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_메리 셸리

등을 보이는 신에게, 괴물은 인간의 언어로 울었다.

by LWB

등을 돌린 이는, 만든 자였다.

숨결은 주었으되, 따뜻함은 주지 않았고.
이름 없는 존재는 무릎을 꿇은 채,
배운 언어로, 사랑을 구걸했다.


그는 나를 보지 않았다.
그 울음은 문장보다 느렸고,
그 말은, 손끝에 피를 삼킨 문법이다.

그는 신을 닮으려 했고,
나는 사람을 닮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등을 보였고,
나는 그 등 너머로, 가장 인간다운 절망을 배웠다.




'프랑켄슈타인'은 단순한 괴물 이야기로 시작해, 인간성과 창조, 고독과 책임에 대한 깊은 성찰로 나아간다. 작품은 액자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북극을 탐험하던 선장 로버트 월턴이 우연히 구조한 한 남자의 고백에서 시작된다. 그 남자는 빅토르 프랑켄슈타인, 스위스 제네바 출신의 젊은 과학자였다.

어릴 적부터 자연철학과 과학에 심취했던 빅토르는 생명이라는 신의 영역에 손을 뻗는다. 그는 잉골슈타트 대학에서 수년간 연구를 거듭한 끝에, 죽은 육체를 재조합하여 인공 생명체를 창조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창조의 순간은 경이로움이 아닌 공포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의 손으로 생명을 불어넣은 피조물은 흉측한 외형을 가졌고, 빅토르는 그 존재를 거부하고 도망친다. 창조물은 그렇게 세상에 홀로 남겨진다.

버려진 피조물은 인간 사회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살아있는지를 질문하며 떠돈다. 그는 몰래 한 농가의 가족을 관찰하며 말과 감정을 익히고, 인간이 되고자 애쓴다. 하지만 그의 선의는 외형 하나로 무너진다. 사람들은 그를 공포의 대상으로만 받아들이고, 피조물은 자신이 결코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은 그를 복수의 길로 이끈다.

그는 제네바로 돌아와 빅토르의 동생 윌리엄을 살해하고, 누명을 쓴 하녀 저스틴은 억울하게 처형된다. 빅토르는 이 비극의 배후가 자신이 만든 피조물임을 알지만, 고백하지 못한 채 내면의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후 알프스 산중에서 다시 마주친 피조물은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며, 단 하나의 요청을 한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자신을 위해, 동반자 하나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고민 끝에 빅토르는 두 번째 창조를 시작하지만, 결국 작업 중단을 선언하고, 피조물을 다시 거부한다. 이 결정은 피조물에게 돌이킬 수 없는 분노를 안기고, 복수는 더욱 잔혹해진다. 빅토르의 가장 친한 친구 클레르발이 희생되고, 결국 결혼식 당일 밤, 사랑하는 엘리자베스마저 살해당한다.

모든 것을 잃은 빅토르는 절망과 분노 속에서 피조물을 쫓기 시작한다. 그는 북극까지 추적하지만, 끝내 병으로 쓰러지고, 월턴의 배 위에서 자신의 삶과 죄를 고백한 후 숨을 거둔다. 그 직후 피조물은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파괴가 아닌 사랑과 연대, 이해였음을 토로하고, 스스로 사라지기 위해 북극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은 '프랑켄슈타인'의 중심 화자이자, 파국의 기원을 품은 인물이다. 그는 생명의 본질에 대한 끝없는 탐구 끝에 신의 영역에 손을 뻗고, 죽은 육신을 조합해 하나의 존재를 창조한다. 그러나 그 생명이 눈을 뜬 순간, 그는 자신의 창조물에 책임을 지지 않고 도망친다. 빅토르는 창조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아버지가 되기를 두려워했고, 과학자가 되기를 자처했으나, 윤리적 주체가 되기를 거부한 인물이다. 그의 과업은 인간의 지성을 대표하지만, 동시에 감정과 책임에서 도피하는 이성의 파탄을 보여준다. 그는 가족에게 진실을 고백하지 못하고, 친구와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침묵과 외면을 선택한다. 이 침묵은 죄책감의 무게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감정적으로 책임질 용기가 없는 내면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고립을 선택하며, 자신의 고통과 괴로움을 누구와도 나누지 않는다. 빅토르가 만든 괴물은 단순한 과학적 실수가 아니라, 감정을 외면한 창조자의 그림자이다. 그의 피조물은 고통받고, 말하고, 사랑을 갈망하지만, 창조자는 끝내 그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다. 그는 괴물을 만들었으나, 그것이 살아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고, 살아 있다는 것은 곧 돌봄과 이해의 대상이 되어야 함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빅토르는 그 존재를 두려워했고, 그 두려움은 책임을 지는 대신 파괴하거나 버리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괴물이 인간성을 닮아가려 할수록, 빅토르는 오히려 인간다움을 잃어간다. 그는 피조물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직면할 기회를 가졌지만, 거듭된 회피와 침묵 속에서 결국 자신도 하나의 괴물처럼 변모해 간다.

이 작품은 빅토르의 실패를 통해, 지성의 극단은 어떻게 윤리적 기반이 무너질 때 비극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신을 모방했지만, 신이 되지 못했고, 인간을 외면한 채 인간을 초월하려다 결국 인간성과도 단절된 채 무너진다. 그의 몰락은 과학기술이나 창조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이후의 감정적 책임을 외면한 윤리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가 만든 괴물은 단지 생명이 아니라, 외면된 감정이며, 돌보지 않은 진심의 형상이었다. 빅토르의 이야기는 창조에 대한 경고이기 이전에, 감정 없는 관계와 책임 없는 지식이 어떻게 인간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몰아갈 수 있는지를 묻는 비극이다.


