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8일(2)

by 홍진희

지승이 자신의 정체까지 밝혀가며 악의적인 장난을 거는 건, 오래전 해지한 핸드폰으로 걸려온 전화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머릿속으로 수없이 많은 가설을 세우며 이유를 곱씹어 봤지만 그 많은 가설 중에 이지승이 현명우의 아들이라는 가설은 전혀 없었다. 현명우의 아들이 성까지 바꾸며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할 정도의 관심조차 없었으니까. 아니 애초에 현명우의 가족에 관심을 둘 이유가 없었다. 해인의 관심은 오직 강우의 행방뿐이었다. 한때 야수도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기를 바랐던 적도 있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런 감정들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야수에게 남은 가족이 아들 한 명뿐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그 아들 또한 아버지가 야수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순규를 통해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야수가 고통을 받는 것과 그의 가족이 고통을 받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자신처럼 야수의 아들도 혼자 남겨졌다는 건 통쾌하다거나 위로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동질감을 느끼게 될까 두려웠기에 의식적으로 그쪽으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지승에게는 그런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일말도 없는 걸까? 지금 이건 가해자의 아들이 피해자의 딸을 괴롭히고 있는 상황이었다. 누가 봐도 역겹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아닌가.

해인의 결명 가득한 시선을 지승은 피하지 않았다. 이런 시선쯤은 이미 익숙했다. 호의로 다가오던 상대도 지승이 누구의 아들인지 알고 난 후에는 늘 같은 시선을 던졌으니까. 이런 시선을 받을 때면 늘 그랬듯이 지승은 해인의 경멸 어린 시선을 무시하고 경찰서 밖을 나섰다. 하지만 정문을 벗어나기도 전에 해인이 지승의 팔을 낚아챘다. 아주 거칠게.

"뭘 원한 건데? 내가 당신 앞에서 억울해하거나 우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어?"

"내가 뭘 원하는지 묻는 겁니까. 내 핑계로 경찰에 조난신고를 한 것도, 오늘 여기까지 날 찾아온 것도 유해인 씨 스스로 한 거면서 왜 내가 원하는 걸 묻는 건데요? 현명우가 무죄를 주장한 것 때문에 화가 난 거라면 직접 가서 따져요. 난 그 사건이랑 아무 관련도 없으니까."

해인의 무례한 행동에 참다못한 지승이 소리쳤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리를 치려다 간신히 화를 억눌렀다고 할 수 있다. 분노를 폭발시키려던 순간 본 해인의 모습이 너무 처참했기 때문이다. 해인이 이제와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적의를 보이는 게 지승은 당황스러웠다. 호의를 가질 수 없는 건 당연한 말이지만 이건 마치 지난 15년 동안 쌓아둔 모든 울분을 한꺼번에 지승에게로 쏟아붓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승은 해인이 이러는 이유가 하나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최근 해인이 직접 보도했던 사건. 명우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자해를 했던 일.

"오늘 여기 현명우가 무죄인 거 입증하러 온 거라며. 아니야?"

지승의 입에서는 단 번에 아니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물론 명우의 주장을 믿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나오니 확인이나 한 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온 건 맞았다. 명우를 믿지 않는다고 했지만 정말 명우가 무죄가 되기를 바란 적이 없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할 자신은 없었다.

"뭔 무죄 입증이야. 자료만 받으러 온 건데. 그리고 경찰서 와서 주장한다고 다 무죄입증이 돼? 해인이 너 진짜 이상한 거 알지?"

다행히 두 사람을 뒤따라 온 민하가 지승 대신 변명을 해주었다.

"삼촌은 제가 처음에 조난 신고했을 때 이미 알았죠? 제가 말하는 이지승이란 사람이 누군지."

대답 대신 시선을 피하는 걸 보니 해인의 추측대로 민하는 이미 지승이 누구인지 알고 있던 게 확실했다.

"그런데도 저보다 이 사람 말을 믿는 거예요?"

유치하지만 서러운 감정이 터져 나왔다. 민하도, 순규도 모두 해인과 더 가까운 사람들 아닌가. 그런데 모두가 지승의 말만 믿고 해인을 정신이상자 취급하고 있었다. 나야, 아니면 쟤야,라는 초등학생도 안 할 법한 유치한 투정으로 보일 것 같아 걱정되면서도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니, 화살이 왜 그렇게 돌아오는지 모르겠지만 여기가 뭐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경찰서야. 해인이 네 말을 무턱대도 안 믿은 게 아니라 경찰서에서 할 수 있는 조사는 다 해 본 거라니까. 그런데 통화 기록도 없고, 지승이는 용악산 근처도 안 갔는데 어떡하라고."

해인의 서운한 추궁에 민하도 억울함을 토로했다.

"유해인 씨. 해결해야 될 일이 있다면 당사자와 직접 해결하세요. 그 사람 아들이란 이유로 제가 대신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는 겁니다. 대신 고통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고요."

