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들여다보는 건 다음이 없어요
한 직장에서 십 년을 근무하다 잠시 쉬게 되었다.
몸이 망가지고 나서 3년 넘게 꼬박 병원을 다니다
차도가 없어 결국 일을 쉬기로 했다.
병원에서는 그저 운동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야 한다는데,
그 말을 하는 원장님 본인도 웃음을 참지 못하셨다.
직장인에게 스트레스를 떼어 놓을 수 있을까?
결국 일 년 반을 쉬었다.
처음 며칠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냈다. 두 끼 식사를 준비하고 산책을 다니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주에 한 번씩 병원을 다니는 것만 빼면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틈에 나란 사람을 들여다볼 여유가 생겼다.
온종일 무수한 생각들에 휩싸여 지낸 나날들에 나를 돌볼 시간은 없었다.
오랜 일상에서 잠깐 벗어난 것뿐인데, 많은 하루 속에서 '나'를 발견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했는지, 또 어떤 상황을 불편해했는지...
"여보 나 그림을 배우고 싶어"
유튜브를 보고 있던 남편에게 뜬금없이 고백했다.
다행히도 나를 무조건 응원하는 남편은 기쁜 마음으로 나를 응원해 줬다.
어린 시절 나는 그림을 너무 못 그려 그림일기 숙제를 엄마가 대신해 주셨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으셨는지 어느 날 엄마는 내손을 이끌고 미술학원을 등록했다.
Destiny!
초등학교 1학년 잠깐 다녔던 미술학원은 사실 나에게 큰 울림이 있었다.
열심히 그림에 몰두하던 사람들, 진한 물감 냄새, 살바도르 달리의 시계를 오마주한 그림까지!
(당시에는 살바도르 달리를 알지 못했다.)
선 긋는 연습을 시작한 첫날부터 과일바구니를 그린 마지막 날까지 미술학원에서 느꼈던 감정들이 고스란히 지금까지 남아있을 줄이야.
그동안 잊고 지낸 기억들이 새로 등록한 학원에 들어서자 잔잔한 파도를 일으켰다.
사실 학원을 다니려니 조금 망설였다. 무모하게 시작하는 건 아닐지, 잘하는 사람들 틈에서 주눅 들어 스트레스를 받는 건 아닐지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일단 다니고 후회하잔 마음으로 용기를 냈다.
먼저 한 달 다녀보고 아니면 바로 그만두면 되니까!
수업 시작 전 원장님께서 그림을 시작한 이유와 배우고 싶은 종류를 물었다.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아무에게도 말 못 한 내 바람을 이야기했다.
'저 동화책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