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6일

by 홍진희

이 사람은 왜 묶여있지?

까만 밤하늘이 서서히 푸른빛으로 물들자 랜턴의 가는 불빛으로는 파악하지 못한, 백골사체를 감고 있는 등산용 로프가 보였다. 로프는 힘없이 바닥에 늘어져있었지만 시신이 백골화되기 전에는 육체를 단단히 결박했던 용도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로프는 사체뿐 아니라 시신이 기대어 있는 뒤편의 바위까지 감겨있었다. 아마도 바위에 시신을 고정하려는 용도인 것 같았다.


백골사체가 쥐고 있던 핸드폰의 전원이 들어온 건 기적이란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경찰과 119에 아무리 전화를 걸어봐도 신호음조차 들리지 않던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딸'이 전화를 받은 것 역시 기적 또 한 번의 기적이었고.

전화를 받은 여자는 지나치게 방어적이고 경계심이 심했다. 그 이유야 굳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군데군데 이끼가 피어나며 갈라진 균열과 둥글게 마모된 뼈의 형태로 보아 시신은 이곳에 최소 10년 이상은 머물렀을 거고, 그 긴 시간을 소식이 없던 실종된 가족의 번호로 낯선 사람이 전화를 걸어왔으니 의심을 품지 않는 게 오히려 말이 안 되었다. 게다가 통화 내용으로 짐작해 보던데 여자는 오랫동안 실종자와 관련된 장난전화나 잘못된 정보로 시달렸던 거 같았다. 그거 알았기에 지승은 참을성 있게 시신의 인상착의를 설명했고 결국 여자는 경찰에 신고해 주기로 약속했다. 비록 도중에 전화가 끊기긴 했지만 자신의 이름과 세진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렸으니 경찰에 신고만 해도 구조에 나설 것이다. 하루, 길어봤자 이틀 정도만 견디면 이곳을 벗어나 야수가 아직 용악산에 있다는 사실을 알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보였다. 이미 망가져버린 것들을 원래 상태로 돌리기에는 너무 늦어버렸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기워내고 수리하다 보면 완전히는 아니어도 조금쯤은 회복해 나갈 수 있을 거다. 곧 그렇게 될 터였다.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따님이 곧 찾으러 올 거예요."

지옥 같은 곳에 떨어져서도 인간의 마음이란 간사했다. 처음 시신을 봤을 때의 절망감은 어느새 잊은 채 답을 할 수도 없는 시신을 향해 위로의 말을 건넬 정도로 안도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난밤 전화를 받았던 여자는 오랫동안 사라진 부친을 찾아 헤맸겠지. 무심코 지승은 부친의 행방을 애타게 찾던 또 다른 여자를 떠올렸다가 의식적으로 머릿속을 비워냈다. 지난날의 기억에 함몰되는 건 좋지 않았다. 특히 지금처럼 최악의 상황에서는.

"그런데 어쩌다가 여기 오게 됐어요?"

한 번 말을 걸기 시작하니 답이 없는 백골사체에게 왠지 친근함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이런 꼴로 있는 건지 의문도 생겨났다. 바위와 사체를 함께 동여 메고 있는 로프로 보아 단순한 실족사는 아니었다. 그럼 누군가 이 사람을 바위에 묶어둔 채 이 깊은 절벽을 떠났다는 건데 대체 어떤 방법으로 여길 벗어난 걸까? 이 절벽에서 살인을 할 계획을 세워두고 장비를 갖추어 이 사람을 유인한 다음 범행을 벌인 건가? 저 위에서 밀어버리고 떠났어도 어차피 빠져나갈 방법이 없으니 결국 사망했을 텐데 굳이 이런 수고를 감내할 이유가 있었을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이 어느새 날이 완전히 밝아있었다. 아마도 수색을 시작했을 테니 경찰과 구조대가 오는 걸 기다리는 동안 이 의문의 실마리를 풀어보며 시간을 때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물론 오랜 시간이 지난 사체이기에 정확한 사망의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다만 이 자리에 묶여있는 걸 보니 추락 후 사망한 게 아니라 지승처럼 운이 좋게 살아남았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이걸 운이 좋다는 말로 표현하는 게 과연 옳을지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미 사망한 사람을 굳이 묶을 이유는 없었을 거다.

