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로소이다_나쓰메 소세키

고양이는 말이 없고, 인간은 말뿐이다.

by LWB


고양이는 말이 없다.


웅얼거리지도, 설득하지도, 대의명분을 외치지도 않는다. 다만 듣고, 보고, 때때로 비웃을 뿐이다.

그 침묵 속에 담긴 것은, 말로는 다다를 수 없는 인간 세계의 우스꽝스러운 진실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이름조차 갖지 못한 한 마리 고양이의 시선을 통해, 메이지 시대 일본 지식인들의 위선, 문명의 허세, 그리고 삶의 본질적 허무를 끈질기게 관찰한 작품이다.

이 고양이는 철학자이자 비평가이며,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또 다른 자아다. 그는 무심한 듯 날카로운 눈으로 인간들을 읽어내고, 말 많고 생각 짧은 인간들의 세계를 가만히 조소한다.




나쓰메 소세키는 평범한 영문학 교수에서 일본 문학사의 흐름을 뒤흔든 작가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 시작은 ‘고양이’였다. 그것도 이름 없는 고양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그가 문필가로서 발표한 첫 소설이자, 동시에 그 시대 지식인과 사회 전체를 우아하게 풍자한 선언문이었다.

이야기는 한 마리 고양이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라는 문장으로 세상에 자신을 내보이며 시작된다. 이 고양이는 인간 세상에 길들여지지도, 소외되지도 않은 절묘한 거리에서 주인 구샤미와 그의 친구들, 주변 인물들의 삶을 관찰하고 조롱한다.

주인인 구샤미는 말만 많고 실행은 없는 소심한 영어 교사, 그의 친구 메이테이는 언변만 화려한 유희주의자, 간게쓰는 감정 없는 과학자, 그리고 그들의 주변을 맴도는 인물들은 각기 다른 사회 계층의 가식과 욕망을 대변한다.

줄거리는 특별한 사건이나 전개 없이 흘러간다. 하루하루의 일상, 손님과의 대화, 결혼 이야기, 이웃과의 마찰... 하지만 그 속에는 지식인의 무능, 문명의 겉멋, 인간 존재의 본질적 허무가 고양이의 시선 아래 무방비로 펼쳐진다.

결국 고양이는 인간의 세계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진다. 그러나 그가 남긴 침묵의 관찰과 비웃음은, 인간이 아무 말 없이 지나칠 수 없는 언어가 된다.




고양이


고양이는 말하지 않는다. 이름조차 없는 존재로서, 인간 사회의 외부에 있으면서도 누구보다 날카롭게 그것을 해석하는 시선의 소유자이다. 그는 침묵으로 인간의 언어를 해체하고, 말 없는 존재로서 인간보다 더 본질적인 진실을 전달한다.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언어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의 상징이다. 말이 많을수록 진실은 왜곡되고, 침묵 속에서 오히려 진실이 드러난다는 역설이 이 고양이를 통해 구현된다. 작가의 분신이자, 시대의 비평가로 기능하는 존재이다.


구샤미 선생


구샤미는 말은 많지만 실천이 없는 인물이다. 겉보기에는 지식인이고 교양인이나, 그 삶은 비겁하고 수동적이다. 그는 당대 지식인의 자기기만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동시에 그는 작가 소세키가 내면에 품고 있던 두려움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유학에서 돌아온 후 문명과 전통 사이에서 방황했던 지식인으로서, 변화 앞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관망만 하는 무력한 존재이다.


메이테이


메이테이는 언변에 능한 인물이지만, 그 말은 실체가 없다. 그는 말로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고, 농담과 유희로 상황을 회피한다. 그 말의 과잉은 허위와 과장이며, 당대 교양 사회의 껍데기만을 상징한다.

그는 언어가 가진 폭력성과 공허함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말은 진실을 전달하기보다 진실을 감추는 수단이 될 수 있으며, 그런 말은 오히려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사회도 혼란스럽게 할 수도 있다.


간게쓰


간게쓰는 이성적이고 계산적인 인물이다. 그는 과학적 사고에 기반한 결정만을 중시하며, 감정과 인간성은 그의 가치 체계에서 하위에 위치한다. 그는 근대 문명의 이면, 즉 ‘비인간화된 이성’을 상징한다.

그의 존재는 문명의 진보가 반드시 인간의 행복이나 깊이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모순을 드러낸다. 간게쓰는 생각하는 인간이지만,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다. 따라서 그는 진보의 결과가 아니라, 진보의 공허함을 보여주는 표본이다.


가네다


가네다는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인물이다. 그는 무식하지만 돈이 많고, 돈이 있는 만큼 권력을 행사한다. 그의 행동은 사랑마저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자본의 논리를 상징한다.

그는 단순한 졸부가 아니다. 그는 오늘날까지 반복되는 '성공 신화'의 실체이다. 교육이나 품격 없이도 돈만 있으면 사회적 존경을 받는 이 구조가 얼마나 허망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왜 고양이를 화자로 선택했을까.


고양이는 인간 사회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객관적이라는 일반 해석과 달리, 고양이는 철저히 인간적이다. 그는 결국 인간처럼 판단하고, 인간처럼 비웃고, 인간보다 더 교활하게 인간을 이해한다. 이로써 작가는 인간 바깥의 시선을 가장 인간적으로 구축한 셈이며, 이는 인간 비평이 결국 자기비판이라는 아이러니를 암시한다.