괴물


괴물은 '프랑켄슈타인' 속에서 가장 인간적인 존재이자, 가장 인간에게서 멀어진 존재다. 그는 생명을 선택하지 않았고, 태어난 순간부터 창조자의 공포와 외면에 직면한다. 세상은 그를 이해하지 않았고,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설명받지 못한 채 세상에 던져진다. 그는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타인을 관찰하며 감정을 이해하려 애쓰지만, 어디서든 그의 외형은 혐오의 대상이 되고, 그의 존재는 공포로만 환원된다. 괴물은 악하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사랑받지 못한 끝에 자신이 괴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 존재다. 그가 보여주는 고통은 단지 버려진 피조물의 분노가 아니라,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반복해서 학습당한 존재의 자의식에서 비롯된다. 그는 누군가와 연결되고자 손을 내밀었으나, 매번 그 손은 공포 속에서 뿌리쳐졌고, 끝내 그는 복수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괴물은 단순히 ‘괴물’이 아니다. 그는 타인의 눈에 비친 외형으로만 정체성이 결정되는 모든 존재의 상징이며, 사회가 거부한 타자의 얼굴이다. 그의 분노는 자신을 만든 창조자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이 되고자 했던 자신 안의 기대와 열망이 무너진 데 대한 절망의 표출이다. 괴물은 철저히 고독하고, 그 고독은 학습된 것이다. 그는 말하고, 느끼고, 문학과 철학을 흡수하는 존재이지만, 그 모든 인간적인 노력은 외형 하나로 무시당한다. 괴물은 빅토르의 피조물이지만, 동시에 그의 거울이기도 하다. 창조자와 피조물은 서로를 통해 자신을 확인하지만, 어느 누구도 서로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 단절 속에서 괴물은 점차 인간성을 포기하고, 파괴자라는 이름에 스스로를 적응시킨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거절당한 존재가 살아남기 위해 택한 최후의 방식이었다.

괴물의 비극은 생명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다. 그는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고통받았고, 감정이 있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끝내는 자신을 만든 자의 시선 속에서조차 ‘타자’로 남겨졌다. 그는 외로움의 결정체이며, 사랑을 받지 못한 감정의 화석이고, 이해받지 못한 언어의 화신이다. 그가 최후에 택한 소멸은 복수의 완성이 아니라, 존재의 끝에 남겨진 실패로 보인다.


엘리자베스 라벤차


엘리자베스는 가장 조용하고 온화한 인물이지만, 그녀의 침묵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빅토르가 끊임없이 외면해 온 인간적 감정과 정서적 유대를 대변한다. 어릴 적 고아로 프랑켄슈타인 가문에 입양된 그녀는 자연스럽게 빅토르의 약혼녀가 되며, 빅토르의 삶에서 유일하게 남은 감정적 중심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자신의 욕망이나 판단을 말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오히려 빅토르의 침묵과 이탈, 책임 회피가 어떤 고통과 결핍을 낳는지를 조용히 증명하는 존재이다. 빅토르가 진실을 털어놓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면서도, 끝내 그는 엘리자베스에게조차 자신이 창조한 공포를 말하지 못한다. 그 결과, 그녀는 결혼식 당일 밤, 창조자의 죄가 피조물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지는 복수의 희생자가 된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지 못한 인물이다. 그녀의 삶은 빅토르의 감정과 결정에 종속되어 있으며, 그녀는 그 구조 안에서 언제나 사랑을 주는 자, 기다리는 자, 이해하려는 자로만 남는다. 하지만 이러한 수동성은 그녀의 무력함이 아니라, 작중 세계에서 ‘감정의 목소리’가 얼마나 쉽게 침묵당하고 파괴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녀의 희생은 단지 한 인물의 죽음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끈이 끊어진 자리에서 사랑이 얼마나 쉽게 고립되고 파괴될 수 있는지를 상징한다. 빅토르에게 엘리자베스는 구원이었지만, 그는 끝내 그 구원을 감당할 용기조차 갖지 못했다.

엘리자베스의 죽음은 작품의 전환점이자 종결 선언이다. 그것은 더 이상 감정이 복원되지 않는 지점, 과학과 윤리, 사랑과 침묵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녀는 인간적인 삶의 가능성이자, 빅토르가 붙잡았어야 했던 마지막 손이었다. 그 손을 놓은 것은 괴물이 아니라, 침묵 속에 진실을 가둔 창조자 자신이다. 따라서 엘리자베스는 단순한 비극적 피해자가 아니라, 빅토르의 실패가 어떤 인간적 상실을 초래하는지를 육체로 증언하는 존재이며, 작품 전체를 감정적으로 정리해 주는 조용한 중심이다.


헨리 클레르발


빅토르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며, 빅토르가 무너져가는 동안에도 끝까지 곁을 지킨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인문학과 문학, 언어와 여행을 사랑하는 이상주의자이며,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인물이다. 빅토르가 생명 창조라는 거대한 야망에 몰두해 갈수록, 클레르발은 그의 주변을 채워주는 유일한 현실이자 인간적인 균형을 상징한다. 그는 조용하지만 확고하게 빅토르를 감싸며, 때로는 그가 잃어버린 삶의 온기를 대신 살아주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감싸고 있던 빅토르의 고통과 침묵의 깊이를 끝내 알지 못한 채, 또 다른 비극의 희생자가 된다.

클레르발은 작품 속에서 지성과 감정, 이성과 정서를 조화롭게 갖춘 인물로, 빅토르가 도달하지 못한 인간성의 가능성을 체현한다. 그는 과학보다는 인간의 언어와 상상력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며, 빅토르의 몰락을 앞에서 막지 못했지만, 작품 전체에서 단 한 번도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폭력의 피해가 아니라, 감정을 잃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이 바로 감정을 지닌 자라는 역설을 보여준다. 빅토르가 그를 통해 잠시나마 안도하고 회복할 수 있었던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는 그 순간조차 끝내 스스로 지켜내지 못한다. 침묵 속에서 빅토르는 다시 한번 말하지 않았고, 클레르발은 빅토르의 또 하나의 비밀과 함께 죽어간다.

