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에 가장 잊지 못할 순간 중 하나는
어이없게도 1999.12.31. 밤 11시 59분이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인 나는 TV에서 지구종말에 대한 뉴스를 보고 충격에 휩싸였다.
지금 생각하면 코웃음 칠 일이지만, 당시 상황은 사뭇 심각한 분위기였다
(초등학생의 눈으로 바라봤을 때는)
이진법을 사용하는 컴퓨터가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바뀔 때 2를 인식하지 못해 발생되는 전산장애로 비행기는 추락하고 핵미사일이 저절로 발사돼
제3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거라는 밀레니엄 버그 루머가 빠르게 퍼졌다.
이와 맞물려 프랑스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의
밀레니엄 세계종말 예언이 유행하며
어수선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매일 아홉 시 전 잠들던 나는 해가 바뀌면 온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한동안 일찍 잠들지 못했다.
오지 않길 바랐던 12월 31일 금요일 밤!
부모님 몰래 잠든 척 실눈을 뜨고 TV에서 외치는
카운트다운 운소리에 숨을 죽이며 지켜봤다.
5, 4, 3, 2, 1!
두 눈을 질끈 감고 이불속에서 기도했다.
'하느님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해 주세요! 저는 아직 살고 싶다고요!!'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해가 바뀌었음을 알리는 보신각 종소리에
조마조마했던 마음을 진정시켰다.
"엄마 아무 일도 없어? 우리 전쟁 안 나는 거야?"
잠든 척했던 것도 잊은 채 이불을 박차고 엄마에게 물었다.
다른 건 기억나지 않지만 살짝 미소 띤 얼굴로 일찍 자야 한다던 것만 기억이 난다.
무서워서 잠 못 이룬 걸 엄마도 아셨겠지.
다음날 터무니없는 말에 휘둘린 사람들이 바보라며 믿은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는 것만 빼면 여느 날과 다름없이 평범하게 지나갔다.
어제까진 분명 모두 죽을 거라며 비관하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그럴 줄 알았다며 믿은 사람들을 탓하는 자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너희들... 분명 어제까지 믿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