고양이의 침묵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


고양이의 침묵은 단순히 말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그는 아예 말을 거부하는 존재다. 말이 넘쳐나는 인간 사회에서, 그는 말 대신 침묵으로 진실을 바라본다. 고양이는 말이 없기에 거짓말이나 허세에 휘말리지 않고, 그래서 오히려 더 진실에 가까워진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고양이의 침묵이다.


고양이의 죽음은.


고양이는 계속 인간을 관찰하고 분석한다. 인간은 시끄럽고, 허세가 많고, 자주 거짓말을 하고, 실속이 없다. 고양이는 그런 인간을 비웃기도 하고, 지켜보기도 하며, 거의 철학자처럼 살아간다. 하지만 그 관찰에는 한계가 있다. 그는 인간 사회에 ‘속하지 않고’ 관찰만 한다. 자신은 행동하지 않고 말도 하지 않는다. 결국, 고양이는 아무 변화도 만들지 못한 채 죽는다. 인간들은 여전히 말이 많고, 허세도 그대로다. 고양이는 비웃었고,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또한 관찰만 하고, 말도 하지 않으며, 삶과 거리를 둔 존재는 결국 소외되고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일 수 있다. 아무리 통찰력이 있어도, 삶에 개입하지 않으면 존재조차 지워질 수 있다. 동시에, 고양이의 죽음은 시대의 상징이기도 하다. 메이지 시대는 근대화를 겪는 혼란기였다. 그 시기를 관찰하고 비판했던 ‘지식인’들이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면 결국 침묵 속에서 사라진다는 비극이기도 하다.

또 다른 관점에서는, 말이 넘쳐나는 시대에 말 없는 존재는 자연스럽게 퇴장당한다는 의미도 된다. 고양이의 침묵은 이제 누구도 듣지 않고, 세상은 시끄러운 말들로만 채워진다.


메이지 시대의 사회 변화는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는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속 인물들은 메이지 시대의 근대화를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인물이 아니라, 서구 문명을 모방하고 흉내 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영어를 말하고 과학을 논하지만, 그 언행은 공허하고 내용이 없다. 이는 메이지 일본이 서구 문명을 빠르게 받아들이면서도, 그 정체성과 내면적 기반을 갖추지 못했던 시대적 혼란을 풍자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작품에서 문명과 전통의 갈등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보통 우리는 전통과 문명이 싸운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조선의 유학과 서구 과학, 옛 가치관과 근대적 사고같은 갈등이 있다면, 누군가 이기고, 누군가 지는 구조가 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그 둘이 ‘싸우지도’ 않고, ‘이기지도’ 않는다. 구샤미는 전통적 가치(가부장적, 무위한 이상)를 품고 있으면서도, 문명(영어, 서양 교육)을 동시에 흉내 낸다. 간게쓰는 근대 과학을 따르지만, 삶에 실질적 감동이나 진심이 없다. 메이테이는 유희와 언변으로 시대를 소비하지만,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결국 둘 다 공허하게 느껴진다. 전통을 지키는 자도, 문명을 받아들이는 자도 다 어딘가 허술하다. 전통도 문명도 ‘살릴 수 없는 인간’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작품은 선택의 문제를 묻지 않는다. “전통을 지킬까, 문명을 따를까?”가 아니라, “그 어떤 것도 인간의 본질적 공허를 채우지 못한다.”는 점을 풍자한다.


작품은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묘사하는가.


인간을 위선적이고 무기력한 존재로 묘사한다. 등장인물들은 말은 많지만 실천은 없고, 지식은 있지만 진심이 없다. 그러나 작가는 그런 인간의 추한 모습이야말로, 오히려 가장 인간적인 진정성일 수 있다는 시선을 제시한다. 고양이는 인간을 조롱하지만 경멸하지는 않는다. 그는 인간의 허세와 실패, 나약함 속에서 오히려 솔직한 감정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끝까지 지켜본다. 이 작품은 인간의 위선을 폭로하면서도, 그 속에 담긴 연약함을 껴안는 냉소와 연민이 공존하는 시선을 담고 있다.




지금, 고양이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메이지 시대 일본이라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출발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인간에 대한 통찰은 결코 시대를 가두지 않는다.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이름 없는 고양이를 빌려, 말만 무성하고 진심은 실종된 사회, 지식은 있으나 실천은 없는 인간들, 그리고 속물적 문명과 낡은 전통 사이에서 방황하는 자아들을 풍자적으로 해부했다.

만약 이 고양이가 2025년의 한국에 다시 태어난다면, 그는 무엇을 보고, 누구를 관찰하고 있을까. 그는 스마트폰 속에서 스스로를 과시하는 교양인들, 효율과 경쟁에 익숙해진 관리자들, 침묵을 강요당하거나 스스로 침묵을 선택한 다수의 사람들을 조용히 지켜볼 것이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진보한 듯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허세와 허무, 무력과 고립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그는 단번에 알아챌 것이다.

그리고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가만히 바라보며, 속으로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역시 인간은 변하지 않았다. 그저 말만 많아졌을 뿐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거울이다. 그 거울 앞에서 오늘의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은 어떤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당신의 말은 진실에 닿아 있는가?


우리 집 고양이들은 이름은 있는데.


Stolen Dance - Milky Ch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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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Ending - Mi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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