그의 죽음은 작품 속에서 그 어떤 장면보다 조용하게, 그러나 무겁게 그려진다. 그것은 절규도, 장엄한 복수도 아닌, 말해지지 못한 진심과 알려지지 않은 죄책감의 무게 아래 묻힌 슬픔이다. 클레르발은 인간성의 등불이었고, 그것은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꺼졌다. 빅토르는 그의 시신을 마주하며 고통을 토해내지만, 그 슬픔조차 명확한 책임의 자각이 아니라, 자신에게 돌아온 파국의 그림자일 뿐이다. 클레르발이 끝내 알지 못한 진실은, 빅토르가 끝내 감당하지 못한 인간성의 뒷모습이었고, 그 죽음은 작품의 정서적 중추에서 가장 절묘하게 사랑과 침묵, 우정과 비밀의 균열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로버트 월턴


그는 작품의 가장 바깥 서사에서 우리와 작품을 잇는 인물이다. 그는 북극을 탐험하던 중 얼음 위에서 조난당한 빅토르를 구조하며, 창백하고 지친 그 남자의 입을 통해 한 시대의 가장 끔찍한 고백을 듣는다. 표면적으로는 편지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액자화자에 불과하지만, 월턴은 단순한 서술자의 위치를 넘어서 빅토르의 또 다른 반영, 혹은 그가 되지 않을 수 있었던 인간의 가능성으로 기능한다. 과학과 발견, 인간의 한계에 대한 도전을 열망하는 야망가로서, 그는 빅토르와 동일한 위치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 욕망의 끝을 직접 듣고 마주한 자로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항로를 포기한다.

월턴은 빅토르의 파국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한 생존자다. 그는 끝없는 탐험과 성취를 향한 이상을 품고 있었고, 빅토르의 처절한 서사를 들으면서도 한동안 그 길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그는 빅토르의 죽음과 괴물의 마지막 고백을 지켜본 뒤, 더 나아가지 않기로 선택한다. 이 장면은 작품 전체에서 유일하게 욕망의 정지, 자기 성찰의 가능성, 인간적 한계를 받아들이는 장면이다. 월턴의 후퇴는 패배가 아니라, 빅토르가 끝내하지 못했던 윤리적 결단이며, 괴물이 끝내 받지 못했던 이해와 연민이 남아 있는 인간의 흔적이다.

그는 이야기의 바깥에서, 그러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과학의 오만, 외면된 감정, 책임의 결핍이 낳은 비극을 들여다본다. 월턴은 그 이야기의 독자가 된다. 동시에 그는 독자인 우리에게 ‘어떻게 이 이야기를 들을 것인가’라는 윤리적 질문을 다시 던지는 존재다. 그는 빅토르와 괴물 사이 어디쯤에 서 있는 인간이다. 창조자가 될 수도 있었고, 이해자가 될 수도 있었던, 경계선 위의 목소리다. 그의 존재는 '프랑켄슈타인'이 단지 하나의 고백이 아니라, 그것을 누가 듣고, 어떻게 되새기느냐에 따라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침묵은 공모가 아니라, 숙고를 위한 간격이다.


저스틴 모리츠


프랑켄슈타인 가문의 하녀로, 작품 속에서 가장 선하고 조용한 인물 중 하나지만, 그녀가 감당해야 하는 고통은 작품 전체에서 가장 맹목적이고 잔혹하다. 그녀는 어린 윌리엄의 죽음 이후 살인범으로 몰리고, 아무 증거 없이 감정적 선입견과 상황의 우연성에 의해 유죄를 선고받는다. 그녀의 처형은 단순한 억울한 죽음을 넘어,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사회적 폭력의 무의식성과 제도의 무능함, 그리고 침묵과 외면이 만든 희생의 구조를 정면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녀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고, 자신을 지킬 힘도,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단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고요한 신념으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지만, 그 수용은 체념이 아니라 세상이 요구한 침묵의 형태였고, 그 침묵은 결국 빅토르의 침묵과 병치되어 작품 전체를 더 깊은 죄의식으로 물들인다.

저스틴의 존재는 괴물보다도 더 무력한 자의 고통을 상징한다. 괴물은 힘이 있었고, 스스로 분노를 선택했지만, 저스틴은 완전히 타인에 의해 정의되고, 억울하게 말살당한 인물이다. 그녀의 희생은 빅토르가 만든 첫 번째 피조물의 첫 번째 파괴이자,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최초의 죽음이다. 그녀의 처형은 괴물의 살인 때문이 아니라, 빅토르의 침묵과 방관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그녀가 무고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법정에도, 가족에게도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이는 단지 한 인간의 죽음을 방관한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만들어낸 부정의에 대해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는 상징적 선언이다.

저스틴은 가장 목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가장 명확한 질문을 남긴다. 죄 없는 자는 왜 죽었는가. 누구의 침묵이 그 죽음을 가능하게 했는가. 그녀는 피해자였고, 동시에 판단당한 존재였으며, 자신이 한 번도 주체가 되어보지 못한 세계 속에서 형벌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는 법과 질서가 얼마나 쉽게 감정과 편견에 휘둘리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작중에서 가장 순수한 윤리적 상징으로 남는다.


윌리엄 프랑켄슈타인


윌리엄 프랑켄슈타인은 가장 어리고 가장 순수한 존재로 등장한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이며, 아직 세계로부터 상처받지 않은 존재다. 그러나 그 순수함은 작품이 구축한 윤리적 질서에서 가장 먼저 파괴된다. 그의 살해는 괴물이 인간 사회로 돌아와 처음으로 현실에 흔적을 남기는 순간이며, 동시에 피조물이 창조자에게 돌려주는 최초의 질문이기도 하다. 빅토르가 창조 후 버려둔 존재가 돌아와 무고함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고통을 말하려 한 것, 그것이 바로 윌리엄의 죽음이 갖는 의미다. 이 장면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세상에 외면당한 존재가 가장 깨끗한 대상에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한 왜곡된 몸짓이다.

윌리엄은 결코 괴물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지만, 괴물은 그가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빅토르의 피라고 느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죽인다. 이는 단지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사랑받지 못한 존재가 사랑의 상징을 지우려 한 절망적 시도이기도 하다. 그 살해는 감정의 분노이자 동시에 감정의 부재에서 비롯된 파괴이며, 빅토르가 피조물의 탄생 이후 외면한 책임이 어떤 식으로 세상에 되돌아오는지를 가장 날카롭게 보여준다. 윌리엄은 죄가 없었고, 그 죄 없는 죽음은 저스틴의 처형으로 이어지며, 한 아이의 살해가 한 여인의 죽음으로 확장되는 구조 속에서, 침묵과 부재가 만들어낸 복합적 파국이 펼쳐진다.

