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8일(1)

by 홍진희

아무것도 없었다. 통화를 하는 내내 틈틈이 확인하며 녹취를 했는데도 기계에 남은 건 11분가량의 노이즈 낀 소음뿐이었다.

또다시 자정에 끊겨버린 전화. 이지승이라는 사람은 이번에도 말도 안 되는 소리만 늘어놓았다. 그럼에도 해인은 전화를 끊지 못해다. 거짓이라는 게 드러난 마당에도 지승의 호소가 퍽이나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경찰서를 찾아가 현명우의 무죄를 주장하겠다는 이유는 뭔지, 무엇을 원하기에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을 꼭 만나러 오라니. 지승은 해인에게 무엇을 원하는 걸까?

사실 지승보다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이틀 연속 강우의 번호로 온 전화의 미스터리였다. 이 사실을 털어놨을 때 재희도 분명 말했었다. 다른 사람의 번호를 훔쳐 해지된 기계에 전화를 걸 수 있는 기술은 없다고. 백 번 양보해 전화를 걸었다 해도 자동으로 통화목록에서 삭제가 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심지어 녹음기조차 지승과의 통화를 잡아내지 못했다. 혹시 기계에 이상이 생긴 건가 해서 다시 녹음을 시도해 보니 고장이 난 건 아니었다. 이 집에 돌아와 구식 핸드폰을 찾은 이후부터 해인을 둘러싼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변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만약 이런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녹음에 실패했다 했더라도 지승이 한 터무니없는 말을 비웃으며 잠이나 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비현실적인 상황은 사람을 찜찜하고 두렵게 만들면서도 기대를 갖게 만들기도 했다. 어쩌면 이 안에 어떤 신호가 담겨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지승이 하는 말에 약간의 진실이나 힌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이대로 무시하고 다시 예전처럼 일상을 사는 게 최선일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해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날이 밝으면 지승을 만나러 인평경찰서로 향할 거라는 것을.


오전 11시 반이 조금 넘은 시간. 인평경찰서 주차장에 세워둔 차 안에서 해인은 연신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도착한 지는 벌써 30분이 넘었지만 선뜻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과연 지승을 만나는 게 옳은 일일까? 그보다 지승이 민하를 만나러 오기나 할까? 어딘가에 숨어서 어제의 수모를 잊고 여기까지 찾아온 해인을 비웃고 있는 건 아닐까? 어쨌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지난 이틀간 벌어진 이상한 일들을 계속 신경 쓰는 것보다는 직접 부딪혀 보는 게 낫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아무도 해인을 믿어주지 않는 상황에서 혼자 고군분투하는 게 어쩐지 틀린 게 명백한 증거를 쫓는 탐정소설 속 무능력한 엑스트라 경찰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정말 망상에 빠져서 있지도 않을 일을 만들어 내고 있는 건 아닌 지 하는 두려움도 조금은 있었고 말이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온 이상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지승이란 사람을 만나서 의도를 파악해야 했다.


"박민하 팀장님을 만나러 왔는데요."

수많은 경찰과 구조대를 용악산에서 헤매다 허탕 치게 만들어놓고 뻔뻔하게 경찰서를 다시 찾은 해인을 보는 형사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이럴 때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게 유리하다는 걸 그동안의 기자 생활로 터득한 해인은 태연하게 강력반 제일 바깥에 앉은 윤기에게 민하의 행방을 물었다.

"팀장님은 지금 누가 찾아오셔서 말씀 나누는 중이신데요."

민하를 찾은 방문객이 누군지 듣기도 전에 해인의 심박수가 빨라졌다.

"그게 누군데요?"

"그런 건 함부로 말씀드릴 수 없죠."

예상한 답이었지만 해인을 경계하며 눈빛을 주고받는 형사들을 보니 방문객이 해인과 연관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기자님, 무슨 용건으로 오신 건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팀장님께 전달해 드릴게요."

해인의 안색을 조심스레 살피며 서린이 다가왔다. 전날 있었던 일로 해인의 상태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쉽게 믿을 수 없는 얘기에도 세진병원에 신속하게 연락해 지승의 신원을 확인해 줬고, 용악산에 경찰과 구조대를 보낼 수 있도록 순규를 설득해 주기도 했던 일 때문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던 해인은 서린의 기분을 굳이 상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에요. 개인적으로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죄송한 일도 있고."

"우리한테는 전혀 안 미안하신가 보네."

