내면의 전복을 목표로 한다. 로드리게스에게 직접 고통을 가하지 않으면서도, 무고한 신자들을 고문하고 그 비명을 들려주는 방식으로 그의 신앙을 흔든다. 이는 이노우에가 단지 폭압의 집행자가 아니라, 신앙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철저한 이해자이자 해체자임을 보여준다.
이노우에는 또한 선교사들 내부의 도덕적 갈등을 교묘히 이용한다. 그가 로드리게스에게 후미에를 밟으라고 명령할 때, 그것은 단순한 시험이 아니라 “그들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선한 이유’를 제시한다. 이로써 로드리게스는 신앙과 자비, 순교와 구제 사이에서 분열된다. 이노우에는 바로 이 지점을 노린다. 외형상 그는 친절한 관리일 뿐이지만, 실상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와 믿음의 의미 자체를 전복시키는 유혹의 화신이다.
그는 악의 전형적인 상징이라기보다는, 문명의 충돌 속에서 자기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국가 권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신앙이 개인의 내면 문제라면, 이노우에는 그것이 체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 균열을 이용하는 존재다. 그는 로드리게스의 믿음 너머에 있는 구조, 토양, 문화의 차이를 제시하며 “너희의 신은 이 땅에서 죽는다”고 선언한다. 그 말은 단순한 박해의 언어가 아니라, 한 문명의 종말을 통보하는 냉철한 명제처럼 다가온다.
결국 이노우에는 로드리게스를 배교시킨다. 하지만 그의 승리는 단순하지 않다. 겉으로는 이긴 듯 보이지만, 로드리게스의 내면에 남은 신앙의 불씨까지 꺼뜨렸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노우에는 작품 전반에서 신앙의 순수성과 인간의 연약함, 그리고 권력과 진리 사이의 균열을 드러내는 인물로 기능한다.
모키치와 이치조
모키치와 이치조는 숨은 기독교 신자들이 사는 해안 마을에서 등장하는 인물로, 로드리게스 신부가 일본에 도착한 이후 처음으로 접한 일본 신앙공동체의 신자들이다. 그들은 평범한 농민이자 어부로, 성경과 교리를 제대로 배운 적도, 성직자를 정기적으로 만난 적도 없는 존재들이지만, 그 안에 담긴 신앙은 깊고 뿌리 깊다. 로드리게스는 그들의 검게 그을린 손과 피곤한 눈, 그러나 기도하는 태도 속에서 신앙의 진정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은 후미에, 즉 성화를 밟으라는 명령을 거부한 죄로 붙잡힌다. 고문을 당하는 대신 바닷가에 기둥에 묶인 채, 천천히 밀려오는 바닷물에 익사되도록 방치된다. 그 고통스러운 순교는 단순한 처형이 아니라, 끝까지 신을 부정하지 않은 인간의 육체와 영혼에 대한 고백으로 제시된다. 그들은 죽기 직전까지도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 그 모습은 로드리게스에게 신이 정말로 함께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더욱 극적으로 던지게 한다.
모키치와 이치조는 이름 없는 자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하층민’에 해당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작품 전체의 신학적 중심을 흔든다. 그들은 말없이 순교하면서도, 침묵 속의 하느님을 드러내는 살아 있는 증언이 된다. 하늘이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 사실은 가장 순수한 신앙의 표현이 조용히 드러난 것이다.
이들의 고통스러운 죽음은 로드리게스의 내적 붕괴를 가속화한다. 그들에게 가해진 고통은 오히려 로드리게스 자신에게 신앙의 본질을 되묻고,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한다. 이들의 순교는 그 자체로 고요한 설교이며, 하느님이 침묵하는 동안 인간이 어떻게 신을 증언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모키치와 이치조는 결국 죽지만, 그들의 죽음은 작품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로드리게스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조차, 그들의 찬송 소리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린다. 이는 물리적 죽음 이후에도 신앙의 파장이 어떻게 사람의 영혼을 흔드는가를 보여주는 장치이며, 로드리게스가 끝내 후미에를 밟을 수밖에 없는 딜레마의 근본적인 단초로 남는다.
통역관
통역관은 로드리게스 신부가 체포된 이후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인물로, 일본 당국과 로드리게스 사이에서 언어를 중개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름 없는 이 인물은 말의 중개자이면서 동시에 권력의 하수인으로 기능한다. 단지 언어를 번역하는 기능인을 넘어, 체제의 논리와 문화적 우위를 정당화하는 도구처럼 존재하며, 표면상 중립적인 태도 속에서 교묘히 로드리게스를 조롱하고 압박한다.