윌리엄은 상징적으로 순수한 세계의 붕괴를 의미한다. 그의 존재는 아직 선택하지 않은 삶, 결정하지 않은 윤리, 판단하지 않은 눈을 상징하며, 괴물은 바로 그 세계를 깨뜨린다. 윌리엄의 죽음은 빅토르가 만든 존재가 단지 살 수 없었던 존재가 아니라, 이미 누군가의 삶을 지울 수 있는 힘을 지닌 존재로 현실에 뿌리내렸음을 보여주는 첫 증거다. 이 아이의 죽음 앞에서 빅토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자신이 만든 고통이 어떻게 무고한 삶들을 무너뜨리는지를 조용히 지켜볼 뿐이다.


알퐁스 프랑켄슈타인


그는 자애로운 아버지이자 안정된 가문의 가장이며, 빅토르가 방황할 때마다 그에게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가정’의 자리를 지켜주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의 안정감은 어디까지나 배경에 머물고, 빅토르의 내면에는 진정한 보호막이 되지 못한다. 그는 언제나 침착하고, 아들을 이해하려 노력하지만, 그 이해는 언제나 결과를 뒤따르는 방식으로만 나타난다. 빅토르가 죄책감과 고통에 사로잡혀 있을 때도, 클레르발이 죽었을 때도, 엘리자베스가 죽기 전날까지도, 아버지는 아들의 말하지 않는 고통에 끝내 다가가지 못한다.

그는 빅토르의 비밀을 끝내 듣지 못한 인물이다. 아들은 말하지 않았고, 아버지는 묻지 않았다. 둘 사이의 부성애는 외견상 평화롭지만, 실상은 감정의 틈이 벌어진 관계다. 알퐁스는 아들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아들의 내면과 연결되기보다, 가문과 사회적 질서 위에 놓인 사랑이었다. 그는 가정의 안전을 지키려 했지만, 정작 빅토르가 안겨야 할 고통과 혼란을 감싸지 못했고, 대신 그것을 조용히 회피하거나 늦게 받아들인다. 그의 죽음은 이러한 부성의 한계가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이다. 가족의 연속적인 붕괴 속에서 그는 더 이상 감정적 지주로 기능할 수 없었고, 결국 병에 쓰러진다. 작품은 그 죽음을 병리적인 것이라 설명하지만, 실상 그것은 아버지가 감당하지 못한 아들의 고통이 만든 감정적 붕괴다.

알퐁스는 가부장제의 얼굴을 한 순한 권위였다. 그는 강압적이지 않았고, 폭력적이지도 않았지만, 그의 부드러움은 정작 가장 필요한 순간에 아들을 지탱하지 못하는 무력한 온기였다. 빅토르가 끝내 고백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아버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퐁스는 모든 고통의 한복판에 있었지만, 어떤 진실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인물이며, 결국 가족의 해체와 파국을 함께 따라가다가 조용히 무너지는 인물이다.


드 라세이 가족


드 라세이 가족은 '프랑켄슈타인'에서 괴물이 처음으로 인간을 관찰하고, 배우고, 사랑하게 되는 창을 제공하는 인물들이다. 몰락한 귀족이자 가난하게 숲 속 오두막에서 살아가는 이 가족은, 괴물의 시선 속에서 따뜻함과 연대, 서로에 대한 배려로 가득 찬 인간 공동체로 비친다. 괴물은 그들의 삶을 몰래 지켜보며 언어를 배우고, 감정을 익히고, 문학과 윤리를 이해해 나간다. 그는 책을 통해 말의 구조를 이해하고, 그들의 행동을 통해 감정의 방식과 관계의 온도를 체득해 간다. 드 라세이 가족은 괴물에게 있어서 인간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처음으로 자극한 대상이며, 외면당했던 존재가 타인과 연결되기를 진심으로 꿈꾸게 만든 첫 번째, 그리고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그 기회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괴물은 그들과의 접촉을 준비하며, 특히 장님인 노인 드 라세이를 통해 말로써 먼저 다가가려 한다. 그가 준비한 방식은 조심스럽고, 진심 어리며, 인간적인 것이다. 하지만 가족 구성원들이 그 모습을 보고 공포에 질려 괴물을 내쫓는 순간, 그는 자신이 아무리 인간을 이해하려 애써도, 외형 하나로 모든 노력이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한다. 드 라세이 가족은 괴물에게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지 않았지만, 그 공포와 배척은 괴물의 가장 깊은 좌절과 분노를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그 장면 이후 괴물은 더 이상 인간 사회로 다가가려 하지 않으며, 자신이 끝내 어떤 인간성도 얻을 수 없는 존재임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이 가족은 괴물이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을 실험하던 실험장이었고, 동시에 그 가능성이 좌절되는 극적인 무대였다. 괴물은 그들 속에서 살아보고 싶었고, 그들의 감정을 공유하고 싶었지만, 그 환상은 말없이 무너졌다. 드 라세이 가족은 결코 악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보여준 공포는 괴물에게 인간 세계의 본질을 가르쳐주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작품은 이 장면을 통해 이해의 가능성과 외형에 대한 본능적 거부 사이의 단절을 정확하게 그려낸다. 그 단절은 논리나 교육으로는 넘을 수 없는 것처럼 묘사되며, 괴물의 인간성은 바로 그 지점에서 가장 깊게 찢어진다.

결국 드 라세이 가족은 괴물이 닿고자 했던 인간성의 이상향이자, 동시에 그 이상향이 허상임을 증명해 버린 비극의 풍경으로 남는다. 그들의 집은 더 이상 언어와 감정의 안식처가 아닌, 불태워진 기억이 되고, 괴물은 그 재 속에서 자신이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냉정한 진실만을 가져간다.




빅토르가 괴물을 창조한 후, 도망치지 않고 마주했다면.