용악산에 오르기 전부터 시간낭비라 불만이 많던 영진은 대놓고 해인에게 적대감을 드러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해인 때문에 시간과 인력을 어마어마하게 낭비한 꼴이 됐으니 그 점에 관해 미안한 건 사실이었다. 용악산에서 철수를 마치고 순규에게 사과의 말을 전하며 강력반 형사들에게도 전해달라 부탁했는데, 전달이 잘 되지 않았거나 이들의 마음이 풀리기에 그 정도로 사과로는 부족했던 것 같았다. 다시 한번 사과를 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고개를 숙이려는 순간 서린이 해인의 팔을 잡아끌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 같으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오실 거예요. 전 커피 좀 마실까 하는데 저랑 같이 휴게실 가실래요?"

이대로 그냥 가면 영진을 비롯한 강력반 사람들의 앙금을 영영 못 풀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조금 들기는 했지만 노골적으로 자신을 적대하는 영진의 말투에 불만스러운 감정도 조금 솟았기에 해인은 못 이기는 척 서린에 이끌려 휴게실로 향했다.


설탕이 첨가되지 않은 500ml 블랙커피 페트병 두 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자판기 배출구로 떨어졌다. 여러 가지로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 때문에 음료라도 사겠다는 해인을 한사코 만류하며 블랙커피 두 개를 계산한 서린이 손도 빠르게 배출구에서 음료를 꺼내 해인에게 하나를 건넸다.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정말 아니었는데 저 때문에 많이 힘드셨죠."

민망한 손으로 블랙커피를 받아 든 해인이 송구하지만 기자답게 또박또박한 말투로 다시 한번 사과의 뜻을 전했다. 꽉 막힌 음료 뚜껑을 시원하게 연 서린은 별 거 아닌 소리를 듣는다는 듯 사람 좋게 웃으며 쓴 커피를 단숨에 반이나 마셔버렸다.

"서장님도 만나 뵙고 다시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오늘은 간부 회의 때문에 서울에 계신다고 하시더라고요."

미안함이 가시지를 않아 전화를 건 해인에게 순규는 모든 걸 잊은 것처럼 행동했다. 서린처럼 별것도 아닌 일을 왜 아직까지 말하냐는 듯. 정말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런 배려를 받을수록 오히려 해인은 미안한 마음이 커지기만 했다.

"어제 보니까 서장님께 삼촌이라고 부르시던데, 정말 각별하신가 봐요?"

자신들이 서장님이라 부르는 사람에게 삼촌이라며 친근하게 대하는 해인이 신기했는지 서린이 물었다. 인평시에서 순규와 함께 있으면 자주 듣는 질문이었다.

"아시다시피 저희 아빠 동기여서 어릴 때부터 봐오기도 했고 아빠 그렇게 되고 난 후에 서장님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아빠 대신이라고 할 수도 있죠. 박민하 팀장님도 그렇고요."

"부럽네요. 저도 아버지가 안 계셔서 서장님 같은 아버지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자주 생각했었거든요."

순규라면 당연히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아버지상이라 생각하긴 하지만 자신 같은 처지에게 부럽다는 말이 어울리는 건지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말에 해인은 사연은 다른지만 서린에게도 부친의 부재에 대한 결핍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제가 경찰대 있을 때 강의하러 가끔 오셨거든요. 여기 인평경찰서로 발령 난 것도 제가 적극적으로 근무를 희망해서였어요."

전날에도 느꼈지만 서린은 순규에게 자신이 근무하는 경찰서장 이상의 존경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동안 순규가 해인에게 보여줬던 성품으로 봐서 충분히 그럴만한 일이었다.

"서장님이 아니었다면 야수는 그 지저분한 사냥을 아직도 하고 있었을 게 확실해요. 서장님 같은 분이 계셔서 정말 다행이죠."

어쩌면 서린의 순규를 향한 맹목적인 존경심은 야수로부터 나온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수의 출현 후 모든 게 달라졌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인평시는 불과 15년 사이에 야수를 상징하는 지역이 되었으며, 인평시의 모두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야수의 영향 아래 있었다. 심지어 오래전 인평시를 떠난 해인마저도 아직까지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해인은 강우의 실종과 관련된 일을 제외하고는 야수를 이야기의 화제로 삼는 게 불편했다. 서린은 아무 의도 없이 말을 꺼냈겠지만 이 주제를 피하고 싶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불과 바로 어제 용악산에 야수가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경찰들을 괴롭혀놓고도 당장은 야수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모순적인 감정이었다.

"어? 박 팀장님, 저기 나오시네요."