그는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다. 그의 통역은 종종 미묘한 어조와 뉘앙스를 통해 왜곡되며, 진술자의 본래 의도보다는 청자에게 전달될 효과를 계산한 말로 변형된다. 이는 언어의 중립성이란 허구를 드러내고, 권력이 언어를 통해 어떻게 신념과 정체성에 개입할 수 있는지를 암시한다. 통역관은 침묵 속에 고통받는 신자들의 비명을 “이해 가능한 언어”로 바꾸지 않으며, 오히려 침묵을 더 조밀한 체제의 언어로 감싸 봉인한다.
상징적으로 그는 말과 침묵 사이의 균열을 이용해 로드리게스의 내면을 파고드는 인물이다. 로드리게스가 신앙의 본질을 붙들고 있는 동안, 통역관은 그 본질을 끊임없이 상대화하고, 문화적 우월성과 현실적 판단을 들이밀며 ‘합리적인’ 선택을 강요한다. 그는 고문의 손을 직접 더럽히지는 않지만, 신념을 무너뜨리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기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침묵이라는 주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통역관은 또한 일본의 통치 체계가 지닌 세련되고 치밀한 폭력의 상징이다. 검과 채찍 대신 논리와 미소로, 고문 대신 담론으로 신앙을 무너뜨리는 존재. 그는 물리적 고통보다 언어적 파괴가 얼마나 정교하고 무자비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인물은 ‘설득’이라는 이름으로 신념을 흔드는,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깊은 폭력의 얼굴이다.
그의 존재는 결국 침묵의 본질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침묵은 단지 신의 부재인가, 아니면 통역되어 버린 신의 뜻인가? 그리고 우리가 듣고 있는 ‘목소리’는 정말 신의 언어인가, 아니면 권력이 번역한 거짓된 해석인가?
신은 일본에서 변질되었는가.
'침묵' 속 로드리게스와 페레이라의 대화는 작품 전체의 신학적·철학적 긴장을 응축한다. 특히 일본에서 신이 ‘변질되었다’는 고백은 단순한 선교 실패가 아니라, 신의 보편성과 문화의 상대성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탄생한 깊은 자각이다.
페레이라는 말한다. “너희가 가져온 신은 일본이라는 늪지에 심겼다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이 말은 하나의 교리가 다른 문명 속에 들어설 때, 그 본래의 형태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드러낸다. 일본은 유교와 불교, 공동체 중심의 윤리관, 무사도의 위계질서가 복잡하게 얽힌 사회였으며, 그런 문화적 지층 위에 ‘자비와 용서, 자기희생의 신’은 쉽게 뿌리내리지 못했다. 오히려 그리스도는 고통 앞에서 무기력한 존재처럼 보였고, 하느님의 침묵은 외면처럼 다가왔다.
페레이라가 비유한 ‘늪지’는 매우 상징적이다. 그것은 외래의 신념체계가 뿌리를 내리려 할 때, 자신도 모르게 스며들어 모양을 잃고, 끝내는 자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장소다. 일본이라는 문화의 늪지 속에서 기독교는 ‘다른 얼굴의 신’으로 점점 바뀌어 갔다. 이 과정은 단순히 종교적 교리의 오염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이 다른 방식의 고통과 언어에 흡수되는 복합적인 침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신이 가짜였을까? 로드리게스가 만난 숨어 있는 기독교 농민들은, 교리를 완벽히 알지 못하고, 기도 방식도 왜곡되어 있었지만, 신에 대한 갈망은 너무도 절실했고, 그 신을 향한 충성은 삶 전체를 건 것이었다. 즉, 일본에서 ‘변질된’ 신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가장 실제적이고, 가장 고통에 응답하는 신이었다.
'침묵'은 바로 이 모순을 껴안는다. 외적으로는 배교한 자들이, 내적으로는 더욱 깊은 차원에서 신과 만나는 장면들이 반복된다. 성화를 밟는 로드리게스의 발 아래에서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린다. “밟아라.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내가 이 세상에 왔다.” 이 한 문장은, 신은 침묵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받는 자의 곁에서 말없이 함께 밟히고 있었다는 역설을 드러낸다.
신은 변질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이 바뀐 것이다. 문화는 신을 받아들이는 그릇이며, 언어이고, 감각이다. 페레이라와 로드리게스가 겪은 것은 ‘신의 실패’가 아니라, 보편을 믿었던 자들이 그 보편의 껍데기 속에서 진짜 신을 재발견하는 통과의례였다.
결국 '침묵'은 묻는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외형인가, 의례인가, 아니면 고통 속에서도 무너뜨릴 수 없는 관계인가. 그리고 이 질문은 오늘날 신이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다가온다. 신은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 침묵을 우리의 방식으로만 듣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기치지로는 왜 로드리게스 신부를 팔았나.