만약 빅토르가 괴물을 창조한 그 순간, 외면하지 않고 그의 눈을 마주했다면, '프랑켄슈타인'은 전혀 다른 비극의 궤도를 걸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단지 생명을 만들었다는 행위가 아니라, 그 생명이 눈을 뜨자마자 존재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이다. 괴물은 자신의 외형으로 인해 거절당했고, 그 거절은 단 한 번의 시선, 단 한 사람의 외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만약 빅토르가 그 피조물 앞에서 공포를 감내하고, 경멸 대신 돌봄을 선택했다면, 괴물은 “괴물”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말과 감정, 윤리와 공감을 스스로 익힐 수 있는 존재였고, 처음부터 사랑을 받은 존재였다면, 복수는 존재할 필요가 없었고, 비극도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빅토르는 창조의 책임을 실험적 행위로 축소했지만, 생명은 실험이 아니다. 생명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곧 그 생명에 감정과 관계의 구조를 제공해야 할 의무를 수반한다. 만약 그가 처음부터 괴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의 고통과 의문을 함께 풀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괴물의 고립은 사랑으로 전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괴물은 인간을 흉내 내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으로 살기를 원했던 존재였다. 그에게 필요한 건 창조가 아니라 존재의 수용과 이해, 그리고 이름이었다. 빅토르가 그를 창조한 뒤, 이름을 주고 말을 가르치고, 함께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를 가졌다면, 그 고통은 관계 속에서 녹아들었을 것이다.

더 깊이 들어가자면, 이 가정은 단지 피조물을 향한 태도의 변화에 머물지 않는다. 이것은 빅토르 자신이 인간으로 남을 수 있었던 유일한 가능성이기도 했다. 그는 창조를 통해 신이 되려 했지만, 창조 이후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인간성까지 잃어갔다. 피조물과의 마주침은 곧 자신의 내면, 자신의 감정과 윤리에 대한 마주침이다. 괴물을 수용했더라면, 그는 타자의 고통을 인정하는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대신 그는 도망쳤고, 침묵했고, 관계를 피했고, 그 결과 모든 감정은 파괴로 돌아왔다. 괴물이 아니라, 빅토르의 외면이 비극의 씨앗이었던 것이다.

이 작품은 결국 어떤 감정이 사랑받지 못했을 때, 어떤 존재가 외면당했을 때, 세상이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말하는 서사다. 빅토르가 창조 후 도망치지 않고, 눈을 마주했더라면, 이 작품은 비극이 아닌 구원의 이야기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가정을 비극 속에서 되묻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너무 늦게 오면, 그 자체로도 폭력이 된다. 빅토르가 그 사실을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괴물도, 그는 물론 그들의 세계 자체도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빅토르가 괴물의 요청을 받아들여 여성 피조물을 만들었다면.


괴물의 요청을 받아들여 여성 피조물을 만들었다면, '프랑켄슈타인'은 완전히 다른 윤리적 서사를 열었을지도 모른다. 그 행위는 하나의 몸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관계의 가능성을 창조하는 행위가 되었을 것이다. 괴물은 파괴자가 되기 전에 끊임없이 연결을 요청했고, 그 연결의 마지막 형태로 여성 피조물을 요구했다. 그것은 단순히 짝을 바란 것이 아니라, 사랑받지 못한 존재가 타인과의 감정을 통해 인간성을 다시 구성해보고자 한 최후의 간청이었다. 만약 그 요청이 받아들여졌다면, 그것은 괴물의 구원만이 아니라, 빅토르의 구원도 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순간, 창조자는 비로소 창조자가 아닌 공존의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가정은 단순하지 않다. 빅토르가 여성 피조물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또 다른 생명의 창조였고, 또 다른 책임의 시작이었다. 그는 이미 한 번 피조물을 외면했고, 이 두 번째 창조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 이유는 단지 재앙의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다시 감당하지 못할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공포였다. 그는 두 번째 피조물도 끝내 자신에게 향할지도 모른다는, 통제할 수 없는 세계의 도래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윤리적 선택이 아니라, 자기 보존적 회피였다. 만약 그 두려움을 넘어서서, 그는 한 존재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사랑이 결핍된 생명에게 사랑할 수 있는 존재를 허락했다면, 괴물은 더 이상 파괴를 통해서만 세상에 반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 가정은 괴물의 타자성을 공동체 내부로 받아들이는가의 문제와 연결된다. 여성 피조물의 창조는 단지 괴물의 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괴물의 존재 자체를 인정한다는 윤리적 선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 세계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존재를 위해 또 하나의 존재 공간을 열어주는 결정이며, 배제된 타자에게 말할 권리와 살아갈 권리를 동시에 허락하는 행위였다. 빅토르가 그 요청을 끝내 거부하고, 만들어진 몸을 산산이 부수는 장면은 단순한 과학적 판단이 아니라, 타자와의 공존 가능성을 인간 스스로 거부한 선언이었다. 그 거부 이후 괴물은 더 이상 인간이 되고자 하지 않으며, 오직 파괴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기 시작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이 선택의 순간에서 인간의 이성이 선택한 방향이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빅토르는 공존보다 침묵을 택했고, 이해보다 공포를 앞세웠으며, 창조자의 자리에 있었지만, 생명과 관계의 책임 앞에서는 끝내 후퇴했다. 만약 그는 여성 피조물을 만들고, 그 두 존재가 이 세상 어딘가에서 서로를 통해 인간성을 회복해 갔다면, 이 이야기는 더 이상 괴물과 창조자의 비극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에 응답한 세계의 가능성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만들지 않았다. 그것이 이 작품이 여전히 비극이고,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괴물이 인간이 되기를 원했던 순간, 인간은 그 문을 닫았고, 그 잃어버린 가능성은 작품 전체를 따라 흐르는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무거운 상실로 남는다.


괴물은 왜 끝내 빅토르를 용서하지 않았는가.


괴물은 끝내 빅토르를 용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용서의 부재는 단순한 복수심이나 파괴 본능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오래 기다린 사랑의 결핍이 만들어낸 감정적 절단선, 혹은 관계의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인 자의 마지막 침묵이다. 그는 처음부터 악하지 않았다. 처음엔 배움을 갈망했고, 언어를 익혔고, 감정을 키웠으며, 인간을 닮고 싶어 했다. 그가 빅토르를 미워하게 된 것은 자신이 태어난 이유나 존재의 목적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창조자에게서 받은 첫 시선이 혐오와 공포였기 때문이다. 그 시선 하나로, 그는 스스로를 사랑받지 못할 존재로 규정하게 된다.