백골화가 진행된 지 오래된 뼈는 마모가 심한 상태였지만 매끄러운 마모의 형태로 보아 추락으로 인한 뼈의 치명적인 손상은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여자를 설득하는 데 도움을 줬던 노스캅 티셔츠에 난 구멍이 사망의 치명적인 원인 같았다. 구멍이 난 티셔츠를 들추니 예상대로 같은 자리의 갈비뼈에도 손상이 보였다. 시간에 의한 마모가 아닌 강력한 충격에 의해 부서지고 갈라진 흔적. 지승은 외과의지 부검의는 아니었지만 뼈에 손상을 준 흉기의 정체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총에 맞았다.

필연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또 하나의 가설. 이 사람도 야수의 희생자라는 것. 그렇다면 왜 여기에 묶여야 했을까? 야수가 한 짓은 아닐 거다. 그건 야수의 사냥감 처리 방식이 아니니까. 갖가지 가설을 마구잡이로 떠올리며 로프의 끝을 따라가다 보니 이상한 점이 보였다. 왼팔 부근에서 지어진 매듭. 그런데 매듭을 짓기 전 로프가 사체의 왼팔에 여러 번 감겨있는 특이한 모양의 매듭이었다. 이런 번거로운 절차 없이 로프를 더 단단히 묶을 방법을 여러 개였다. 이건 타인의 도움 없이 혼자 단단히 매듭을 지어야 하는 상황에서 짜낸 매듭을 묶는 방법이었을 터였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여자의 부친은 자신이 사망한 후에도 이곳에 머물기를 바랐다. 이곳에서 몇 년이든 기다리면 언젠가는 누군가 자신을 발견할 거라는 믿음이나 희망 같은 걸 품었던 걸까? 아무튼 여자의 부친은 긴 시간을 이곳에서 버텼고 이제 그 기다림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환하게 머리 위를 비추던 태양이 주황빛으로 물들며 사라지고 또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하지만 여자도 경찰도 구조대도 누구도 오지 않았다. 지승은 또다시 절망에 빠져야 했다. 전원이 꺼진 핸드폰을 노려보며.

차라리 여자와 통화를 하지 않았다면 희망이라도 갖지 않았을 텐데. 잠깐의 희망을 맛 보여준 후 되돌아온 절망은 이전보다 더 깊고 쓴 맛이었다. 지승은 낮에 사체가 스스로를 묶었다는 사실이라도 알아내지 않았다면 차라리 이대로 절벽 아래 몸을 던지는 방법을 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을 알아버렸기에 저 사람과 함께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여자가 둘을 구하러 오지 않는 이상 벗어날 방법이 없었지만.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무력하게 바닥에 누워 낡은 핸드폰이 다시 기적을 일으켜주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사실 그것도 그저 간절한 바람일 뿐 또다시 같은 기적이 일어날 거란 희망은 없었다. 이 이상의 희망은 좋지 않았다. 더 큰 절망을 맛볼 필요는 없으니까. 애써 기대를 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도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그때, 지난밤 보았던 그 불빛이 반짝였다. 핸드폰의 전원이 들어왔음을 알리는 불빛이.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떨리는 여자의 목소리. 지승을 믿고 경찰을 보냈다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텐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화를 내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 지승은 오히려 화를 낼 사람은 자신인데 적반하장인 여자의 태도에 피가 머리로 몰리며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여자가 전화를 끊어버린다면 아쉬운 건 지승이었다. 그게 바로 여자가 지난밤 두 사람의 통화 내용을 반복해 말하게 하는 걸 끈기 있게 견디며 몇 번이고 대답해 준 이유였다. 있었던 일을 그대로 읊어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없던 일을 있었다고 우기는 건 도저히 맞장구를 쳐줄 수가 없었다.