기치지로가 로드리게스 신부를 밀고한 행위는 단순한 배신이나 비겁함의 표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침묵'이라는 작품이 끊임없이 질문하는 신앙과 인간성, 구원과 죄의 복잡한 교차점에서 일어난 필연적인 비극이자, 진정한 ‘죄인의 자화상’이다.
기치지로는 박해 앞에서 신앙을 지켜낸 위대한 순교자들과는 대조되는 인물이다. 그는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지도 못하고, 형벌을 견디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믿음을 버린 것도 아니다. 그는 죄를 범한 뒤 매번 고해성사를 청하고, 자신이 천국에 갈 수 있을지 두려워한다. 기치지로는 무너지는 자, 흔들리는 자, 그러나 결코 신을 완전히 잊지 못하는 자다. 그의 신앙은 겉으로는 배교의 껍질을 쓰고 있지만, 그 안에는 끊임없이 구원을 갈망하는 불안정한 혼이 숨겨져 있다.
로드리게스 신부를 팔았다는 그의 선택은, 생존을 위한 절박한 몸부림이자 동시에 자기 안의 두려움과 신념 사이에서의 실패였다. 그는 ‘정의’를 실천하는 자가 아닌, ‘용서’를 증명하는 자다. 기치지로는 단 한 번도 강하지 않았고, 그래서 오히려 더욱 인간적이다. 그가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다시 묻게 된다.
기치지로는 나약함 자체가 죄가 아니라, 그 나약함을 직시하고 신 앞에 서려는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발현일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는 “반복적으로 죄를 짓는 자는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가장 고통스럽고도 근원적인 질문을 짊어진 인물이며, 이 질문을 통해 '침묵'은 순교의 숭고함을 넘어선, 더 깊고 절실한 신의 자비를 응시하게 만든다.
"가라. 가서 너희가 이룰 일을 이루어라.", "가라."
이 말은 본래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가룟 유다에게 한 말로, 곧 일어날 배신을 알면서도 유다를 내쫓지 않고, 오히려 묵인하는 형태로 그를 ‘보내는’ 장면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배신하라’는 허락이 아닌,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그 모든 죄와 고통까지도 받아들이겠다는 고요한 수용의 의지가 담겨 있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기치지로의 반복된 배신과 회개를 보며 그 인간적인 비루함에 환멸을 느끼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 자신과 닮은, 혹은 더욱 정직한 인간의 민낯을 본다. 기치지로는 자신의 두려움과 나약함을 숨기지 않으며, 배교 후에도 끊임없이 신 앞에 돌아가려 애쓰는 존재다. 로드리게스는 그런 기치지로를 단죄할 수 없고, 단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를 통해 자신도 결국 누군가를 배신하게 될 존재임을 직감한다.
그리하여 "가라. 가서 너희가 이룰 일을 이루어라."는 말은 기치지로에게 향한 내면의 포기이자 용서이고, 동시에 자신 스스로에게도 향한 말이 된다. 로드리게스는 이 말 속에서, 신이 자신에게도 언젠가 말할지 모를 침묵의 선언, 혹은 유일한 대답을 듣는 것이다. 그 대사는 배신의 순간조차 신의 계획 안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구원은 완전함에서가 아니라 불완전함 속에서 태어난다는 통찰의 표현이다.
결국 이 문장을 통해, 로드리게스는 신의 침묵이 단지 무응답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견디는 방식의 응답임을 체득하게 된다. 침묵은 형벌이 아니라 동행이며, 기치지로는 그 동행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끝내 구원을 갈망하는 존재로 남는다.
신은 왜 침묵하는가.
'침묵'에서 가장 뼈아픈 질문은 바로, 신은 왜 인간이 가장 고통받을 때 침묵하는가라는 것이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고문받는 신자들의 비명을 듣고, 고통을 외면한 채 강요되는 배교 앞에서 무력한 채 흔들린다. 그는 절규한다. “당신은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그러나 이 침묵은 단순한 부재가 아니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침묵’은 신의 부재가 아니라, 고통받는 인간 안에 잠겨 있는 신의 동행, 말이 아닌 방식으로 전해지는 신의 응답이다.
신은 외부에서 개입하는 구세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로드리게스가 밟으려는 성화 너머에서, 그가 외면하려 했던 인간의 신음 속에서, 신은 이미 그 고통을 함께 견디는 존재로 숨어 있었다. 그래서 로드리게스가 듣게 되는 그 음성은 명령이 아니라 ‘허락’이며, 심판이 아니라 ‘연민’이다. "밟아라. 나는 너희가 밟는 것을 견디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는 목소리는 침묵이 아닌 가장 낮고 깊은 방식의 응답이다.