그는 용서를 구걸한 적이 없다. 대신, 그는 이해받고 싶어 했다. 존재 자체가 받아들여지고, 그 안에서 감정이 공유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찾고 싶어 했다. 그러나 빅토르는 단 한 번도 그와 감정적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창조자와 피조물이라는 관계는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 감정적 단절의 은유다. 괴물은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이 만든 고통과 폭력을 스스로 감당했지만, 그 고통을 만들어낸 빅토르에게서 단 한 번의 사과, 한 조각의 진심 어린 이해, 혹은 손을 내미는 제스처조차 받지 못했다. 용서는 그런 감정적 공간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빅토르는 끝까지 침묵했고, 괴물의 존재를 외면했다. 괴물은 결국 그 침묵을 해석할 수 없었고, 그 침묵이 곧 자신에 대한 거절의 완성이라고 받아들였다.

더 중요한 것은, 괴물은 빅토르를 증오하면서도 동시에 그를 갈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빅토르를 따라다녔고, 그를 마주하길 원했고, 그의 고통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복수는 증오의 완성이라기보다, 사랑의 실패가 빚어낸 유일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의 끝에서, 빅토르는 단 한 번도 그를 껴안지 않았다. 괴물은 빅토르가 죽은 후, 그 시신 앞에서 슬퍼한다. 그 순간조차 용서가 없었던 이유는, 그의 고통이 이해받지 못한 채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용서는 관계의 회복이 아니라, 관계의 존속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엔 이미 오래전에 회복될 수 없는 단절이 있었다.

괴물은 끝내 인간이 되지 못했고, 빅토르는 끝내 신이 되지 못했다. 둘 다 서로를 향해 손을 뻗을 수 있었지만, 그 손은 항상 공기 속에 멈췄다. 용서가 없었던 건, 증오가 너무 커서가 아니라, 말해지지 않은 감정이 너무 오래 묵혀졌기 때문이다. 용서는 감정이 남아 있는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프랑켄슈타인'이 보여주는 세계는 감정이 하나씩 사라지고, 말이 끊기고, 이해가 포기되는 세계다. 괴물이 용서하지 않았던 건, 결국 누군가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한 번도 사랑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끝내 그에게 도달하지 않았고, 용서는 그 부재의 잔해 속에서 태어날 수 없었다.


괴물은 왜 스스로 소멸을 택했는가.


괴물은 결국 스스로의 존재를 끝내기로 결심한다. 그의 소멸은 단순한 파괴가 아닌, 가장 인간다운 선택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괴물은 인간에게 외면당하고, 창조자에게 거부당했으며,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못했지만, 끝에 이르러 그는 인간보다 더 윤리적이고, 더 감정적인 결정을 내린다. 그는 복수를 완성한 뒤에도 기억과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빅토르가 죽음으로 모든 고통을 멈춘 것처럼, 그 역시 고통과 상처의 반복을 스스로 끊기로 한 것이다.

괴물의 소멸은 자기 이해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는 복수를 완수함으로써 빅토르의 세계를 무너뜨렸지만, 그 폐허 위에 새로운 삶을 세울 수는 없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사랑받는 존재로서의 삶이었지, 파괴의 주체가 되는 삶은 아니었다. 그가 원했던 감정은 관계 속에서 피어나야 했지만, 그는 언제나 단절된 감정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고립, 절망, 분노,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외로움의 감정은 그를 더 이상 살게 하지 않았다.

또한 그의 선택은 윤리적인 결단으로도 읽힌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 미친 영향을, 자신의 손으로 끝내기로 결심한다. 이는 단순한 자기 파괴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더 이상 반복하지 않겠다는 선언, 혹은 “나는 이제 누구의 고통도 만들지 않겠다”는 마지막 도덕적 책임이기도 하다. 괴물은 빅토르보다 더 인간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자신에게 돌아오는 감정의 무게를 그대로 짊어졌으며, 끝내 그 모든 무게가 이 세상에 남지 않도록 소멸이라는 형태의 책임을 택했다.

가장 깊은 차원에서, 괴물의 소멸은 존재 그 자체의 의미에 대한 회의이다. 그는 배웠고, 사랑하려 했고, 스스로를 인간으로 만들어보려 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끝내 “인간다움”이라는 말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는 인간의 언어를 익혔지만, 그 언어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그는 감정을 품었지만, 그 감정은 대상 없는 메아리로 흩어졌다. 세상이 존재에게 아무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다면, 존재는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괴물의 소멸은 바로 그 마지막 남은 존엄의 의지였다.

괴물은 죽음을 통해 자기를 정리하고, 세상을 정리하고, 빅토르와의 비극적 연대를 정리한다. 그는 등 돌린 신을 끝까지 따라갔고, 그 끝에서 신 없는 세계에서의 자기 해석을 선택했다. 이 소멸은 절망의 결과이자, 동시에 사랑받지 못한 존재가 자신의 감정을 정직하게 끝내는 방식이었다. 그 안엔 복수도, 분노도 남아 있지 않다. 오직 말해지지 못한 슬픔, 이해받지 못한 감정, 그리고 인간이 되고 싶었던 존재의 마지막 정리만이 남는다.



월턴은 왜 항해를 포기했는가.


로버트 월턴이 북극 항해를 포기한 결정은 단지 환경적 위험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야기 속에서 욕망과 이성, 이상과 책임 사이의 갈등이 마침내 도달한 정점이자 전환이었다. 그는 처음 편지에서부터 “인류의 위대한 발견”을 열망하는 과학적 낭만주의자로 그려진다. 그러나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을 만나고, 그의 고백과 파멸을 지켜보며, 그 열망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직접 목격하는 청자가 된다.

