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게 두는 마음
오늘 점심시간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직장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와는 띠동갑이 넘는 사람이다. 남자지만 성격은 온순하고, 말투에는 늘 예의가 묻어 있다. 말 한마디마다 신중함이 배어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학창 시절 친구들이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서울에 올라온 뒤로는 연락도 뜸해졌고, 각자의 삶이 바빠서 거의 만나지 못한 친구들이라 했다.
그런 어린 시절 친구 서너 명이 단톡방을 만들면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듯 대화가 이어지고 있다고.
친구들은 여전히 예전 그대로인 것 같다고 했다.
말투도, 농담도,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지금은 자신과는 결이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느껴져서
괜히 마음이 먼저 망설여진다는 말도 덧붙였다.
오랜만에 만나면 반가울 것 같기보다 어색할 것 같고, 굳이 애써 시간을 내 다시 인연을 이어가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듣다 보니, 나도 예전의 경험이 떠올랐다.
그 말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고민이라기보다, 오래전에 내가 했던 생각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그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나를 나의 한 시절로 데려갔다.
나의 20대에도 비슷한 시간이 있었다.
그때는 시간이 귀한 줄 몰랐다. 같은 사람들을 자주 만났고, 늘 비슷한 이야기를 나눴다.
특별한 이야기가 없어도 괜찮았다. 함께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루가 채워지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20대 중후반, 나는 여의도로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이직을 하며 하루가 늘 빠듯해졌다. 야근이 잦았고, 주말 출근도 낯설지 않았다.
하루의 중심은 자연스럽게 회사 쪽으로 기울었다.
친구들의 생일이나 모임에도 점점 얼굴을 내밀기가 어려워졌다.
만남이 줄어들자, 관계도 조금씩 달라졌다.
가끔 만날 때면 예전처럼 편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혹시 나만 이렇게 느끼는 건 아닐지, 괜히 혼자 마음을 재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의 일상에서 서로가 차지하던 자리가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누가 잘못한 것도 아니었다.
싸운 적도 없었다. 다만 매일 연락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이 쌓였고, 그렇게 관계는 조용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때는 서운함이 없지 않았지만, 그 감정조차 시간이 지나자 말없이 사라졌다.
동료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어떤 관계는 그 시절에만 가능하다. 그 시절이 지나면, 역할을 다한 듯 자연스럽게 물러난다.
붙잡고 싶다고 해서 붙잡히는 것도 아니고, 멀어지고 싶다고 해서 단번에 정리되는 것도 아니다.
인연은 늘 각자의 속도로 흘러간다.
그 시절의 나는 인연이라는 주제로 자주 고민했다.
관계를 놓치는 내가 변한 건 아닐지, 바쁘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사람을 내려놓는 어른이 되고 있는 건 아닐지. 책임이 늘어날수록, 관계를 지키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됐다.
붙잡지 않았다고 해서 소홀했던 것도 아니고, 멀어졌다고 해서 실패한 관계도 아니라는 것을.
어떤 인연은 끝까지 남지 않아도 충분히 의미가 있고, 그 시절만큼은 분명히 서로의 삶에 머물렀다는 사실로 남는다는 것을.
결국 어떤 인간관계는 흘러가게 두는 것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억지로 이어가지 않아도, 애써 정리하지 않아도, 인연은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그 시절을 함께 건너왔다는 기억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