"낮에 박민하 형사 전화로 당신이 직접 나한테 말했잖아. 조난당한 적 없다고……"

지승은 하루 종일 이 절벽 아래에서 백골이 되어버린 여자의 부친과 함께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사의 전화로 어디든 연락이 가능했다면 아직까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황당한 소리에 반박하려는데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용악산에서 야수를 만났다고…… 조난당했으니까 신고해 달라며. 내가 분명 장난치는 거면 가만 안 둔다고 했잖아요.'

동시에 집 앞으로 찾아온 민하가 건네준 핸드폰으로 거짓 제보를 한 여자와 통화를 한 기억이 떠올랐다. 맹세코 지승이 겪은 적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여자가 이야기를 꺼내자 마치 그 일을 실제로 겪은 것처럼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당시의 불쾌했던 심정과 당혹스러움까지. 10년도 넘은 구식 핸드폰의 전원이 들어온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지승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유해인 기자님 맞죠?"

여자의 대답은 이게 현실이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사실이었다. 지승은 민하의 핸드폰으로 해인과 통화를 한 적이 있었고, 지승은 거짓 제보를 취소하라고 짜증을 냈었다. 잊고 있던 기억은 아니었다. 지승의 머릿속에는 민하를 만나지 않고 해인과 통화를 하지 않았던 그날의 또 다른 기억도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6월 27일 겪었던 일에 또 다른 기억이 추가된 것이었다.

"그런데 유기자님, 오늘은 7월 6일이잖아요."

지승이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납득할 수 없는 이 상황을 해인이 이해시켜 주길 바랐다. "너 정말 미친 새끼구나."

해인의 대답으로 확실해졌다. 이건 해인에게도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며 여기서 그 어떤 설명을 해도 해인을 이해시킬 수 없을 거라는 걸. 하지만 도움을 요청할 사람은 6월 27일을 살고 있는 해인뿐이었다. 어떻게든 과거의 해인이 현재의 지승을 도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지난밤 갑자기 핸드폰의 전원이 다시 나간 것처럼 오늘도 같은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아니 그전에 지승을 미친놈이라 믿는 해인이 먼저 전화를 끊어버릴 가능성이 더 높았다. 짧은 시간 안에 해인을 납득시키고 지승을 돕겠다는 생각이 들게끔 만들어야 했다.

"6월 28일…… 그러니까 내일 전 인평경찰서에 갈 겁니다. 박민하 형사를 만나러요."

"그래서 뭐."

해인의 대답은 차가웠지만 당장 전화를 끊지 않았다는 데에 희망이 있었다.

"그날 절 만나주세요. 저한테 화가 나 있잖아요. 직접 만나서 따지든 신고를 하든 처리하는 게 낫지 않나요?"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이런 말로 해인을 설득할 수 없을 거라는 건 알았다. 그리고 다행히도 해인은 아직 지승의 정체에 대해 모르는 것 같았다. 비겁한 방법이라도 상관없었다. 어떻게든 6월 28일에 해인을 인평경찰서로 불러서 지승이 미래에 있다는 걸 믿게 만들어야 했다.

"제가 그날 경찰서를 찾은 건 현명우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해인은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절 만나러 오세요."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건데. 당신한테 무슨 도움이 된다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지승은 해인이 동요하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이해가 안 되시겠죠. 그러니까 절 막으러 오세요. 6월 28일 오전 11시입니다. 그리고 12시 반 경에 경찰서 앞 도로에서 사고가 날 겁니다. 신호를 어긴 오토바이와 검은 세단이 충돌할 거예요."

"개새끼, 사람을 휘두르면서 흥분하는 변태인가 본데 마음껏 즐겨. 그것도 오늘이 끝이니까."

"내일 경찰서에만 온다면 그다음엔 절 어떻게 하든 상관없습니다. 대신 제가 말한 일들이 정말 일어난다면 그땐 제가 7월 6일 용악산에 있다는 걸 믿어주세요. 그러니까 제 말은, 조금이라도 제 말을 믿게 된다면 제가 7월 5일에 용악산에 가는 걸 막아달라는 부탁을 하는 겁니다."

지승은 해인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전화는 끊어져버렸으니까. 이제 올 지 모를 다른 미래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계속-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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