빅토르는 월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너도 나처럼 되지 말라”라고 경고한다. 이 경고는 단지 말로 전달된 것이 아니라, 육체의 몰락, 정신의 소진, 창조가 남긴 죽음의 궤적을 고스란히 품은 육성의 진술이었다. 월턴은 그것을 단순히 듣지 않고 내면화한 청자가 되었고, 마침내 자신의 항해를 멈추는 선택으로 응답한다. 이 선택은 그가 파멸의 전철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 즉 욕망의 유혹을 감정과 이성으로 제어하는 드문 선택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월턴이 처음부터 이성적인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편지 속에서 “영광”과 “위업”을 말하며, 빅토르가 걸었던 길을 거의 동일하게 걷고 있었다. 빅토르는 생명의 비밀을 밝히겠다는 이름 아래 금기를 넘었고, 월턴은 북극을 향한 항로를 개척하겠다는 이름 아래 죽음을 무릅썼다. 하지만 월턴은 달랐다. 그는 누군가의 파멸을 충분히 들을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자신을 되돌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월턴의 항해 포기는 한 인간이 자기 욕망의 정당화 과정을 중단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려는 윤리적 결단이다.

이 결단은 또한 작품 전체의 구조를 닫는 열쇠이기도 하다. '프랑켄슈타인'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고, 월턴은 이 이야기의 최후의 전달자다. 즉, 창조자(빅토르)의 몰락, 피조물(괴물)의 소멸,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청자(월턴)의 선택이 삼중 구조를 완성한다. 월턴이 항해를 포기함으로써, 작품은 비로소 이야기의 교훈이 ‘현실’에 도달했음을 선언한다. 그는 청자였지만, 그 순간 작중 가장 윤리적인 인간이 되었고, 빅토르의 실패를 이해하고 반응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월턴의 항해 포기는, 실패한 창조자와 고통받은 피조물의 이야기가 단지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교훈으로 누군가에게 전이될 수 있다는 희망이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이 이 소설이 남긴 마지막 가능성이다.


살인과 복수, 파괴를 행한 괴물은 악한 것 아닌가.


괴물은 분명 살인을 저질렀다. 그것도 죄 없는 아이(윌리엄), 무고한 하녀(저스틴), 친구(헨리), 연인(엘리자베스), 그리고 창조자의 아버지까지, 그의 손끝에서 피로 얼룩진 이름들이 늘어간다. 그렇다면 그는 악한가? 소설은 그 질문을 던지되, 끝내 명확히 단죄하지 않는다. '프랑켄슈타인'이 창조자 빅토르만큼이나 괴물에게도 서사를 허락한 이유는, 그의 폭력이 단순한 본성의 결과가 아니라, 사랑받지 못한 존재의 가장 절망적인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괴물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버린 창조자를 기다리고, 언어를 배우고, 인간의 삶과 도덕을 관찰하며 사람처럼 사랑하고 싶었던 존재였다. 그러나 그 모든 시도는 “외형” 하나로 무너졌다. 인간 사회는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고, 괴물은 끝내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복수를 선택한다. 즉, 그는 인간이 자신에게 가한 거절과 혐오를 가장 인간적인 방식, 폭력으로 되갚은 존재인 셈이다.

이는 단순한 악의가 아니라, 거절당한 존재의 윤리 붕괴다. 악은 때때로 본성이 아니라, 공감받지 못한 감정이 무너져 내리는 구조 속에서 발생한다. 괴물은 자신의 슬픔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가장 순수한 존재를 파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을 낳은 자에게 되돌려주는, 가장 비인간적인 방식으로서의 절박한 인간다움이었다.

괴물은 죄가 없다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죄는 자연스러운 악이라기보다, 버려짐과 소외가 만든 비극의 굴레였다. 그는 누군가의 손끝에서 태어난 존재였지만, 그 어떤 손도 그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받아들여지지 못한 자”로서, 자신이 원하는 인간다움을 파괴의 방식으로라도 증명하려 했던 것이다.

결국, 괴물은 악한가? 이 질문은 단순한 윤리의 판단을 넘어, 우리는 무엇을 악이라 부를 수 있는가라는 더 깊은 반문으로 나아간다.


외형은 본질을 결정하는가.


'프랑켄슈타인'은 이 질문을 소설 전체에 걸쳐 끈질기게 되묻는다. 괴물은 처음부터 본질적으로 악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언어를 배우고, 인간의 가족을 숨어서 지켜보며, 타인의 따뜻함에 감동하고, 사랑과 우정을 꿈꾸는 감정과 이성을 지닌 존재였다.

괴물의 외형은 빅토르가 죽은 육신을 이어 붙여 만든 것이며, 과학과 인간의 오만이 탄생시킨 "형상"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외형은 곧 그 존재의 모든 의미와 가치를 규정해 버렸다. 괴물이 어떤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세상은 그의 목소리를 듣기보다 그의 얼굴을 먼저 본다. 그는 “보이기 때문에” 두려운 존재가 되었고, “무섭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여기서 메리 셀리는 외형과 본질 사이의 단절을 통해, 근대 사회의 편견과 인간 심리의 한계를 비판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시각은 가장 즉각적이고 절대적인 판단의 기준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곧 타자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벽이 되기도 한다. 괴물의 도덕성과 고통, 감정은 모두 외면되었고, 그는 자신이 아닌 외형이 만든 타인의 시선 속 자아에 의해 점점 괴물로 길들여진다.

외형은 본질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은 외형으로 본질을 정의하려 한다. '프랑켄슈타인'은 그 폭력적인 등식을 찢어버리고자 한다. 괴물이 끝내 복수의 길을 선택할 때, 그는 외형이 아니라, 외형에 갇힌 본질이 절규한 결과물이 된다. 그것은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나는 너희가 말한 괴물이다”라는 역설적 자기실현이자, 거울 속 세계가 현실을 뒤덮는 비극이다.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인간을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가? 그 외형이 아닌, 말하지 못한 슬픔과 감정, 그리고 누군가에게 다가가려 했던 손길의 기억, 그 모든 것이 외면당할 때, 본질은 외형에 패배하고, 인간은 괴물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프랑켄슈타인'에서 외형은 본질을 결정하지 않지만, 사회의 인식은 외형으로 본질을 결정지어버린다. 이 비극적인 오류가 바로 작품이 경고하고자 한 인간성의 맹점이다.