지승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저런 말을 하려면 해인을 먼저 건들지 말았어야 했다. 이 뻔뻔함에 분노를 느끼면서도 해인은 동시에 혼란스러웠다. 분명 눈앞에 있는 사람은 지난밤 통화를 한 사람과 동일인물임이 확실한데 자꾸만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것 역시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이틀 동안 말이 되는 일이 과연 있기는 했었나.

"왜 날 여기로 불렀어요? 어차피 달라질 건 없었을 텐데. 여기서 당신을 만나봤자 현명우 아들이라는 것만 알게 되고 결과는 최악이 될 게 뻔했는데 이런 걸 원한 거예요?"

해인의 물음에 지승은 대답 대신 자리를 벗어나는 걸 택했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정문으로 향하는 지승의 뒷모습을 보며 해인은 분노를 넘어선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과연 이런 짓을 하면서까지 지승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이대로 지승을 그냥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니 어떤 결론이 나든 오늘은 붙잡고 끝을 봐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지승의 옷자락을 잡으려는데, 그 순간 불필요할 정도로 속도를 낸 오토바이가 빠르게 지승의 앞을 스쳐갔다. 그 모습에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의 시간을 확인했다. 12시 30분이었다. 지난밤 지승이 사고가 날 거라고 말했던 시간. 들을 가치도 없는 싸구려 수작이라 여기면서도 어째서인지 오토바이에서 눈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거리 횡당보도가 빨간불로 바뀌었지만 오토바이는 오히려 속도를 높였다. 동시에 우측 코너에 가려져 움직임이 보이지 않던 검은 세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단도 오토바이도 속도를 늦추기에는 너무 늦은 타이밍이었다.

현실성 없는 큰 충돌음과 함께 오토바이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오토바이와 운전자가 모두 솟아올랐지만 바닥으로 추락하는 속도는 달랐다. 묵직한 오토바이가 떨어지고 곧이어 운전자가 내동댕이쳐졌다.

'12시 반 경에 경찰서 앞 도로에서 사고가 날 겁니다. 신호를 어긴 오토바이와 검은 세단이 충돌할 거예요.'

근처에 있던 경찰들과 지승, 민하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사고를 목격한 사람들이 현장으로 달려갔지만 해인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온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끔찍한 사고를 목격한 충격에서인지, 지승이 말한 사고가 정말 눈앞에서 벌어져서인지 그 이유는 해인도 알 수 없었다.


구급차가 오토바이 운전자를 실어가는 모습을 보고 난 후에야 지승은 당장이라도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것처럼 적의를 보이던 해인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사고 난 난 직후의 해인은 몹시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지만 지승이 굳이 신경까지 쓸 일은 아니었다.

지승도 내내 바랐다. 강우가 생존했을 거라는 가능성은 불가능에 가까우니 적어도 시신이라도 발견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명우의 범행에 지승이 책임감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명우가 경찰에 검거되는 날까지도 지승은 명우와 야수의 연관성에 대해 의심해 본 적조차 없었으니까. 지승도 가족을 잃은 고통을 알기에 그 감정에 공감하는 거였다.

명우가 용병생활을 청산하고 자신의 아내이자 지승의 모친인 윤정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의견을 물었을 때 지승은 적극 찬성했었다. 명우가 사지를 넘나드는 용병 일을 관둔다는 게 안심이 되었고, 지승이 태어난 이후 1년에 한두 번 집에 오는 남편을 대신해 혼자 아들을 기르고 집안을 돌봤던 윤정이 이제라도 남편과 함께 여유로운 삶을 즐기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의대에 입학해 홀로 서울에 남았던 지승이 방학 때 인평시 집을 찾았을 때도 실제로 두 사람은 전보다 훨씬 평안해 보였다. 하지만 윤정은 이곳에 온 지 1년이 채 되기 전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일면식도 없던 어느 약쟁이의 손에.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자기 악마의 손에 가족을 잃는다는 건 억울함, 분노 등의 세상에서 정의 내린 언어들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다. 그건 어떤 방식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겪어 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래서 지승은 해인을 이해했다.

지승과 해인은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서로에게 해를 가한 적은 없지만 두 사람의 만남은 고통스러운 기억만 부추길 뿐이다. 그러니 부디 오늘이 해인을 보는 마지막 날이기를 바랐다.


"용악산에 갈 생각이에요?"

방금 전의 바람이 무색하게 해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지승의 옆에 선 해인은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은 표정이었다.

"저에 대한 설명은 아까 박민하 형사님한테 다 들은 거 아니었어요?"

"가지 말아요."

해인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지만 왜인지 공격적인 태도는 수그라 들어 있었다. 지승은 어쩌면 해인이 미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에서 명우의 소식을 전한 후 해인이 지승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니 타당성 있는 추론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지승이 어떤 말로 설득을 한다 해도 소용없는 거 아닌가. 그런 지승의 당혹스러움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해인은 지승의 두 눈을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마치 한 글자 한 글자 지승의 뇌에 새겨 넣기라도 하겠다는 듯.

"이지승 씨, 난 분명 경고했어요. 용악산에 절대 가서는 안 돼요. 잊지 말아요. 용악산에 무슨 일이 있어도 가면 안 된다고요."

-계속-

일요일 연재
이전 09화6월 28일(1)