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악산에서 야수를 만났다고…… 조난당했으니까 신고해 달라며. 내가 분명 장난치는 거면 가만 안 둔다고 했잖아요."
당혹감에 막혀버린 해인의 목구멍은 두서없는 말만을 간신히 쥐어짜 냈다. 상대는 헛웃음인지 한숨인지 알 수 없는 서늘한 숨소리를 내뱉었다.
"당신이 누군데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제가 그런 부탁을 어떻게 하는데요?"
해인과 통화 중인 이지승의 목소리는 지난밤 살려달라 애원하던 이지승과 같은 목소리라는 건 분명했다.
"어떻게 한 거예요?"
해인의 질문에 전화기 너머 지승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어떻게 아빠 번호로 전화를 걸었냐고요."
"한 번은 실수라 생각하고 넘어가 줄 용의도 있으니까 일 커지기 전에 수습하세요. 이만 끊습니다."
해인이 더 말할 새도 없이 지승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사실 해인도 지승이 강우의 번호로 전화를 건 이유를 답해 주지 않는다면 딱히 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전화를 걸었던 당사자가 그런 전화를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그래도 강우의 시신이 있다는 절벽까지는 수색해 봐야 하지 않겠냐는 건의를 해 볼 엄두 또한 나지 않았다. 더는 수색을 이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할 근거가 없었다. 그럴 의욕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도 했고. 이 막막하고 분하고 곤란한 상황에서는 서린을 통해 상황을 파악한 순규가 알아서 경찰과 구조대를 철수시키고 있었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철수하는 일행의 뒤를 따르려 발길을 돌리면서도 해인의 시선은 산 정상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저기 어딘가에 낡은 암자가 있고, 아직도 사냥을 즐기는 야수와 위기에 빠진 사냥감이 있고, 검고 이상한 모양의 나무숲이 있으며, 깊은 절벽이 있고, 그 아래에 그토록 찾던 강우가 있지 않을까. 믿을 수 없으면서 믿고 싶었던 이야기.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지승으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한 지승은 그 사실을 부인하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했던 일들을 이해하는 건 일단 접어두고 이제 산을 떠날 시간이었다.
민하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는 지승의 손길은 퍽이나 퉁명스러웠다. 외출을 하고 돌아오니 집 앞에 형사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박민하 형사가. 살갑게 군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의 오피스텔 현관문 앞에서 벨을 누르기를 망설이는 민하를 보는 순간 지승은 드디어 일이 터졌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 일이 정확이 무슨 일인지도 모르지만 그냥 드디어 일이 터졌구나 싶었다.
그 사람이 입이라도 연 걸까? 아니면 다른 돌발행동이라도 한 걸까? 머릿속을 휘저은 온갖 걱정이 무색하게 민하가 찾아온 이유는 지난 15년 동안 상상해 본 수많은 돌발상황 중 단 한 번도 떠올려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지승이 용악산에서 조난을 당했다니. 다른 사람도 아닌 지승이. 웃음이 없는 야수조차도 들으면 웃을 일이었다.
"이름 듣고는 설마 했는데 진짜 너였구나. 그럴 리 없다 생각하면서도 용악산이라는 말에 한번 확인해 봐야겠다 싶었다."
껄끄러운 얼굴을 한 민하가 이미 통화가 종료된 핸드폰을 확인하는 척 이리저리 버튼을 누르며 어색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누굽니까? 용악산 얘기를 하는 걸 보니까 저에 대해 아는 사람 같은데, 맞아요?"
피차 서로 얼굴보기 껄끄러운 사람들끼리 용건만 빨리 끝내고 헤어지면 좋으련만 민하는 어째서인지 선뜻 말해주기를 꺼리는 눈치였다.
"제가 일하는 병원까지 알아낸 거잖아요. 확실히 말씀을 해주셔야 제가 대응을 할지 그냥 넘어갈지 결정하죠."
지승이 한번 더 재촉하자 별 수 없다는 듯 민하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 행동으로 보아 지승이 적당히 넘어가주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유해인이라고…… 이슈저널 알지? TCN에서 하는 거. 그 방송 나오는 기자."
해인의 이름이 나오자 지승의 눈이 갸름해지는 것을 보고 민하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걔가 일부러 그런 거 같지는 않고 어제 한 방송 때문에 충격을 좀 받았던 거 같아. 너도 알 거 아냐. 어제 현명우 얘기 이슈저널 나온 거."
"그게 저한테 이런 장난을 칠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세요?"
"장난처럼 보이진 않았어. 그랬다면 내가 여기 오지도 않았지. 애가 해지된 핸드폰으로 전화를 받았다는 등 헛소리까지 하고 진짜 이상했다니까."
민하가 원하는 건 없던 일인 셈 치는 거겠지만 이런 일이 다시 생기지 않을 거라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이 불쾌한 장난을 걸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유해인이었다.
"그 사람 유강우 형사님 딸이잖아요. 그런데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어떻게 장담하시는 거죠? 이게 시작이고 앞으로 더 심한 짓을 할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요?"