창조는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프랑켄슈타인'은 “창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물음을 향해 간다. “창조자는 자신이 만든 존재에 대해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것은 단지 과학의 경계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신의 위치에 서려할 때 감당해야 할 윤리의 무게를 가리킨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을 창조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순간 책임을 유기한다. 그는 피조물이 깨어나는 모습을 보자마자 공포에 질려 도망친다. 그 결과, 태어난 존재는 세상에 던져진 채 자기 존재를 증명할 길도, 자신을 이해해 줄 창조자도 없이 고독과 혐오 속에 방치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프랑켄슈타인'은 창조가 단순한 '만듦'이 아니라, 끝까지 책임지는 돌봄과 이해의 과정임을 통렬히 고발한다.

빅토르는 괴물을 만든 순간 멈췄지만, 생명은 창조 그 이후부터 시작된다. 피조물은 감정을 배우고, 언어를 익히며, 관계를 갈망하고, 거절과 외면을 통해 파괴된다. 이 모든 과정은 창조자가 감당해야 할 후속의 윤리적 의무였다. 그러나 그는 회피했고, 피조물은 그 공백을 폭력으로 증명한다. 이는 단순한 비극이 아니다. 책임지지 않은 창조가 만든 필연의 결과다.

현대 사회에서 이 질문은 더욱 선명해진다. 유전자 조작, 인공지능, 로봇, 생명 공학 등 수많은 ‘창조’가 이뤄지는 시대에, '프랑켄슈타인'은 기술의 성공보다 윤리의 책임이 먼저여야 함을 경고한다. 창조가 단지 가능하다는 이유로 행해졌을 때,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이 비어 있는 한, 인간은 또 다른 괴물을 낳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괴물은 사회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 자신의 부정된 얼굴이 되어 돌아온다.

빅토르는 단 한 번도 피조물의 고통을 진심으로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죄책감과 공포에 매몰되었고, 그것은 창조자로서의 윤리를 끝내 회복하지 못하게 만든다. 창조는 권능이 아니라, 관계의 시작이며, 그 끝은 이해와 책임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이 등장하는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괴물이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마지막 장까지 흔들림 없이 끌고 가며, 우리의 시선을 조용히 창조자의 등 뒤로 데려간다. 마침내 우리는 그가 어떤 표정으로 피조물의 울부짖음을 외면했는지를 마주하게 되고, 괴물이라 불리는 존재가 누구였는지를 되묻는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이 신의 자리를 욕망한 대표적인 존재다. 그는 생명을 창조했지만, 그 이후로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았다. 그의 창조는 창조의 완성이라기보다, 책임을 포기한 채 버려진 절반의 신성이었다. 그 절반의 창조는 고스란히 괴물에게 전가되었고, 괴물은 생명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외로움과 거절이라는 본능으로 살아가야 했다. 사랑받지 못한 생명은 결국 ‘복수’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고, 그 복수는 외면받은 감정이 가장 인간적으로 발현되는 방식이었다.

소설은 괴물의 살인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를 “악”이라 명명하지도 않는다. 그의 죄는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거절당한 존재가 끝없이 거울을 들이대며 인간을 닮으려 했던 슬픔의 뒤틀림이었다. 그는 단지 살인자가 아니라, 사랑받고 싶었던 존재의 최후의 몸부림이었으며, 그 절규는 빅토르의 창백한 윤리 위에 내리 찍힌 문장이었다.

그렇기에 '프랑켄슈타인'은 단지 공포 소설이 아니라, 윤리의 누락에 대한 고발서이자, 창조에 수반되어야 할 돌봄과 책임의 본질을 묻는 서사다. 빅토르의 비극은 괴물 때문이 아니라, 그를 외면했던 자신의 선택 때문이다. 그는 괴물을 만든 순간보다, 그를 바라보지 않은 순간에 진정한 죄를 지었다.

생명을 다루는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여전히 이 질문 앞에 서 있다.
“창조는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생명공학, 인공지능, 인간 복제, 그 모든 ‘창조’의 기술은 가능성 앞에서 윤리를 후순위로 밀어낸다. '프랑켄슈타인'은 그 가능성의 끝에서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의 구조를 가장 인간적인 감정으로 먼저 그려낸 작품이다. 기술의 진보가 우리를 신에 가깝게 만들 수는 있을지 몰라도, 책임과 이해 없이 이룬 창조는 결국 우리 자신의 ‘괴물’을 낳는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경이로운 예언서다.

또한 이 작품은 “외형은 본질을 결정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사회가 어떻게 타자를 규정하고 배제하는지를 묻는다. 괴물은 자신이 추구한 인간성보다 먼저, 추한 외모로 단죄당한다. 그는 언어를 배우고, 책을 읽고, 가정의 따뜻함을 흠모하지만, 누구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프랑켄슈타인'은 존재의 정의란 결국 타자의 시선 속에서 결정된다는, 가장 현대적인 비극의 본질을 건드린다.

마지막으로, 괴물이 자신을 창조한 신을 용서하지 않고, 끝내 자멸을 선택하는 장면은 비극 이상의 울림을 남긴다. 그것은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존재의 이유 자체가 사라진 자의 고요한 퇴장이다. 괴물은 죽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받아들여줄 시선이 더는 없다는 것을 깨달은 존재의 종말을 선택한다. 그 소멸은 인간을 닮으려 했던 존재가 인간보다 더 깊은 절망에 닿았다는 의미이며, 거기서 우리는 진정한 인간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프랑켄슈타인'은 절망의 서사이지만, 그 속에서 가장 인간적인 울음을 기록한다. 그 울음은 언어보다 느렸고, 문장보다 오래 남는다. 등을 돌린 창조자, 그 등 뒤에서 울던 피조물, 그리고 그들을 바라본 우리. 우리는 결국 그 모두의 침묵 속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와 닮아 있는지를 조용히 묻게 된다.


불타는 집에서 춤추는 괴물과.

Call Out My Name - The Weeknd

Sorry - Nothing But Thieves

Wasting My Young Years - London Grammar

Emily - James Arth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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