이러한 침묵은 인간이 기대하는 식의 ‘응답’(기적, 개입, 처벌, 구원)과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은 고통의 한복판에서, 말 대신 함께 찢기고 함께 밟히는 자로 존재한다. 이는 신의 무관심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고뇌를 끝까지 존중하는 신의 방식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신의 침묵은 곧 인간 내면의 고요한 자리에서 들리는 음성임을 알게 된다.
이 작품이 말하는 신은, 침묵함으로써 인간이 온전히 고통을 직면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신앙과 존재를 다시 묻는다. 그러므로 침묵은 심판이 아니라, 가장 깊은 연민의 형태이며, 인간 존재를 향한 신의 신뢰이자 포기하지 않는 동행의 방식이다.
"신이 침묵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가장 낮은 목소리를 듣지 못한 건 아니었을까?"
배교는 항상 신앙의 포기인가.
배교라는 행위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작품이다. 종교적 전통 안에서 배교는 신을 부정하는 행위이며, 신앙의 파탄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엔도 슈사쿠는 로드리게스 신부를 통해 오히려 배교가 믿음의 최종 형태일 수도 있음을 묻는다. 성화를 밟는 행위는 외형적으로는 신앙의 철회이지만, 그 동기는 순결한 자기희생이었다.
로드리게스는 신을 부정하기 위해 성화를 밟지 않았다. 그는 고통받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믿는 신이 "밟아도 좋다"고 말하는 사랑의 존재임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에게 배교란 신앙의 붕괴가 아니라, 신의 고통에 동참하는 방식, 다시 말해 신의 침묵 속에서 들려온 가장 낮은 명령에 응답한 것이다. 그는 신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원을 포기하고 타인을 품는 사랑의 신을 실천한 셈이었다.
따라서 '침묵'에서의 배교는 두 겹의 의미를 가진다. 첫째, 사회적·제도적 차원에서의 '배교'는 확실히 신앙의 철회다. 그러나 둘째, 존재론적·영적 차원에서는 오히려 더 깊은 신앙의 증거가 될 수 있다. 그것은 형식의 배반을 통해 본질을 붙드는 길이며, 공동체의 규율을 넘어 타인의 고통 앞에 선 자기부정의 사랑이다.
결국 이 작품은 묻는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외적인 증표와 고백인가, 아니면 고통받는 자와 함께하는 내면의 충실함인가?
'침묵'은 후자의 길을 제시한다. 배교는 종종 부정으로 읽히지만, 때로는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닮은 방식으로 그를 사랑하는 길일 수도 있다. 신앙의 진실은 늘 고백의 언어로만 증명되지 않는다. 침묵 속에서도, 발끝으로 밟은 순간에도, 그는 그분을 따르고 있었다.
신앙은 고통을 감수하는 것인가, 고통을 줄이는 것인가.
고통을 견디는 것만이 믿음의 증표인가? 혹은, 고통을 줄이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실천인가?
기독교는 오랜 세월 동안 고난을 “의미 있는 감내”로 여겨왔다. 순교는 믿음의 정점이었고,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자세는 곧 의지의 증거였다. 그러나 '침묵'은 이 관념을 정면으로 해체한다. 작품의 중심인물인 로드리게스는 처음엔 고통을 감수하는 자로 남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가 고통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고통당하는 것을 외면하지 못한 채, 그 고통을 줄이기 위해 자신이 희생되는 길을 택하는 순간, 신앙의 본질이 전환된다.
그는 배교라는 형식적 배반을 통해 수많은 신자의 고문과 죽음을 막는다. 그리고 그 순간, 작가는 로드리게스가 예수의 목소리를 듣게 만든다. “밟아라. 나는 너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이는 신이 침묵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고통받는 자와 함께하고 있었다는 역설을 드러낸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요구한다. 신앙은 고통을 버티는 자의 의지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고, 그것을 줄이기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자의 책임일 수 있다. 고통의 의미는 감내가 아닌 공감과 해방으로 전이된다. 이때 신앙은 더 이상 개인의 구원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가닿기 위한 다리가 된다.
결국 '침묵'은 말한다. 신앙은 고통을 감수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진정한 신앙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부정하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신은 종종 침묵 속에 있지만, 그 침묵은 고통에 동참하는 낮은 자리에서 울리고 있다. 그리고 그 침묵에 귀 기울이는 순간, 인간은 고통을 이기는 자가 아니라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자로 변화된다.
구원은 누구에게 허락되는가.
