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7일(4)

by 홍진희

밤 11시 45분. 벌써 한 시간 가까이 해인은 구형 핸드폰에 충전기를 꽂아둔 채 화면 속 시계의 숫자가 변하는 걸 노려보고 있었다. 어제도 이맘때쯤 연락이 왔던 것 같다는 생각에 무심코 통화목록을 열어보던 해인은 멈칫하며 짜증 섞인 탄성을 내뱉었다. 지승에게 전화가 왔었던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는 걸 경찰 앞에서 확인했으면서 또 통화목록을 열어본 스스로가 바보 같다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정말로 뇌가 망가져 버린 거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조금 들던 와중 순간 해인의 시선이 마지막 통화 기록에서 멈추었다. 정확히는 강우가 전화를 걸어왔지만 받지 못했던 그 기록의 11시 49분이라 적힌 숫자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같은 시간에 지승이 전화를 걸지 않았나? 설마 하면서도 해인은 핸드폰 화면 속 시간이 11시 49분으로 바뀌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핸드폰 속 숫자가 48에서 49로 바뀌었다. 다시 지승의 전화가 걸려오기를 기다리는 걸까, 차라리 오지 않기를 바라는 걸까? 해인 스스로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심경과는 상관없이 기대하면서도 원하지 않았던 핸드폰 진동은 결국 울리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발신자는 '♥아빠♥'였다.


"경찰에 연락한 거 맞죠? 절 못 찾은 겁니까? 암자 근처 찾아봤어요? 무슨 말이라도 좀 해주세요. 설마 경찰에 연락도 안 한 건 아니죠?"

전화를 받자마자 빠르게 말을 쏟아내더니 끝내 따지듯 질문을 해대는 지승의 태도에 해인은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낮에 전화를 받았을 때처럼 당황해서 제대로 대응도 못한 채 놀아나고 싶지는 않았다.

"어제 나한테 전화한 거 맞죠? 어젯밤 11시 49분, 그러니까 지금하고 똑같은 시간에 나한테 전화 걸었었잖아요."

한 글자씩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며 해인은 책상 위 미리 준비해 둔 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만약 구식 핸드폰의 알 수 없는 오류 때문에 통화 기록이 남지 않는 거라면 통화 내용을 따로 녹음하면 될 일이었다.

"네, 맞아요. 어제 통화했잖아요. 그런데 경찰에 신고한 건 맞는 거죠? 제 신원도 말했나요?"

어제와 마찬가지로 지승은 절박한 연기를 꽤나 진짜처럼 잘 해내고 있었다.

"이지승 씨. 어젯밤 저한테 용악산에서 야수가 사람을 해치는 걸 봤고, 이지승 씨도 야수에게 쫓기다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고 분명 말했었죠?"

"네, 제가 몇 번이나 부탁드렸잖아요. 그래서 오늘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왜 아무 소식이 없던 거예요? 수색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반복되는 해인의 질문에 녹음 중이라는 걸 눈치챌 수도 있겠다 걱정했는데 의외로 지승은 녹취가 순조롭도록 도움을 주고 있었다. 들어야 할 것은 전부 들었다. 놈을 한방 먹이는 일만 남았다.

"거짓말이면 어떻게든 찾아내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내 말이 우스웠나 봐? 형사를 앞에 두고 나한테 도움을 요청한 적 없다는 통화까지 하더니 또 전화를 걸어? 당신 대범한 거야, 아니면 바보인 거야?"

"무슨 소리예요? 그러니까 지금 장난이라고 생각해서 경찰에 안 알렸다는 소립니까?"

"무슨 소리인지는 이지승 씨가 더 잘 알 거 아니에요. 집까지 찾아온 형사를 보고 무슨 생각했어요? 이 말도 안 되는 장난이 진짜로 먹혔구나. 재미있다. 뭐 그런 생각했어요? 정말 재미있었어요?"

"전 진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데……."

"낮에 박민하 형사 전화로 당신이 직접 나한테 말했잖아. 조난당한 적 없다고. 그런 짓을 하고도 몇 시간 만에 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뻔뻔하게 전화를 걸고. 내가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미친 새끼, 지금 이거 전부 녹음하고 있어. 당신이 자백하는 거 증거로 남겼다고. 그러니까 의사 생활 접을 준비나 해!"

차분하게 대응할 자제심을 잃은 해인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당황을 한 건지 지승은 갑자기 말이 없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그 침묵은 길었다. 문득 해인은 예상보다 통화가 길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날 전화를 했었다는 증거를 확보하는 녹취만 남기면 될 일이니 더는 헛소리를 들어줄 필요가 없었다. 아니 더는 들어줄 수가 없었다.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 벌어졌으니 어쩌면 해인은 변명을 듣고 싶었던 건지도 몰랐다. 사실은 장난이 아니었다고,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가끔은 벌어질 수도 있다는 그런 변명말이다. 자신이 뭘 기대했는지 깨닫자 갑자기 지승과 아직도 통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굴욕적이었다. 그래서 그만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려는데 타이밍 좋게도 지승이 침묵을 깼다.

"집에 형사가 찾아오긴 했었어요."

정말 포기를 모르는 한심한 작자다 싶었다.

"이제와 그런 소리 해봤자 무슨 소용이에요. 다음에 경찰이 찾을 때는 당신을 체포하려는 거니까 기다리고나 있어요."

"유해인 기자님."

역시 지승은 처음부터 해인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알려준 적 없는 이름을 저렇게 정확하게 말하는 걸 보니.

"유해인 기자님 맞죠?"

"처음부터 다 알고 전화한 거였잖아요. 연기 그만하시죠."

"박민하 형사가 집에 찾아왔었고 제가 용악산에서 조난당했다는 신고를 받았다고 했어요. 전 용악산을 찾은 적도 없고 조난을 당한 적도 없으니까 당연히 황당하고 화도 났죠. 그래서 신고자와 통화하고 싶다고 했던 겁니다."

녹음을 하고 있다는 말에 겁을 먹은 건지 갑자기 지승이 오늘 있던 일을 술술 불기 시작했다. 해인의 예상보다 일이 쉽게 끝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분명 제가 겪었던 일은 맞는데…… 오늘 있던 일은 아니었어요."

자백을 할 줄 알았더니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쓸 작정인 것 같았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이 너무 터무니없어 오히려 해인의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그날 일이 생겨서 갑자기 휴가를 냈기 때문에 날짜도 정확히 기억해요. 6월 27일."

대체 어떤 미친 소리를 하려는 걸까, 해인은 잠자코 지승의 다음 말을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런데 유기자님, 오늘은 7월 6일이잖아요."


-계속-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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