해인의 불편한 감정이 무색하게 먼저 화제를 돌린 건 서린이었다. 반갑다는 듯 서린이 가리킨 방향에는 민하와 함께 한 남자가 휴게실을 지나 출입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 남자였는데 해인은 어쩐지 남자가 낯이 익다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저 남자가 이지승이 확실할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서린이 민하를 부르기 위해 손을 들기도 전에 해인의 발은 이미 두 사람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이지승 씨."

이곳에 자신의 이름을 부를 사람이 있을 거라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해인을 돌아보는 지승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서려있었다. 게다가 자신을 부른 사람이 해인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무표정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다. 역시 지승은 해인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해인아, 네가 또 여긴 웬일이야?"

당황한 건 지승만이 아니었다. 해인을 본 민하 역시 안절부절못하더니 해인과 지승의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날 찾았잖아요. 이지승 씨, 저보고 만나러 와달라면서요."

당황하던 지승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대체 저한테 왜 이러는 겁니까?"

그건 지승이 아니라 해인이 해야 할 말이었는데 이 뻔뻔한 남자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정말 현명우 무죄를 주장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금방이라도 따지고 들 것 같던 지승이 해인의 질문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정말이에요? 이 사람이 현명우 무죄를 주장하러 온 게 사실이에요, 민하 삼촌?"

확답을 얻고자 했던 해인은 지승 대신 민하에게 답을 요구했다.

"너는 대체 그런 소리를 어디서 듣고 온 건데?"

절대 아니라는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니 어젯밤 통화한 대로 현명우의 무죄를 주장하겠다는 지승의 말이 빈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할 말은 넘쳤고 쏟아내고 싶은 분노도 많았지만 해인은 우선 차분히 시간을 확인했다.

12시 5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자,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왔으니 이제 뭘 하면 될까요? 이대로 당신이 말한 그 거지 같은 예언만 기다리면 돼?"

"해인아. 이런 식으로 해봤자 너한테 좋을 거 하나 없어. 얘한테 따진다고 달라지는 게 없다고. 너 이제 와서 갑자기 왜 이래."

지승을 노려보는 해인의 시야를 차단하며 민하가 나무라듯 말했다. 얘? 이건 너무 친근한 호칭 아닌가? 두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사이인가?

"그때도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지승이는 전혀 몰랐다고. 야수랑 관련해서 아는 게 없다고 몇 번을 말해. 분명 너도 납득한 줄 알았는데 이제와 이러면 어떡해, 해인아."

묻기도 전에 민하는 해인의 의문을 긍정하며 지승의 무죄를 호소하고 있었다. 그런데 해인에게 지승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니. 그것도 야수와 관련된 일이라니. 해인은 전혀 기억이 없었다. 아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무언가 희미하게 잡힐 듯 흐릿한 기억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정리할 필요도 없이 지승이 먼저 해인에게 따지고 들었다.

"유해인 씨가 고통받았을 거라는 건 당연히 잘 압니다. 아무리 그래도, 제가 아무리 그 사람 아들이라고 해도 마음이 편했을 리는 없잖아요. 유해인 씨만큼은 아니어도 저 또한 지난 15년 간 매일을 고통 속에 살았단 말입니다!"

해인은 살면서 누군가의 말이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요즘 들어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퍽이나 많아졌다. 특히 지승과 관련된 일이면 더욱 그랬다. 아들? 어려운 말을 하는 게 아닌데도 해인은 지승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 경찰에 성실하게 협조했고 제가 아는 모든 걸 말했어요. 정말 제 아버지가 야수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요. 그 사람한테서 벗어나 조용히 살고 싶은 생각뿐이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성까지 바꾸고 야수와 관련된 어떤 것도 피하면서 살았는데 왜 자꾸 절 찾아내 자극하는 겁니까?"

아…… 이제야 흐릿하던 해인의 기억이 선명해졌다. 어쩐지 낯이 익다 생각했던 얼굴. 12년 전 야수가 사형선고를 받던 날. 재판장 제일 뒤에 앉아있던 침울한 얼굴의 남자. 누군가 그 침울한 얼굴을 가리키며 해인에게 귀띔 해주었었다. 쟤가 바로 현명우의 하나뿐인 아들이라고. 그날의 창백하지만 선이 굵은 앳된 남자의 얼굴 위로 조금 더 날카롭게 다듬어진 눈매의 현재의 지승의 얼굴이 겹쳐졌다.

"기억났어, 당신. 현명우 아들."

해인의 물기 젖은 눈가가 분노로 떨렸다.

"감히…… 현명우 아들이 감히 날 기만했던 거야?"


-계속-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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