'침묵'이 끝끝내 보여주는 것은, 구원이 의로운 자의 전유물이 아님을 드러내는 이야기다. 겉보기에 배교한 자, 나약한 자, 반복적으로 신을 저버리는 자에게조차 구원은 낮고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다가온다.
기치지로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끊임없이 배신하고, 반복적으로 배교하며, 로드리게스를 밀고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는 다시 찾아와 고해를 청한다. 이 반복은 단순한 나약함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신앙의 왜곡된 형태”로 읽힌다. 그가 스스로를 죄인으로 자각하고, 끊임없이 용서를 구하는 그 움직임 자체가 신앙의 핵심일 수 있다. 기치지로는 스스로 거룩한 자가 아님을 안다. 그러나 바로 그 인식이 그를 구원과 가장 가까운 자로 만든다.
로드리게스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후미에를 밟는다. 겉으로는 명백한 배교다. 그러나 그의 발 아래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음성은 그를 정죄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한다. “밟아라. 나는 너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이 구절은 구원이 신앙의 형식에 머무르지 않고, 고통받는 자와 함께하려는 의지 속에서 현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페레이라 신부. 그는 완전히 일본화되어 살아간다. 겉으로는 완벽한 배교자다. 그러나 그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은, 오히려 내면의 갈등과 구원의 흔적을 드러낸다. 그는 말하지 않지만, 그 침묵이야말로 가장 깊은 고해다. 구원은 말로서가 아니라, 존재의 균열에서 스며든다.
이처럼 '침묵'은 질문한다. 구원이란 누구의 몫인가? 죄 없고 강한 자의 것인가? 아니면, 끊임없이 무너지고 다시 일어나려는 자의 것인가? 작품은 명확히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끝내 보여준다. 구원은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에게, 포기하지 않고 울부짖는 자에게, 가장 낮은 곳에서 고통에 함께하는 자에게, 그 조용한 방식으로 주어진다.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았다. 다만, 인간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미 그 곁에 있었다.
'침묵'은 신앙의 파국이 아니라, 신앙의 변형을 그리는 소설이다. 엔도 슈사쿠는 선교, 배교, 고통이라는 격렬한 테마를 통해 단순한 교리적 신앙을 넘어서, 말 없는 신을 향한 존재의 마지막 응시를 그려낸다. 이 작품에서 신은 침묵하고, 인간은 그 침묵 속에서 무너진다. 그러나 바로 그 무너짐 속에서 신앙은 새로운 형태로 솟아오른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이상을 품고 일본 땅을 밟았지만, 그 땅은 믿음을 기념하지 않고,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며, 순교조차 신의 응답으로 돌려주지 않는다. 그는 순교자의 길을 거부당한 자이며, 사랑하는 이를 위해 성화를 밟는 자이며, 신의 음성을 가장 깊은 침묵의 순간에 들은 자다. 겉으로는 배교자였지만, 그의 침묵은 신의 침묵과 가장 가까웠던 동행의 시간이 된다.
기치지로는 무수히 무너진 자였지만, 무너짐을 반복하면서도 끝내 신을 놓지 않았다. 그는 죄를 끌어안고 사는 자이며,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도 신 앞에 다시 서는 존재다. 페레이라 또한 배교 이후 파괴된 신앙 위에 삶을 이어가는 인물이다. 그는 침묵하는 신 앞에서 절망했지만, 여전히 신을 잊지 않은 이다. 그들의 모습은 신앙이 반드시 견고함으로만 지속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고통과 구원이 명확히 분리되지 않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구원은 승리의 언어가 아니라, 파괴된 양심의 부스러기 위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기둥이 아니라, 무너짐을 견디는 감각이며,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내면의 방향이다. 이 소설은 그 믿음의 결을, 침묵이라는 가장 잔인하고도 정직한 언어로 새겨 넣는다.
침묵은 부재가 아니며, 무관심도 아니다. 그것은 말보다 깊고, 응답보다 오래 남는 신의 방식이다. '침묵'은 그 방식에 끝까지 귀 기울였던 자들의 기록이다. 그리고 그 기록은 우리에게, 진실한 신앙이란 무엇인지 다시 쓰도록 요구한다. 순교가 아닌 배교, 응답이 아닌 침묵, 승리가 아닌 파괴를 통해서. 이 작품은 신이 없다고 느껴질 때조차, 인간이 신을 향해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바로 그 점에서, '침묵'은 가장 깊은 신앙의 고백이다.
침묵을 깨는.
God Knows - Calum Scott
Lady Gaga – Angel Down
Signs - Nadia Lobkov
Bobby Bazini – Under The We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