곤란한 얼굴을 한 민하가 자신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쓸어 올렸다. 정리를 하고 싶은 건지 아예 헝클어버리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손짓이었다. 지승은 민하가 그게 뭐 어떻다는 건데, 네가 유해인을 신고라도 할 작정이야? 묻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하가 그런 말을 하거나 티를 낸 것도 아닌데 오랜 시간 쌓아둔 지승의 자격지심은 민하라면 분명 그럴 거라고, 아니 누구든 그럴 거라고 스스로 결론 내리고 있었다.
"해인이한테 정식으로 사과하라고 할까? 한 번 얘기 나눠 볼래?"
이것도 지승이 할 대답을 다 예상하고 하는 말이 아닐까? 지승이 해인에게 사과를 요구하지 않을 거라는 걸. 또다시 해인이 이런 일을 벌인다 해도 지승은 참을 거라는 걸.
"됐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해 주세요. 다음엔 정말 안 넘어갈 거니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자조적인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지승은 현관문을 거칠게 닫아버렸다. 문밖에 선 민하의 기분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황당하고 난처해하면서도 걱정이 서린 눈길. 오늘만 이런 눈을 도대체 몇 번째 보는 건지. 당연히 이런 눈빛으로 자신을 볼 거라는 걸 알면서도 해인은 재희를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집으로 향하면 강우의 핸드폰으로 계속 전화를 걸 것만 같은 불안함 때문이었다. 사실 산에서 내려와 재희의 집에 오기 전에도 이미 수 십 통을 걸어봤다. 단 한 통도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오해하지 말고 들어. 내가 네 친구니까 이런 소리도 하는 거야. 내가 핸드폰 전문가는 아니지만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장담할 수 있거든.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뭐 경찰을 좋아하거나 그다지 믿는 사람은 아닌데 그래도 이번에는 경찰 말이 맞는 거 같다고. 현명우 때문에 네가 너무 스트레스가 심해서 잠깐 문제가 생긴 거라는 경찰 말이 맞아."
6평의 좁은 원룸. 2인용 작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해인은 지난밤부터 재희를 찾아오기 전까지의 일을 숨기는 것 없이 털어놓았다. 각자 앞에 짜장면 한 그릇씩과 식탁 가운데에 탕수육을 세팅해 둔 채. 바짝 마른 몸으로 짜장면과 탕수육을 거침없이 흡입하며 해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재희는 이야기가 끝나자 거침없는 잔소리를 쏘아댔다.
"너 정신과 상담 안 받은 지 오래됐지? 다시 다녀. 겉으로 보기엔 괜찮은 거 같아도 사실 속은 말이 아닌 경우가 많거든. 그런데 그걸 본인은 몰라. 전문가가 봐야 돼. 바쁘다고 그냥 넘어가지 말고 가서 꼭 진단받아."
속사포로 잔소리를 하면서도 재희는 짜장면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워냈다. 하루 종일 굶은 자신은 아직 그릇의 반도 비우지 못했는데 얘는 며칠은 굶은 게 아닐까 하는 싱거운 생각을 하며 해인은 재희의 말을 대충 흘려들었다. 모두가 해인을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해인은 어젯밤의 일이 현실이라는 확신을 버릴 수 없었다.
"세진병원에서 근무하는 이지승이란 사람이 진짜 존재했잖아. 내가 정말 그 사람의 전화를 받은 게 아니라면 그 남자가 세진병원 의사라는 걸 어떻게 알았겠어."
"네가 언젠가 우연히 들었던 게 무의식적으로 남아 있었겠지. 너 기자잖아. 여기저기서 정보가 오죽 많이 들어왔겠어."
같은 물음에 순규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현재로서는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이것뿐일 테니까. 하지만 이런 가정들은 해인의 혼란을 잠재울 수 없었다. 아무리 깊은 무의식 속에 있던 사람이라 해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떠오르지 않을 리는 없었다. 어디에도 해인이 지승과 통화를 했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말대로 하룻밤의 비싼 해프닝으로 치고 넘어가는 게 정말 최선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일까.
"그렇다고 없던 일로 칠 수는 없어. 내가 겪은 일이 현실이라는 증거는 없지만 아니라는 증거도 없잖아."
"정 그러면 한 번 더 해보든가."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는지 재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툭 말을 던졌다.
"뭘?"
"그 남자랑 통화 말이야. 어젯밤에 전화가 걸려왔다고 했지? 그런데 이지승이란 사람은 그 시간에 용악산에 없던 게 확인 됐다며. 네 말대로 그 남자가 장난을 친 거라면 그 시간에 어떤 기계 조작 같은 걸 했을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집에 가서 그 유물 핸드폰 충전해 두고 기다려 보라고. 또 알아, 밤에 또 전화를 걸어올지?"
과연 도움이 되라고 하는 말인가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최선의 방법인 것 같기도 했다. 이제 해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남았겠는가? 그 망할 자식이 이번 일로 큰 재미를 느끼고 또 한 번 해인에게 같은 장난을 쳐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